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950088.html


원전안전 연구 상당수가 중복…“‘핵 마피아’가 연구까지 왜곡”

등록 :2020-06-19 09:44 수정 :2020-06-19 10:56


정부, 9천억 규모 가동원전 안전 R&D

계획 초안에 중복연구 다수 포함

“원자력공학 중심 핵마피아가 문제

‘연구비 나눠먹기’에 안전까지 위협”


전남 영광의 한빛원전 전경. 전라남도는 한빛원전의 잇따른 고장으로 주민 우려가 높아지자 환경방사선 이상을 조기에 탐지하는 고정형 감시기를 국가감시망과 별도로 세워 1분 단위로 생활방사선을 체크해 누리집(radsafe.jeonnam.go.kr)에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남 영광의 한빛원전 전경. 전라남도는 한빛원전의 잇따른 고장으로 주민 우려가 높아지자 환경방사선 이상을 조기에 탐지하는 고정형 감시기를 국가감시망과 별도로 세워 1분 단위로 생활방사선을 체크해 누리집(radsafe.jeonnam.go.kr)에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2022년부터 8년간 9천억원이 넘는 연구비를 투입해 가동 원전의 안전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수립 중인 연구개발사업 계획 초안에 다른 연구와 중복되거나 활용 가능성이 의심되는 연구 과제까지 다수 포함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인다. 예산 낭비를 막으려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쳐 진행되는 국가 연구개발사업에서 우선하여 걸러져야 할 중복연구까지 포함된 것은 선정 과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파문이 일 전망이다.


이 연구개발 사업의 연구 과제를 선정한 예타 기획위원회에는 학계와 연구기관, 산업계의 원자력 전문가는 물론 정부 관계자도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를 두고 원자력계 한편에서는 원자력공학 전공 특정 교수를 중심으로 한 학맥에 뿌리를 둔 이른바 ‘원자력 마피아’가 안전을 위한 연구개발까지 왜곡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18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공동 ‘가동 원전 안전성 향상 핵심기술개발 사업’의 예타 기획위는 지난 4월 공청회에 맞춰 공개한 30여개 연구 세부 과제에 대해 예정했던 5월 예타 신청을 미루고 재검토 작업에 들어갔다. 원자력 실무전문가 단체인 ‘원자력안전과미래’가 기획위 총괄위원회 간사 기관인 한국연구재단과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 원장에게 공문을 보내 연구주제 선정 문제를 이슈화할 계획을 밝힌 직후다.


강보선 연구재단 원자력단장은 4월 말 이 단체 이정윤 대표에게 메일을 보내 “메일 주신 건을 포함하여 안전연구 세부 주제에 대해 회의를 2차례 하였으나 충분히 검토하는데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예정했던 5월 예타 접수를 하지 않기로 했다”며 “추후 더 보완하고 보완이 완료되는 대로 일정을 다시 정하기로 했다”고 알렸다. 원자력안전과미래가 30여개의 세부 과제를 검토한 의견서를 보내며 타당성을 따져 보는 공개 토론회 개최를 요구한 데 대한 답변이었다.


이 단체는 검토 의견서에서 △원전 안전 강화를 위한 지능형 디지털플랜트 개발 △지능형 가상원전 최적화 기술 및 지식관리 통합 시스템 개발 △면진·제진 혁신구조 기반 내진성능 향상 기술 개발 △격납건물 내 극한현상 계측기술 개발 △노외 노심용융물 냉각 및 방사성물질 방출 저감을 위한 신 희생물질 개발 등 상당수 세부 과제가 이미 진행 중인 과제와 중복되거나, 현실성·산업화 가능성·기술적 타당성 등이 부족하거나, 가동 중인 원전 구조물에는 적용할 수 없는 등의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전문가들도 비슷한 평가를 했다. 한 현직 원자력 전문가는 “중대사고를 완화하기 위한 혁신기술로 제안된 신 희생물질 개발이나 면진·제진 기술은 원전을 새로 지을 때라면 몰라도 이미 가동 중인 원전에는 적용하기 어렵고,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고장과 사고를 진단·예측하겠다는 과제들은 인공지능에게 학습을 시킬 만큼의 원전 사고 빅데이터가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개념부터 틀렸다”고 지적했다. 관련 연구개발 분야에서 일했던 또 다른 전문가는 “지능형 안전진단 기술, 가상 플랜트 기반 기술 등에 중점을 둔 과제들은 원전의 특성을 고려하면 무의미한 ‘연구를 위한 연구’일 수 있고, 중대사고 대응을 위한 방사성물질 거동평가 기술이나 중대사고 완화 혁신기술에 중점을 둔 연구들은 숱하게 해온 과제다. 필요한 과제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최종 수요자 입장에서 별 도움이 안 될 과제들이 많다”고 짚었다.


