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1114080137927


[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⑤ 고구려가 창건한 사찰 유적

정창현 머니투데이 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입력 2020. 11. 14. 08:01 


[편집자주]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삼국시대 때 불교가 전래된 후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종교로 자리잡아온 까닭에 한반도에는 불교와 관련된 많은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은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에 지어진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이다. 372년(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전했고, 2년 뒤에 승려 아도(阿道)가 오자 이듬해에 초문사(肖門寺)를 지어 순도를 머무르게 하고, 이불란사를 지어 아도를 머무르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절은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진지 20여 년이 흐른 393년부터 광개토왕[공식 시호(諡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은 평양지역에 9개의 사찰을 창건했다. 9개 사찰(九寺)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면서 평양은 4세기 중엽부터 '동방의 천축'(天竺)이라 불렸다. 평양성 천도 이전에 9개의 사찰을 건설한 것은 고구려가 그만큼 평양지역을 중요시했고, 주민들도 상당히 많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당대 기록인 '광개토왕릉비'에는 광개토왕이 평양으로 두 차례 행차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평양 대성산 국사봉 기슭에 있는 광법사 전경. 고구려 광개토왕 때 처음 세워진 사찰로, 6.25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90년에 복구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14.© 뉴스1


이때 창건된 사찰 중 광법사, 중흥사(重興寺), 영명사(永明寺) 등의 유적과 유물이 현재 평양에는 남아 있고, 이외에도 고구려 때 세워진 사찰로 법운암, 정릉사, 금강사 등이 현존하거나 발굴됐다. 그 중 광법사, 정릉사, 법운암은 직접 방문이 가능하다.


대성산 국사봉 아래에 있는 광법사(국보유적 제164호)는 건립 당시 14채의 건물을 소유한 웅장한 사찰이었다. 1700년도에 불타 버린 것을 1727년에 중건했고, 1760년에 다시 개건 보수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6.25전쟁 중에 폭격으로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됐고, 1990년에 일부 전각들이 복구됐다.


평양 대성산 국사봉 기슭에 있는 광법사 대웅전과 8각5층탑. 모두 1990년에 복원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14.© 뉴스1


발굴 복구과정에서 땅 속에 묻혀 있던 1727년에 세운 '광법사사적비'와 1758년에 세운 '중수단청비', 1638년에 세운 '광법사시왕개소상비'가 발견됐다. 사적비에 따르면 대성산에 있던 10여 개의 사찰 중 광법사가 가장 규모가 컸다고 한다. 현재 이 비석들은 천왕문 앞에 세워져 있다.


광법사의 역사가 기록돼 있는 '광법사사적비'(1727년), '광법사시왕개소상비'(1638년), '중수단청비'(1758년)의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14.© 뉴스1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광법사의 승려들이 거처했던 승당 건물과 대웅전이 나온다. 대웅전은 광법사의 기본 건물로 우리나라 불교사찰 건물 중 찾아보기 드문 2층 건물이다. 대웅전 앞에 8각5층탑(국보유적 제185호)이 복원돼 서 있다.


복구된 지 3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 고풍스런 맛은 느낄 수 없지만 그나마 조선시대 세운 비석과 절 입구에 옮겨놓은 당간지주가 과거 웅장했던 광법사의 과거를 짐작케 한다.


광법사 경내로 옮겨진 고구려 때 사찰인 중흥사의 당간지주의 모습.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당간지주로 알려져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14.© 뉴스1


해탈문 동쪽에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 국보유적 제147호)는 원래 평양성 밖에 광법사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중흥사 터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두 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랫부분이 매몰되어 기단 하부의 형태를 알 수 없다. 높이 약 4m, 밑넓이는 59∼66㎝, 두께는 46∼53㎝이다. 이 당간지주는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당(幢)을 달아 두는 기둥이다.


