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6160600065


“동·서독 통일되던 날, 부러워 울던 남편…남북회담 감개무량”

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박주연 경향신문 기자 jypark@kyunghyang.com 입력 : 2018.06.16 06:00:06 수정 : 2018.06.16 08:37:11 


ㆍ고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씨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씨가 12일 경남 통영 자택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윤이상 선생은 세계적 작곡가로 명성을 떨쳤지만 이념논란으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다 사후 23년 만인 지난 2월 말에야 고향 땅 통영에 안장됐다. 이상훈 선임기자


“남편은 평생 나에게 큰 바위이자 스승…잃고 나니 마치 허허벌판에 서 있는 듯

독일 윤이상 묘, 김정숙 여사 참배 후 이장 현실화…통영에 묻힐 줄 알았다면, 돌아가시기 전에 말해줄 걸 그랬어요”


“그야말로 눈물이 나도록 감개가 무량하지요. 정말 고맙고 기쁩니다. 동서독이 통일되던 날, 독일인들이 밤새도록 축배를 돌리고 좋아할 때 베를린에 살고 있던 저와 남편은 그들이 너무 부러워서 눈물을 쏟았습니다.”


사상 처음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지난 12일, 경남 통영의 자택에서 만난 작곡가 윤이상 선생(1917~1995)의 부인 이수자씨(91)는 밝은 표정으로 이같이 말했다. 지난 4월27일과 5월26일 두 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과 이번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소회를 묻자 돌아온 답이었다. 목소리에는 평생을 예술적 성취뿐 아니라 분단된 조국의 화합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남편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도 배어 있었다.


올해는 그에게 기쁜 일이 잇따라 일어났다. 무엇보다 남편 윤이상 선생이 고향을 떠난 지 49년, 세상을 떠난 지 23년 만인 지난 2월25일 마침내 고향 땅 통영으로 돌아와 3월20일 안장됐다. 윤 선생은 ‘한국이 낳은 최고의 작곡가’ ‘현대음악의 거장’으로 불리며 세계 음악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지만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이념논쟁에 휩싸여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선생의 유해는 현재 도남동 통영국제음악당 뒤편,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묘역에 안장돼 있다. 2010년 통영에 정착한 부인 이수자씨와 장녀 윤정씨(67)의 자택과 차로 30분 거리다. 이씨는 “이제는 남편이 가까이에 있어 보고 싶을 때마다 찾아가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고령임에도 꽤 건강해 보였다. 자택에는 ‘윤남이’ ‘윤순이’라는 이름을 붙인 몰티즈 두 마리도 함께 살고 있었다.


- 건강이 좋아보이십니다.


“저는 원래 건강해서 (폐결핵과 심장병을 앓던) 우리 윤 선생님도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어요. 제가 건강하지 않았다면 병자인 남편과 결혼하지 못했을 겁니다. 남편은 늘 제게 그랬죠. ‘당신은 나에게 건강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라고.”


- 사후 23년간 독일 베를린 인근 스판다우의 가토 공원묘지에 묻혀있던 윤 선생의 유해가 이제 고향 땅 통영에 안장됐어요. 마음이 놓이시겠어요.


“그럼요. 이제 정말 마음이 놓여요. 행복해요. 남편의 묘가 베를린에 있을 때는 자주 찾아가보지 못해 늘 마음이 아팠거든요. 현 정부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 자주 남편을 만나러 가십니까.


“보고 싶을 때마다 가죠. 딸과 함께 밤하늘 달이 좋아도 가고, 음악회가 열릴 때도 꼭 가고요.”


- 남편을 만나러 가면 주로 어떤 말씀을 하세요.


“당신이 원하던 곳에 왔으니 당신 기쁘냐고, 또 잘 있느냐고 묻죠. 남편은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파도소리가 들리는 통영의 언덕에 묻히길 원했습니다. 독일에서도 잠이 안 오면 통영 앞바다를 찍은 사진을 머리맡에 두고 잠을 청했을 정도였죠.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돌아가시기 전에 ‘지금은 아니어도 시대가 달라지면 고향 통영에 당신을 모시겠다’고 말해줄 걸 그랬다고 후회해요. 남편이 정말 기뻐했을 텐데….”


- 이장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아요.


