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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운명 가른 도보다리 위 40분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은 4·27 남북 정상회담의 백미로 꼽힌다. 두 정상은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문 대통령이 자신의 대북 경협 구상인 ‘한반도 신경제지도’ 관련 자료가 담긴 USB를 김정은 위원장에게 건네줬다는 사실도 눈에 띈다.

남문희 기자 bulgot@sisain.co.kr 2018년 05월 14일 월요일 제556호


남북 정상의 판문점 도보다리 ‘밀담’은 한반도 운명을 가른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두 정상이 도보다리 벤치에서 약 40분간 ‘독대’한 데 이어 평화의 집 접견실에서 10~15분 2차 독대를 이어갔다고 했다. 50분 넘는 둘만의 대화야말로 4·27 남북 정상회담의 백미였다.


두 정상은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주로 묻고 문재인 대통령이 답하는 식의 대화였다고 청와대 측은 설명했다. 더 이상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문 대통령이 자신의 대북 경협 구상인 ‘한반도 신경제지도’ 관련 자료가 담긴 이동식 저장 매체(USB)를 김 위원장에게 건네줬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청와대 관계자는 “정상회담의 직접 논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잘되어 본격적으로 교류와 경제협력의 물꼬가 트이면 이러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전달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4월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동 식수를 마친 후 군사분계선 표식물이 있는 ‘도보다리’까지 산책을 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한국 공동사진기자단


도보다리 밀담의 반향은 컸다. 남북 정상회담 다음 날 4월28일 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장시간 통화한 뒤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판문점이 급부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거푸 트위터나 기자들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판문점 평화의 집과 자유의 집을 유력 장소로 띄우기 시작한 것이다. 5월1일자 CNN 방송에 따르면 남북 정상회담 때부터 판문점을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설득한 이가 문 대통령이다. 순서상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 설득에 성공한 뒤, 이를 발판으로 트럼프 대통령까지 설득에 나선 것이다. 문 대통령의 지론인 남·북·미 연쇄 회담 개최와 3자 간 종전 선언을 위해 판문점만 한 장소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남북 정상회담 전후 갑자기 다급해진 중국의 움직임까지 해석해야 도보다리 밀담의 실체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4월25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북·미 정상회담 전에 북한을 방문하길 희망했지만 북측이 거절했다고 보도했다. <아사히 신문>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 지명자가 방북했을 때 김정은 위원장이 주한 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은 데 대해 중국이 불만을 표시했다”라는 취지로 보도했다. 즉 폼페이오 방북 때 북한이 주한 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자, 중국이 북·미 정상회담 전에 시진핑 방북을 통해 이 문제를 분명히 하려 했으나 방북을 거절당했다는 얘기다.


4월27일 발표된 남북 정상의 판문점 선언에서는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의 주체로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이 동시에 거론됐다. ‘남과 북은 정전협정 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판문점 선언 3조 3항).’ 중국이 종전 선언뿐 아니라 평화협정에서도 제외될 수 있다는 점이 공개적으로 천명된 것이다. 정부 움직임에 밝은 한 전문가는 “종전 선언은 말할 것도 없고 평화협정에서도 중국을 뺄 수 있다는 게 현재 정부 분위기이다”라고 말했다.


판문점 선언 이후 중국이 받은 충격이 꽤 컸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 이후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아베 일본 총리,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했지만, 시진핑 주석과는 통화를 하지 못했다. 시진핑 주석이 문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미루는 사이 왕이 외교부장이 5월2일 북한을 찾았다. 중국 외교부장의 방북은 11년 만이다. 리용호 외무상의 초청 형식이지만 시진핑 주석 방북을 거절했던 북한이 먼저 초청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중국이 ‘차이나 패싱’ 쇼크에 북한을 집중 공략하는 모양새지만 미국과 정상회담을 앞둔 북한이 녹록하게 응할 것 같지는 않다.


4월3일 경북 포항에서 이루어진 한·미 연합훈련 모습.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비핵화와 한·미 연합훈련을 수용했다. ⓒ연합뉴스


중국을 뺀 남·북·미 3자 종전 선언, 종전 선언 이후 주한 미군 문제, 그리고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건넨 한반도 신경제지도. 맥락이 닿지 않는 3개 장면이 동시에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서로 무관하지 않다. 한반도의 운명을 둘러싼 수 싸움이 물밑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3개 장면의 의미를 해석해보자.