광법사와 같은 시기에 세워진 영명사는 부벽루의 서쪽에 있었으며, 고구려왕의 이궁(왕궁과 떨어져 있는 별궁)을 개조하여 절로 만든 것이라 한다. 국내성의 이불란사에 있던 승려 아도가 이 절로 옮겨 머물렀다고 한다. 예로부터 고색이 짙은 영명사의 중을 찾는 풍경은 '평양8경'의 하나로 꼽혔다. 고려시대에는 선종·숙종·예종·인종·의종 등이 대동강에 용선을 띄우고 노닐다가 이 절에서 휴식을 취하며 헌향했다는 기록이 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대웅전 등이 소실된 영명사의 모습. 이때도 부벽루와 전금문은 남아 있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14.© 뉴스1


일제강점기 영명사의 모습. 1922년 대웅전이 중건됐기 때문에 그 이후에 촬영된 사진이다. 대웅전 앞에 석조불감이 있고, 멀리 을밀대가 보인다. 6.25전쟁 때 영명사가 소실된 후 석조불감은 용화사로 옮겨졌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14© 뉴스1


영명사는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으로 몇 칸의 당우만을 남긴 채 모두 불타버렸는데, 용반(龍般)이 주지로 취임하여 수년 동안 사찰을 일신시켰으며, 1922년에는 대웅전을 중건하고 당우 및 요사채를 새로 지었다. 1911년 이 절은 서도(西道)의 본산이 되었고, 1920년 31본산 중의 하나가 됐다. 그러나 6·25전쟁 때 폭격으로 영명사는 소실됐고, 5층8각석탑(五層八角石塔)과 석조불감(石彫佛龕)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 영명사 자리에는 현재 '흥부초대소'(국빈을 위한 전용 숙소)가 들어서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돼 있다. 1986년 평양을 방문한 피델 카스트로 쿠바 의장과 1995년 평양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가 이곳에 묵었다.


1960년대 중반 부벽루와 영명사 5층8각석탑을 평양시민들이 둘러보고 있다. 이때까지도 영명사가 있던 곳은 공개돼 있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14© 뉴스1


모란봉에서 내려다 본 흥부초대소와 부벽루. 1970년대에 영명사 자리에 국빈을 위한 숙소인 흥부초대소가 들어서면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14.© 뉴스1


고려시기에 만들어져 대웅전 앞에 있던 영명사 8각불감(국보유적 제148호)은 영명사가 소실된 후 모란봉 기슭 용화사로 옮겨져 보존돼 왔으나, 용화사가 2015년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된 후 어디로 이전됐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말하는데, 영명사 석조불감은 2단의 8각 기대석(基臺石) 위에 감실을 만들고 그 위에 옥개석과 상륜을 올린 독특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용화사에는 원래 평양 평천구역 평천동의 흥복사터에 있던 '흥복사 6각7층탑'(국보유적 제24호)도 옮겨져 있었지만, 역시 다른 곳으로 이전됐다.


평양 개선청년공원 위쪽에 있는 용화사 경내로 옮겨진 영명사 석조불감과 흥복사 6각7층탑. 2015년 용화사가 철거되면서 다른 곳으로 이전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14.© 뉴스1


영명사 옆에는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이 기린을 길들였다는 기린굴(麒麟窟)과 기린을 타고 승천했다는 조천석(朝天石)이 있었다는 설화가 내려온다. 평양 일대에 동명왕과 관련된 설화가 많은 것은 장수왕대에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동명왕과 관련된 유적 및 설화 역시 그대로 따라온 것으로 추정된다. 기린굴은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사진이 있고, 2011년에 북한 역사학계는 부벽루 근처에서 기린굴로 보이는 유적을 발견했다.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기린굴(麒麟窟) 입구 모습. 영명사 옆에 있었으며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이 기린을 길들였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2011년 북한은 기린굴의 위치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14.© 뉴스1


평양 외곽 용악산에는 영명사의 말사였던 법운암이 남아 있다. 법운암의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사적비에 따르면 고구려 때 창건되고 조선 중기에 중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암자 주변의 기단을 쌓은 양식이 고구려 성곽과 유사하고 주변에서 고구려 시대의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되어 고구려 시기의 사찰로 추정된다.


고구려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명사의 말사인 법운암 본전과 5층석탑.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14.© 뉴스1


법운암은 용악산 중턱의 가파른 경사지에 자리 잡고 있다. 터가 매우 비좁아 전면에 4단의 화강암 축대를 길게 쌓아 본전 터를 마련했고, 본전 주위로 나한전, 독성각, 요사채, 산신각 등 모두 5동의 작은 전각들이 지형에 맞게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 본전과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이 남아 있고, 본전 앞에는 고려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담한 5층석탑 1기가 서 있다.