“가토 공원묘지에 모실 때 베를린시는 훗날 유해를 이장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았어요. 하지만 홀로 타국 묘지에 남겨진 남편에게 항상 미안하고 슬펐죠. 지난해부터 통영시와 정부가 나서주면서 베를린시에서도 이장을 허락해줬습니다. 특히 작년 7월 독일을 방문한 김정숙 여사가 남편의 묘소에 참배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 김정숙 여사와 지난해 7월 이전이나 이후, 직접 만나거나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다만 작년 김정숙 여사의 독일 방문 전, 청와대에서 연락이 와서 ‘영부인께서 윤 선생님의 묘지에 동백나무를 심으시려고 하는데 동의하느냐’고 물었지요. 그때만 해도 실감이 안 났는데, 방송에서 영부인이 참배하고 통영에서 가져간 동백나무를 심는 장면을 보고 너무 기뻤어요. 동백나무는 통영의 상징인 데다 겨울에 꽃을 피우는 나무입니다. 그 의미가 남다르죠.”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지난해 7월 독일을 방문한 김정숙 여사가 5일 오후(현지시간) 베를린 가토우 공원묘지에 있는 고 윤이상 선생의 묘소에 참배한 후 통영에서 가져와 심은 동백나무를 보고 있다. 서성일 기자 centing2kyunghyang.com


윤이상 선생은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이후 통영에서 자랐다. 그가 살던 통영 집은 돌담 아래가 바로 바다였다. 밤이면 파도소리가 들려오고 아침이면 멸치떼가 모래사장까지 밀려와서 은빛으로 퍼덕이는 곳이었다. 소년은 바닷가에 혼자 나가 별을 보고, 먼 바다로 고기잡이 나간 어부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성장했다. 14세 때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음악학교에서 음악이론과 첼로를 배웠다.


부인 이수자씨와 처음 만난 것은 1948년 9월 부산사범학교에서다. 이화여전(현 이화여대)을 졸업한 이씨는 이 학교 국어교사, 윤 선생은 음악교사였다. 윤 선생은 당시 폐결핵 3기였다. 치유가 어려운 폐병도, 이씨 가족의 반대도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지 못했다. 1950년 1월30일 화촉을 밝혔다. 6·25전쟁의 혼돈 속에서 딸 정씨를, 3년 후 서울 성북동으로 이사한 후 아들 우경씨(64)를 낳았다. 상경 후 윤 선생은 경희대, 숙명여대, 덕성여대 등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 당시 폐결핵 3기면, 치료 가능성도 희박했을 텐데 어떻게 결혼을 결심하셨습니까.


“그때만 해도 죽는 병이었죠. 처음엔 결혼할 자신이 없어 그만 만나자고 했어요. 남편은 몹시 슬퍼했죠.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저는 결국 자책과 슬픔 끝에 마음을 바꿨습니다. 삼시세끼 정성들인 식사에 영양을 충분히 공급한다면 폐병도 나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죠. 평생 남편의 건강을 신경 썼습니다.”


윤 선생은 마흔살이 되던 1956년 서양의 음악이론과 현대음악을 배우기 위해 홀로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 뒤 이듬해 독일로 건너가 서베를린음대에서 보리스 블라허를 사사했다. 졸업과 동시에 독일 다름슈타트현대음악제에서 쇤베르크의 12음계 기법에 한국의 정악 색채를 담은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해 호평을 받았다. 이후 1966년 독일 도나우에싱겐 현대음악제에서 대편성관현악곡 ‘예약’을 발표해 세계적인 작곡가로 주목받았다.


윤이상 선생 부부와 정·우경 남매. 이수자씨 제공


그러나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으로 큰 고초를 겪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유럽에서 유학한 지식인과 예술가 194명이 관련된 ‘건국 이후 최대 간첩사건’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윤 선생 내외는 독일에서 차례로 한국으로 불법 연행됐다. 윤 선생은 모진 고문을 받고 최종심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서독 정부와 국제적 구명운동으로 2년 만에 독일의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씨는 남편에 앞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 당시 중앙정보부가 윤 선생 내외를 동백림사건으로 엮은 것은 1963년 두 분의 평양 방문이 빌미였어요.


“제가 1961년 독일로 건너가 5년 만에 남편과 합친 후 남편은 북에 있는 친구 최상한씨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어요. 동베를린에 사는 여학생을 통해 친구를 수소문했죠. 1963년 최상한씨의 친구뻘 되는 대학교수가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을 통해 친구도 만날 겸 평양에 한번 다녀가라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남편은 죽은 줄 알았던 친구를 만나고 자신이 늘 벽에 붙이고 보던 강서고분의 ‘사신도’를 직접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저를 데리고 간 겁니다.”


- 서울 송환 후 모진 고문이 이어지면서 윤 선생은 자살 기도까지 하신 것으로 알아요. 조국에 대한 원망이 크셨을 것 같아요.


“그때 생각을 하면 고통스럽고 눈물이 나지만, 남편의 정신 깊숙이 들어있는 애국심은 변함이 없었어요. 남편은 제게 ‘가을이면 낙엽이 져도 민족은 푸른 하늘처럼 영원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죠. 잘못을 범하는 정치인과 그 행위는 영원할 수 없지만 민족은 영원하다는 뜻이었습니다.”