거대한 소용돌이의 시작은 극적이었다. 지난 3월5일 대북 특사단 방문 때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와 한·미 연합훈련을 수용했다. 이것이 출발점이었다. 특사단 방북의 성과를 청와대는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여론도 우호적이었다. 중국에는 충격이었다. 당시 중국이 받은 충격을 심각하게 여긴 국내 전문가는 많지 않았다. 북·중 관계에 밝은 한 고위급 탈북자는 “김정은 위원장이 한국 특사단에게 한·미 연합훈련을 이해한다고 말한 데 대해 중국이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한·미 연합훈련에 대해 중국은 ‘쌍궤 병행’이라며 북한의 핵 동결과 동시에 중단할 것을 주장해왔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것처럼 포장을 단단히 해왔다. 북한이 스스로 비핵화를 선언하고 평시 수준의 한·미 연합훈련을 수용하겠다고 하자, 중국으로서는 더 이상 이런 포장이 어려워졌다. ‘쌍궤’에서 한·미 연합훈련만 남고 북핵이 빠져버린 것이다. 한·미 연합훈련은 북한뿐 아니라 중국도 신경 써온 사안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미 연합훈련 용인이 주한 미군 주둔 허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중국은 북핵 문제가 풀리면 어느 시점에 주한 미군도 한반도에서 떠나리라 예상했다. 그 이후 중화 체제 복원이라는 장밋빛 꿈을 꾸어왔는데, 한·미 연합훈련에 대한 북한의 태도 변화라는 복병을 만난 셈이다.


트럼프 정부뿐 아니라 역대 미국 정부의 대북 정책 목표는 비핵화였다. 하지만 그동안 미국 주류 사회는 비핵화가 실제로 가능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에게 핵은 생명과도 같기에 절대 포기할 리 없다고 본 것이다. 북한과 전쟁을 벌인다면 모를까, 강제할 방법이 미국으로서는 딱히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중국의 대북 정책을 미국의 그것과 일치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거부할 수 없는 인센티브를 주고,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의 핵 동결을 유지하게 하거나 비핵화를 강제토록 하는 것이다. 중국이 거부할 수 없는 인센티브가 바로 주한 미군 카드였다. 즉, 주한 미군의 감축이나 철수를 담보로 중국을 통한 북한 핵 동결 내지 비핵화를 유도하자는 게 그동안 미국 주류 사회의 암묵적 합의였다. 2016년 9월 미국외교협회(CFR) 보고서가 바로 그 효시였다면, 현실주의 세력의 대표 격인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이 주장한 이른바 ‘로버트 게이츠 플랜’은 가장 포괄적이고도 구체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로버트 게이츠 플랜’과 ‘헨리 키신저 방안’ 


지난해 8월 미국 스탠퍼드 대학 후버 연구소 소속 폴 R. 그레고리 연구원이 발표한 <한국에서의 그랜드 바겐(A Grand Bargain on Korea)>이라는 논문에서 ‘로버트 게이츠 플랜’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국이 중국에 북한을 승인하는 평화조약 안을 전달하고 ‘레짐 체인지’를 포기하는 동시에 주한 미군의 구조 변경을 승인하는 조약을 체결한다. 대신 중국은 국제사회의 감시자들과 함께 북한 핵 동결의 엄격한 이행을 담보한다. 김정은은 핵을 일부 보유하되 한반도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지 않고 두 개의 국가로 남는다는 것을 보증한다. 주는 것은 많고 얻는 것은 적은 것처럼 보이나 게이츠의 계획은 지속적인 안정감의 기초를 줄 수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3월25일부터 방중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을 했다. 위는 3월 열린 ‘김정은 위원장 환영 만찬’. ⓒAFP PHOTO


