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43646.html


“보안대 끌려가 밤마다 떨었다”…입 연 5·18의 여성들

등록 :2018-05-08 05:00 수정 :2018-05-08 09:31


5·18 그날의 진실 ① 여성 성폭력·고문 

가두방송 전춘심씨 “화장실 앞에도 총 겨눈 군인”

총상 환자 깨어나자 폭도로 각목으로 두들겨패

군인 5명이 성폭행한 여고생은 현재까지 조현병


5·18 가두방송의 주인공 전춘심(68·경기도)씨는 보안대로 끌려간 뒤 간첩으로 몰려고 하는 수사관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전춘심씨 제공

5·18 가두방송의 주인공 전춘심(68·경기도)씨는 보안대로 끌려간 뒤 간첩으로 몰려고 하는 수사관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전춘심씨 제공


“이북 모란봉에서 2년간 교육받고 온 여간첩 ‘모란꽃’이 바로 너라고 하더라구요.”


5·18 가두방송의 주인공 전춘심(68·경기도)씨는 7일 <한겨레>에 “수사관들이 나를 간첩으로 몰기 위해 잔혹하게 고문했던” 38년 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는 1980년 5월19일 청년들과 동사무소에서 앰프를 가지고 나와 가두방송을 시작했다. “군인이 시민들을 개 패듯 때린다”는 소식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시내를 돌며 차를 타고 가두방송을 하다가 한 차례 ‘간첩’으로 몰렸지만 경찰관 가족이라는 것이 확인돼 풀려났다. 그러다가 24일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505보안대로 끌려갔다. “도착하니까 ‘이년이 그 방송한 년이야?’라고 하더라구요.”


지하실엔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전씨는 “몇몇은 총을 내 귀와 허리에 대고 있었고, 수사관은 나를 두들겨 팼다”고 말했다. 개머리판으로 이마를 맞아 피가 흘렀다. “손가락 사이마다 볼펜을 끼워 넣고 두 손으로 쥐어뿔고….” 전씨는 “곤봉으로 나의 ‘여성’(성기) 쪽을 막 (때리며) ‘니가 처녀냐?’고 했다”는 말을 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보안대의 협박을 받은 전씨의 가족은 “간첩도 자수하면 살려준다고 하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해버리라”고 했다. “나는 경찰관 가족이고, 간첩이 아니라고 이야기해도 들어주지 않았어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옛 상무대 영창에 밀랍인형들로 당시 상황이 재현돼 있다. 정대하 기자


광산경찰서로 옮겨진 뒤에도 수치심, 공포와 싸우는 시간이었다. “경찰들이 나를 보고 코를 싸쥐는 거예요. 냄새가 나니까. 거기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군 담요를 말고 하루 종일 잤던 것 같아요.” 전씨는 이후 매일같이 하혈을 했다. 결국 인근 병원에서 15일 동안 치료를 받고 국군통합병원으로 이감됐다. 15년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서도 독방에 수감됐다. “하혈을 하고 저녁이면 공포에 떨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1981년 4월 사면돼 출감한 뒤에도 ‘간첩’이라는 시선을 견뎌야 했다.


4월30일 광주시의회에서 보안대 고문사실을 폭로하는 차명숙씨.

4월30일 광주시의회에서 보안대 고문사실을 폭로하는 차명숙씨.


그는 5·18 뒤 한동안 실어증에 걸리기도 했다. “어쩔 때는 땅이 푹 꺼진 것 같고. 꿈을 꾸면 자주 쫓겨가요. (다리 마비 증상으로) 걸음을 5분 이상 걷질 못해요. 밤중에 (나도 모르게 걸어나가) 남의 집 문을 두드린 적도 있어요.” 전씨는 신경정신과 병원에 딱 한번 갔지만 치료는 받지 않았다. (엄마가 정신과 병원에 다니면) 4남매 자녀들의 장래에 해가 될까 두려웠다. 전씨는 “스스로 (항쟁에) 뛰어들었지만 섭섭할 때가 있어요”라고 말했다.


5·18 때 여성들은 가두방송을 하고, 주먹밥을 만들고, 도청 앞 상무관에서 희생된 주검에 염을 하면서 항쟁을 끌어갔다. 광주시의 5·18 민주화운동 보상 집계를 보면, 5·18 유공자로 보상을 신청해 인정받은 5767명 가운데 여성이 300명(5.2%)이다. 5·18 당시 여성 사망 인정자는 2명이고, 다쳐서 상이 후 사망자로 인정된 이는 8명이다. 하지만 5·18 여성들이 당한 성적 수치심 등 수사 과정에서의 잔혹 행위는 아직껏 역사 기록으로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향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꼭 밝혀야 할 대목이다. 5·18 가두방송의 또 다른 주인공 차명숙(59)씨도 최근 광주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보안대에서 고문을 받고 광주교도소에서 징벌방에 갇혀 30일 동안 ‘혁시갑’을 차고 짐승처럼 지냈다”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5·18 부상자 이성순(59)씨는 엠16 납탄 후유증으로 온몸에 작은 반점이 저승꽃처럼 피어 있다. 집 거실에 있다가 총을 맞은 그는 국군통합병원에서 휠체어에 탄 채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이성순씨 제공

5·18 부상자 이성순(59)씨는 엠16 납탄 후유증으로 온몸에 작은 반점이 저승꽃처럼 피어 있다. 집 거실에 있다가 총을 맞은 그는 국군통합병원에서 휠체어에 탄 채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이성순씨 제공


5·18 부상자 이성순(59)씨도 여전히 후유증을 안고 사는 여성이다. 그는 5월21일께 광주시 서구 화정동 아파트 거실에서 조카와 함께 있다가 학생들을 쫓던 공수부대가 쏜 총에 맞고 정신을 잃었다. 가슴에 엠(M)16 총탄을 맞은 그는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돼 10일 만에 깨어났다. 보안대 수사관들은 휠체어를 탄 이씨를 병원 지하실 쪽방으로 끌고 가 취조를 시작했다. “‘누구 지시를 받고 데모했느냐’고 물으며 머리와 어깨 등을 각목으로 마구 때렸어요. ‘나는 폭도’라고 자술서를 쓰라고 했고요.” 지금도 납탄 파편이 무수히 박힌 그의 온몸엔 ‘저승꽃’(검버섯)처럼 얼룩이 남아 있다.


5·18 당시 계엄군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고 알려진 여고생도 있다. 당시 ㄱ여고 학생이던 ㅇ양은 5월19일 광주 근교에 위치한 남평 집까지 걸어오다 군인 5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ㅇ양은 그 후 불안공포증을 보이다가 혼자 웃거나 중얼거리거나 사람들에게 욕설을 해댔다. 그는 1987년 3월 한때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 여전히 조현병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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