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27183


남편 손 잡았다고 노비 손가락 잘라, 조선시대의 '갑질'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송씨 집 노비와 노상추가 원하던 새로운 세상

18.04.23 14:11 l 최종 업데이트 18.04.23 14:11 l 글: 김종성(qqqkim2000) 편집: 장지혜(jjh9407)


예전 같으면 보도조차 되지 않았을 재벌의 갑질이 이제는 중대 범죄가 되고 있다. 이번 대한항공 일가 사건에서는, 조현민 전무의 '물벼락 갑질'이 기폭제가 돼, 국민적 비난이 폭주함은 물론이고 지난 21일에는 관세법 위반 의혹을 명분으로 압수·수색까지 진행됐다. 


종전에는 재벌 일가가 물병보다 더한 것을 던져도 은폐되기 일쑤였다. 삼강오륜에서는 갑의 위치인 군주나 아버지한테도 도리와 의리를 요구했다.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갑에게도 그런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재벌 일가는 그런 것을 지킬 필요가 없는 사람들처럼 살아 왔다. 임금이나 아버지보다 더 높은 사람들처럼 군림해왔던 것이다. 


그들이 그간 자행한 갑질에 비하면, 조현민의 물병 투척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그런데도 이처럼 파장이 큰 것은 재벌 개혁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된 동시에, 대중 혹은 국민의 힘이 그만큼 막강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선거운동기간뿐 아니라 4년 내내, 재벌이 아닌 국민한테 고개를 숙여야 할 세상이 된 것이다. 


무력행사가 동원된 일시적 정치변혁 때, 경제적 지배층이 '완장'을 찬 대중한테 고개 숙이는 사례는 많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무력행사가 없는데도 일상적으로 고개를 숙여야 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한국을 포함한 인류 역사가 대중 중심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로 해석될 수 있는 현상이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처럼 새로운 현상. 이런 현상을 마음속으로나마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시절을 살았던 이들이 있다. 경제적 지배층의 갑질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시대에 이 땅을 밟았던 사람들이다. 


경제적 지배층의 갑질이 자연스러웠던 시대


16세기 조선을 뒤흔든 개혁파 지도자, 조광조의 일파로 몰려 한때 옥고를 치렀던 홍언필(1476~1549년)이란 인물이 있었다. 지금 소개할 갑질 피해자는 홍언필이 아니라 그 아내 송씨의 여성 노비다. 노비주인들은 거의 다 지주였다. 지주들은 오늘날로 치면 농업기업 사장들이었다. 여성 노비는 사장 집에 거주하는 솔거노비였다. 


전 의령현감 서유영이 쓴 <금계필담>에 나오는 이 노비는 사장 딸인 송씨한테 말도 못할 갑질을 당했다. 물병 투척 정도가 아니었다. 소름 끼치는 신체 손상이었다. 


송씨는 처녀 시절부터 드세기로 유명했다. 홍언필은 기선을 제압할 목적으로 결혼 다음날부터 무리수를 뒀다. '남자 일에 참견 말라'는 메시지를 전할 목적으로, 술상을 들고 신혼 방에 들어온 여자 노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결혼식과 그 이후 한동안은 신혼부부가 신부 집에 살았으므로 이 노비는 송씨 쪽 노비다. 


▲  조선시대 신혼부부. 서울 남산한옥마을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송씨는 처음에는 반응이 없었다. 무덤덤해 보였다. 그런데 홍언필이 신혼 방을 나와 사랑채에 있을 때였다. 송씨가 사람을 시켜 뭔가를 보냈다. 받아보니, 여자 노비의 손가락이었다. 홍언필의 손이 닿은 그 손가락을 베어버렸던 것이다. 


손가락이 베인 여자 노비는 사장님 따님의 만행을 폭로할 수 없었다. 어디 가서 항변할 수도 없었다. 법에는 처벌 규정이 있었지만,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 법이 노비 편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잘못 신고했다가는, 주인집 사위한테 손을 잡힌 일로 인해 역공을 당할 수도 있었다. 사위와 정분이 난 여자노비라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갑질을 참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농업기업 사장들의 갑질은 '을'을 성가시게 하는 방법으로도 이루어졌다. 투옥된 홍언필을 변호해준 재상 정광필의 가문에서도 갑질이 있었다. 이 이야기도 <금계필담>에 나온다. 


정광필 가문은 한양 도성 밖에 토지가 있었다. 그 집 노비들이 소작 부치는 땅이었다. 지주에 대한 소작농의 의무는 원칙상 수확량의 절반을 납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소작농이 씨앗 준비와 세금 납부까지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인집에 일이 생기면 가서 거들기도 해야 했다. 정광필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집안에 제사가 있으면 한양 밖 노비들을 불러들여 일을 시킨 다음에 다음날 돌려보냈다.  


▲  지주와 소작농. 그림은 김홍도의 <타작>. ⓒ 저작권자 없음


정광필은 홍언필뿐 아니라 조광조를 위해서도 구명운동을 벌였다. 양심적 보수파였던 것이다. 하지만 소작농들과의 관계에서는 여느 지주들과 다를 바 없었다. 소작농들에게 집안의 대소사까지 맡겼다. 그렇지만 소작농들은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관청에 가서 송사를 벌인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밥줄이 끊어질 수도 있었다.  