로버트 게이츠 플랜에 비해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주한 미군 카드를 활용한 이른바 ‘디커플링(decoupling:분리)’ 방안은 좀 더 과격하다. 키신저는 지난해 8월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북한 위기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라는 글에서 ‘미·중의 빅딜(대타협)’을 제안한 바 있다. 그가 렉스 틸러슨 장관에게 했다는 디커플링 조언의 요지는 ‘미국 본토에 대한 북한의 ICBM 핵 위협을 막기 위해, 중국과 빅딜을 통해 북한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대신 북한이라는 완충지대의 상실을 우려하는 중국에게는 주한 미군 철수를 약속해주자’는 것이다. 지난해 워싱턴 정가에 키신저의 과격한 방안이 급속히 퍼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핵으로 경제를 일으킬 게 아니라면 그 상태로는 버틸 수 없다. 핵을 포기하는 대신 그 보상으로 경제협력 협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대상이 중국일까? 과거 김정일 위원장 시절 중국은 경제협력의 대가로 북한에 조차지를 요구하는 행태를 일관되게 보여왔다. 대표적인 게 신의주 특구이다. 북·중 관계가 험악해진 이유가 바로 신의주 특구를 둘러싼 조차 논쟁 때문인데, 중국 외에는 자금을 끌어올 곳이 없었던 당시 북한 처지에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트럼프 정부가 전쟁을 불사할 정도의 결기를 보이며 상황을 여기까지 진척시킨 능력은 인정한다. 협상 국면에 접어들었는데 북한이 말로만 비핵화를 약속하고 실제로는 비협조적일 경우 특별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게 그동안 미국 내 전문가들의 우려였다. 트럼프 정부도 겉으로는 비핵화를 요구하지만 뉴욕 채널을 통해 북·미 연락사무소를 추진하는 등 장기전 태세를 준비했다. 즉 핵 동결 수준에서 일단 타결하고 비핵화는 연락사무소의 평양 진출 이후 장기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비핵화가 장기 과제로 넘어가면 결국 중국이 북한과의 관계에서 경협을 하든 압박을 하든 이는 북·중 간에 해결할 문제로 남는다. 이 경우 미국으로서는 중국에 줄 인센티브, 주한 미군을 감축하거나 철수시키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게 된다. 결국 로버츠 게이츠 플랜으로 귀결할 가능성이 높았던 셈이다.


로버트 게이츠 플랜대로라면 주한 미군이 철수한 채, 우리는 핵을 가진 북한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한다. 북한의 핵 동결을 국제적으로 관리하는 권한과 책임을 중국이 갖게 되어 중국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것이 자명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중 관계는 과거 중화 체제의 사대 관계로 급속히 재편될 수도 있다.


그런데 김정은 위원장이 절대 하지 않을 것 같던 비핵화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더구나 한·미 연합훈련을 수용하고 더 나아가 주한 미군 주둔도 허용할 태세다. 비핵화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한 가설이 무너졌다. 결국 ‘김정은의 결단’은 로버트 게이츠 플랜도 무력화시켰다. 이로써 남과 북 모두 자칫하면 중화 체제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뻔한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앞의 고위급 탈북자의 지적대로 중국이 얼마나 급했으면 지난 7년간의 불화도 잊은 채 부랴부랴 김정은 위원장을 초청해 국빈 이상의 극진한 대접을 했을까? 중국은 ‘전략적 선택’ 등 용어를 구사하며 북한에 한·미 연합훈련 반대 및 주한 미군 철수 입장을 계속 견지해줄 것을 요구 내지 압박했을 것이다.


2월9일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김여정·김영남(오른쪽 두 번째부터) 등 북한 고위 지도부가 참석했다. ⓒ시사IN 조남진


물론 그 반대급부도 있다. 4월17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이 시진핑 주석에게 대규모 경협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경협 내용은 “에너지 지원과 이전에 계획된 적이 있는 북·중 국경 지대에서의 경제특구 구상 등의 조치가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전했다. ‘신의주 조차 개발 계획’이 다시 등장했을 수 있다. 2004년 8월20일 북한 내각이 신의주 특구를 중단한 이유는 200억~300억 달러의 인프라 비용을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중국이 그 정도는 투자하겠다고 나섰을 수 있다. 중국의 신의주 특구 개발 계획은 경의선 철도·도로를 타고 평양까지 영향권에 끌어넣으려는 북한 예속화 전략의 일환이다.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에게 당하는 모습을 본 김정은 위원장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중국과의 대규모 경협 뉴스는 미국과의 협상을 위한 레버리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 협상이 지난 3월31일~4월1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지명자의 방북 때 어느 정도 이뤄졌다. 폼페이오 방북에 대해 일부에서 서훈 국정원장과 김영철 통전부장 라인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더 정확하게는 서훈·폼페이오·김영철 세 사람이 평창 동계올림픽 초기부터 삼각 편대를 이뤄 같이 움직였다. 맹경일 북한 통전부 부부장이 지난 2월9일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가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지원 명목으로 방남한 그는 워커힐호텔에 숙소를 마련하고 국정원 김상균 차장 및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앤드루 김 코리아임무센터 센터장과 한 팀을 이뤘다. 앤드루 김 센터장은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5촌 관계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남북한과 미국 정보기관의 공조는 서훈-폼페이오-김영철의 사령탑을 거쳐 각국 정상에 직보되면서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에 해빙의 드라마를 써왔다.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특사단의 보고를 받고 45분 만에 북·미 정상회담을 결정한 게 아니라 사실은 45일 만에 결정한 것’이라는 얘기가 돌기도 한다.