북한은 새로 복원된 사찰이나 석탑 등도 국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고구려 시기에 창건된 정릉사(定陵寺)가 대표적이다. 정릉사(국보유적 제173호)는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은 절로 추정되며, 전(傳)동명왕릉 앞에 자리 잡고 있다. 오래 전에 폐사된 것을 1974년에 북한이 발굴해 복원했다. 발굴 당시 '고구려', '정릉', '능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그릇조각들이 발견됐다. 이러한 유물을 토대로 북한은 이 절이 동명왕릉의 원찰(願刹)이었다고 주장한다.


1974년 북한이 복원한 정릉사 전경. 정릉사는 고구려시기에 처음 지어졌고,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은 절로 추정된다. 정면에 보광전이 있고 그 좌우에 용화전과 극락전이 세워져 있으며, 중앙에 8각7층탑이 복원돼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14.© 뉴스1


정릉사는 발굴결과 전체넓이 3만㎡나 되고 18채의 건물터와 10개의 회랑터, 1개의 탑터, 그리고 물도랑을 갖추고 있었으며 전체가 남북 132.8m, 동서 223m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대규모 사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은 복원한 8각7층석탑(국보유적 제184호)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고유한 1탑 3금당식 건물구조로 정릉사를 복원했다.


중금당인 보광전은 외형은 2층이지만 내부는 아래위층을 틔운 건물로 복원됐고,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입상 삼불을 봉안하고 있다. 동금당인 용화전에는 석가의 구제에서 빠진 사람들을 구한다는 이른바 제2의 석가인 미륵불을 봉안하고 있다. 서금당인 극락전에는 극락세계를 주재한다는 아미타여래입상과 관음보살, 지장보살 입상 삼불을 봉안하고 있다.


1974년 북한이 복원한 정릉사 보광전과 용화전, 8각7층탑의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14.© 뉴스1


보광전 뒤쪽에는 후세의 왕들이 시조능에 제사 지내러 왔을 때 사용하던 별궁(행궁) 터가 있고, 그 뒤에는 잘 다듬은 돌로 쌓은 물도랑 터가 발견됐다. 특히 2007년 2월 직접 답사한 정릉사 뒤쪽 우물에서는 투구, 방패 등을 비롯한 종의 철제품과 정릉사의 머리글자인 '정'(定)자가 새겨진 질그릇들, 그리고 호랑이, 사슴, 노루 등의 짐승뼈 등 모두 35종에 1,130점이나 되는 유물들이 나왔다. 이 우물은 안학궁터 앞에 있는 고산동우물(국보유적 제172호)과 함께 대표적인 고구려시기 우물 유적으로 평가된다.


1974년 북한이 복원한 정릉사 보광전 뒤쪽에 있는 고구려시기 우물과 출토 기와 조각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14.© 뉴스1


광법사와 정릉사는 고구려시기에 창건됐지만 완전히 폐사된 후 복구됐기 때문에 고즈넉한 사찰의 향기를 느끼기 어렵다. 오히려 이들 사찰보다 창건 시기는 늦지만 평양 북쪽에 남아 있는 동금강암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동금강암(보존유적 제22호)은 숲이 울창하고 기암괴석과 협곡이 아름다운 평양시 순안구역 오산리 담화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에 있는 금강산에 위치한다고 하여 동금강암 또는 동금강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고려 초기인 955년에 창건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36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이 암자에는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머물렀고, 사명대사도 머문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평양시 순안구역 오산리 담화산에 있는 동금강암. 고려 초기인 955년에 창건되었으며, 현재 건물은 1936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14.© 뉴스1


이외에도 평양에는 옛 청암동성 자리에 498년(고구려 문자왕 7)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금강사터(국보유적 제25호)가 남아 있다. 금강사는 조선 초기 이전에 불타 없어졌고,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처음 발굴돼, 절터 앞쪽에서 5기의 집터가 확인됐고, 부근에서 금·구리·흙으로 만든 유물과 사슴뿔처럼 생긴 장식물이 발견됐다. 북한은 금강사가 고구려의 전형적인 사원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각 유적의 평면들이 치밀하고 짜임새 있게 설계돼 고구려의 건축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한다.


yeh25@news1.kr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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