지난해 8월 탈핵시민행동 활동가들이 서울 종로구 현대건설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격납건물서 다수의 구멍이 발견된 한빛 3·4호기 폐쇄와 시공사인 현대건설의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8월 탈핵시민행동 활동가들이 서울 종로구 현대건설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격납건물서 다수의 구멍이 발견된 한빛 3·4호기 폐쇄와 시공사인 현대건설의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획위는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연구 세부과제 재검토 과정에서 △격납건물 내 극한현상 계측기술 개발 △노외 노심용융물 냉각 및 방사성 물질 방출 저감을 위한 신 희생물질 개발 △다중재난 진행정보 기반 원전 사고저항성 확보 기술 등 6~7개 과제를 우선 빼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기획위 사정을 잘 아는 한 전문가는 “현장 적용성이 떨어지거나 중복성이 있는 것 위주로 빼는 것으로 안다”며 “다른 분야는 보지 않고 자기 연구 주제만 밀어 넣으려는 사람들 목소리가 크다 보니 이런 주제들이 포함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이에 대해 “연구 심사를 하는 사람이 자기 과제를 집어넣는 것도 말릴 수 없는 것이 원자력학계다. 과제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기획도 하고 평가도 하는,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든 잘못된 관행을 빨리 깨야 한다”고 말했다.


기획위가 빼기로 의견을 모은 6~7개 과제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나머지 과제들 대부분도 기획위에 참가하지 않은 다수의 원자력 전문가들이 불필요하다고 지적하는 것들이다. 한 현직 원자력 전문가는 “거의 모든 세부 과제들이 가동 원전에 적용되기 어려운 연구, 개념부터 틀려 현실성이 없는 연구, 수 십년 동안 해 온 연구를 되풀이 하는 연구, 실패할 것이 명확한 연구 등의 4가지 범주 중 한 가지에는 해당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기획위에서도 최근까지 세부 과제를 32개로 다시 정리했으나, 이 가운데도 한수원이 이미 진행하고 있거나 자체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적절한 과제,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연구주제 등 불필요한 것들이 다수 있다는 의견이 나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수원은 중앙연구원을 두고 해마다 4천억원의 가량의 연구개발 예산을 사용하며 필요한 안전 관련 연구를 자체적으로 수행하고 있고, 원안위도 자체적으로 규제 관련 연구를 집행하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적합하지 않은 연구주제들을 선정해 공청회까지 열게 한 기획위원들과 이것을 재검토하고 있는 기획위원들이 같다는 점이다. 총괄위원회와 예측·예방·대응 등 3개 분과로 구성된 기획위원회에는 개발될 기술의 수요처인 한수원 관계자까지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도 문제가 많은 연구주제들이 전혀 걸러지지 않은 것은 기획위원회 의사 결정 과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정윤 원자력안전과미래 대표는 “정부와 연구기관, 산업계까지 원자력공학 전공 특정교수 학맥으로 연결된 이른바 ‘원자력 마피아’가 원자력계의 의사 결정을 주도하는 것이 문제의 뿌리”라며 “이들이 핵공학과를 위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연구를 하며 사실상 연구비 나눠 먹기를 하는 것이 원전 안전까지 위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업 주무부처인 과기부나 기획위 간사 기관인 한국연구재단은 외부 단체의 이의 제기 때문에 예타 추진 일정을 늦췄다는 해석에 대해 극구 부인했다. 강보선 연구재단 원자력단장은 “그 부분은 부처에서 주관하는 부분으로, 부처 내의 업무 진행 계획에 따라서 결정한 것이다. 보완 작업은 예타가 늦춰지면서 시간이 더 주어져 완성도를 높이려 한 것일 뿐 내용에 문제가 있어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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