우리 대북 특사단이 1차로 방북해 비핵화와 한·미 연합훈련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입장을 타진했다면, 폼페이오 방북은 양측의 요구 사항을 구체적으로 조율하는 과정이었다. 폼페이오가 북한을 다녀온 후 열린 4월12일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한 발언을 세밀히 분석해보면, 북한과 미국 양측이 어떤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에 대해서는 기존 핵무기에 대한 검증과 사찰까지 받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미국이 요구해온 ‘완전하고도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북핵 폐기(CVID)’ 요건을 충족시켜준 셈이다. 폼페이오 인준 청문회 발언 중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중요한 얘기도 나왔다. 바로 경제 보상에 대한 대목이다. 그는 청문회에서 “‘보상’을 주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영구적이고 불가역적인 결과를 얻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방북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으나, 방북 사실이 알려진 뒤 북한에 대한 경제 보상 가능성을 거론한 발언으로 평가받는다. 4월13일자 일본 <도쿄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 3월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확실한 체제 보장과 전면적인 보상을 한다면 핵을 포기할 수 있다. 적대 정책이 중단되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체제 보장과 더불어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 USB를 건넨 것이 ‘신의 한 수’인 까닭 


3월31일~4월1일 방북한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 지명자(왼쪽)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악수를 하고 있다. ⓒ백악관 제공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은 ‘가난한 핵보유국보다 핵 없는 신흥 개발도상국으로 살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4월20일 당 전원회의에서 5년간 끌어온 핵·경제 병진전략을 결속(하던 일에 결말을 가져오는 것)하고, 경제 건설에 집중하는 새로운 전략 노선을 채택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결단은 폼페이오와의 대화 이후 나왔다는 점에서 미국이 경제 보상을 해주리라는 믿음이 섰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5월3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은 미국 중앙정보국(CIA) 당국자와 핵 전문가 3명이 4월 하순부터 일주일간 방북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이 북한과 협의를 한 결과 북한이 12개로 추산되는 핵무기 사찰을 포함해 미국이 요구하는 비핵화 방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면 양측이 합의문에 쓸 수 있을 정도의 합의를 이미 도출한 것이다. 다만 보상에 대해서는 체제 보장, 국교 정상화, 경제제재 해제 등과 더불어 비핵화를 진행하면서 대가를 받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다고 <아사히 신문>은 전했다.


핵·경제 병진전략까지 내려놓고 경제 집중 노선을 인민들에게 천명한 김 위원장으로서는 북한 개발에 대한 청사진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직접 자금을 지원하기보다는 제재를 해제해주고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국제통화기금(IMF) 회원 자격의 문턱을 낮춰 세계은행(IBRD)과 아시아개발은행(ADB) 차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방식을 선호한다. 베트남의 사례에서 보듯 해외 직접 투자 유치가 가능하도록 미국 시장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보장하는 방법도 있다. 결국 테이크 오프(take off:한 나라의 경제가 비약적인 공업화 사회로 진행되는 단계)를 위한 청사진은 미국이 아닌 누군가 대신 제시하고 앞에서 끌어줘야 한다. 그 역할을 해줄 곳이 바로 한국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이 구상한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을 건넨 것은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을 굳히기 위한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이 건넨 한반도 신경제지도 USB와 김 위원장의 결단으로 남과 북은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새로운 미래는 남과 북과 미국이 서로에 대한 적대 정책을 내려놓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바로 종전 선언이다. 2007년 10·4 선언 당시 이 개념을 창안했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조성렬 박사에 따르면, 종전 선언은 정전협정의 법적 전환하고는 관계없는 개념이다. 그보다는 현재 한반도 내에 무력을 유지하며 서로를 적대시해온 남북한과 미국이 적대 정책을 종식시키자는 ‘정치적인 선언’이다. 중국이 여기에 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중국은 남북한과 미국 사이에 종전 선언이 이뤄지면 한반도에서 주한 미군의 지위를 흔들 마지막 기회가 사라진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는지 모른다. 남과 북 사이에 혈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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