기업 사장들의 갑질이 소작농들한테만 향한 것은 아니다. 그중 일부는 한양 같은 도회지에 주택을 사놓고 임대사업을 했다. 도시에는 지방 출신 관리들을 포함해 객지 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을 겨냥한 지주들의 임대업이 있었다. 이런 관계에서도 갑질은 여지없이 벌어졌다.  


세입자들은 소작농들보다 지위가 높은 경우가 많았다. 특히 한양 세입자들 중에는 고위직 관료가 많았다. 하지만, 지주 출신 집주인 앞에서는 어디까지나 세입자에 불과했다. 그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보다 많이 배우고 똑똑한 세입자라고 해서 집주인이 특별히 봐주지 않았다. 다만, 다른 세입자를 대할 때보다 좀 조심할 따름이다. 그 시절에도 세상은 성적순이 아니라 자금력 순위에 따라 움직였다.  


서울지하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주변에 훈련원이 있었다. 군사학교 비슷한 곳이었다. 여기서 종6품 주부로 근무한 노상추(1746~1829년)란 관료가 있었다. 아니, 노상추란 세입자가 있었다. 조선 후기인 정조 임금 때 세입자였다. 종6품이면 중앙관청에선 계장급이고 지방에선 사또급이다. 결코 지위가 낮지 않았지만, 세입자는 어디까지나 세입자였다. 


노상추가 남긴 일기에 따르면, 처음에는 한양에서 초가집을 구해 살았다. 그러다가 6년 뒤에는 지금의 충무로역 인근의 기와집 사랑채를 셋방으로 얻었다. 전세보증금은 27냥이었다. 노비를 1명 내지 5명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충무로역과 훈련원은 도보로 20분 내외다. 출퇴근이 용이한 곳에 전세방을 구한 것이다. 집도 기와집이었으니, 노상추는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였다. 갑질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  조선시대 기와집. 경기도 용인시 한국민속촌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경제적 '갑'에게 요구되는 윤리


이사한 지 40일 쯤 되던 날이었다. 집주인이 갑자기 방을 뺄 것을 요구했다. 40냥에 들어오기로 한 사람이 있으니 비워달라는 것이었다. 노상추가 강력히 항의하자, 집주인은 "3냥만 더 내고 그냥 있으라"며 물러섰다. 노상추는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집주인은 또 다른 항의에 직면했다. 40냥에 계약한 사람이 항의한 것이다. 그러자 주인은 노상추를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그 다른 방에는 정6품 관원이 세 들어 있었다. 그 관원을 쫓아내고 방을 차지하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노상추는 방을 빼기로 결정했다. 갑질에 굴복한 것이다.  


이사 가는 날이었다. 보증금 반환을 요구했다. 그런데 주인은 10냥만 내놓았다. 급한 데가 있어 썼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노상추는 그 돈만 받아들고 나갔다. 그 뒤로도 그는 임대차 계약이 두 번이나 깨지는 불운을 겪었다. 결국, 지인 집에 세 드는 것으로 전세대란은 종결됐다. 


재판을 통한 분쟁해결 절차가 없지는 않았지만, 관직 유무에 관계없이 힘이 막강한 이들이 많았다. 노상추의 집주인은 중앙 관료들을 함부로 대했다. 오늘의 재벌처럼 관직에 관계없이 힘이 셌던 것이다. 그러니 재판까지 가봤자, 공연히 시간만 끌 뿐이었다. 그 시절에도 법은 가진 자의 편이었다. 관직을 가진 자의 편이 아니라, 돈을 가진 자의 편이었다. 노상추는 화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애환을 겪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노상추는 임금을 주군으로 모시는 관료였다. 그 임금도 노상추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임금이 신하를 죽이거나 귀양 보내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임금이 신하를 함부로 대하면 연산군처럼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노상추의 집주인은 아무런 명분 없이도 패악질을 했다. 그러고도 멀쩡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군위신강이니 군신유의니 하는 윤리관계가 있었다. 이것은 쌍방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소작농과 농업기업 사장 혹은 소작농과 지주, 노비와 주인, 세입자와 집주인 사이에는 그런 쌍방적인 윤리관계가 명확히 확립되지 않았다. '을'의 일방적 의무만 강조됐다. 


정치적 갑을 관계에서는 쌍방 윤리가 일찍 확립되고 이것이 사회적 윤리규범으로 편입된 데 반해, 경제적 갑을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노상추는 갑질을 참는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갑을 관계에서 쌍방 윤리가 명확히 확립되지 못하고 이것이 사회적 윤리규범으로 편입되지 못한 것은, 이 관계가 차지하는 사회적 비중이 낮아서가 아니다. 정치적 갑을 관계에 비해 경제적 갑을 관계가 대중을 속박하는 정도가 훨씬 더 강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갑을 관계 속에서 대중은 쌍방 윤리를 요구하는 것보다는 그 관계 속에 머무르는 게 더 다급했다. 관계가 해소되는 순간, 실직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적 갑을 간에는 쌍방 윤리가 확립되기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적 '갑'에게도 윤리를 요구하는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다. 여러 차례 시민혁명으로 정치적 '갑'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친 대중이, 이제는 그 여세를 몰아 경제적 '갑'에게도 윤리를 가르치려 하고 있다. 송씨 집 및 정광필 집 노비들, 그리고 노상추가 간절히 원했을 새로운 세상을 향해 우리 시대가 성큼성큼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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