-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동백림사건을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6·8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무력화하기 위해 과대포장한 사건으로 규정했어요. 정부 차원의 사과도 권고했고요. 사과를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다. 그래도 다른 정부와 달리 2007년 노무현 대통령께서 저를 한국에 초대해주셨잖아요. 거기에 사과의 의미가 담겼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은 제 남편을 빨갱이라거나 간첩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위)1967년 11월 서독에 거주하고 있던 작곡가 윤이상 선생이 동백림 사건으로 법정에서 답변을 하고 있다. 독일에서 불법 연행돼 서울로 이송된 윤 선생은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5년형, 최종심에서 징역 10년형을 받고 복역하다 서독 정부와 국제사회의 구명운동 덕에 2년 만에 석방돼 독일의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아래)독일 베를린 자택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윤이상 선생과 이수자씨 부부. 이수자씨 제공


동백림사건 후 윤 선생 가족은 독일로 귀화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개회식에서 초연된 오페라 ‘심청’,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히’, 핵전쟁의 위협에 대한 경고와 세계 평화를 호소하는 교향곡 연작 등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윤이상이라는 이름은 금기어였다. 반면 북한은 그의 음악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고 예우했다. 그는 수차례 북한을 방문하며 음악활동을 했다. 아울러 김대중 납치사건 등 군사독재 정권의 만행을 유럽과 전 세계에 고발하고 남과 북의 화합에 앞장섰다. 한국민주민족통일해외연합(한민련) 유럽본부 의장,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해외본부 의장을 맡았다. 한국 사회의 보수·공안세력 눈에 그런 그가 고울 리 없었다. 끈질기게 그에게 ‘간첩’ 딱지를 끌어다 붙이는 이유였다. 1992년 봄에 터진 ‘오길남 사건’(또는 신숙자 사건)이 대표적이다. 재독 경제학자 오길남씨(76)와 재독 간호사 신숙자씨(1942년생·사망 추정) 가족의 월북을 윤 선생이 권유했다고 1986년 혼자 탈북한 오씨의 주장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 1992년 당시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했죠. 직후 윤이상 선생은 한국 언론에 오씨의 주장이 거짓임을 밝히는 글을 보내기도 했는데요.


“남편은 오길남씨를 1977년 한민련 국제회의 때 먼 발치에서 한 번 봤을 뿐이고 그 부인은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1986년 갑자기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와 이북에서 6개월 전 혼자 도망나왔으니 가족이 독일로 귀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어요. 남편은 그들의 독일 귀환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안됐지요. 1990년 민족통일음악제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미흡하게나마 그의 가족사진과 카세트 녹음을 간신이 얻어 이듬해 1월 오씨에게 전달했어요. 그런데 그는 통곡은커녕 가족 찾는 것을 단념했다고 말했습니다.”


- 2011년 6월엔 신숙자 모녀 구출운동이 불붙으면서 다시금 논란이 이는 등 보수단체에서는 수시로 이 사건을 윤 선생과 연관지어 소환하고 있어요.


“남편은 평생 예술과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그렇게 누명을 쓴 것이 항상 불쌍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결국은 역사가 다 정화시켜줄 것이라고 저는 믿어요. 오씨가 1992년 한국으로 재망명할 당시 안기부 조사기록을 보면 진실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 윤 선생은 1990년 서울과 평양에서 차례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제와 서울송년음악회도 기획했는데, 올 4월 초에 남북합동공연이 평양에서 있었어요. 이후 4월27과 5월26일 두 차례 열린 남북정상회담을 보시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습니까.


“아이고 감개가 무량하지요. 그야말로 눈물이 나도록 감개가 무량합니다. (남북정상회담이) 고맙고 좋고, 정말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남북이 빨리 왕래를 할 수 있으면, 통일이 되면 얼마나 좋겠나, 그 생각뿐이죠. 동서독이 통일됐을 때 밤새도록 독일인들이 축배를 돌리고 좋아할 때 베를린에 살던 저와 남편은 우리나라도 이리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러워서 눈물을 쏟았습니다.”


평양에서는 해마다 윤이상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은 1988년 제7차 윤이상음악회. 경향신문 자료사진


- 사상 처음 북·미 정상회담도 열렸는데요.


“이야기가 잘되면 좋겠습니다. 이 지구에서 분단국가는 우리밖에 없잖아요. 우리나라 사람들 머리가 좋은데 (통일을) 왜 못하는지, 지금이라도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본 적은 없으신가요.


“김정일 위원장이 돌아가시고 추모식 때 기념궁전에서 잠깐 만난 게 전부입니다. 악수하고 ‘애도를 표합니다’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북에서는 1982년부터 매해 가을 윤이상음악제가 열린다. 1984년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에 의해 평양에 세워진 윤이상음악연구소는 1990년 기구가 확대되면서 평양의 가장 중심거리에 15층 현대건물로 완공됐다. 연주홀은 물론 산하 관현악단, 음악잡지와 도서출판을 위한 편집 및 출판부서들, 음악연구원들도 있다. 이씨는 “딸이 연구소에 악기와 줄들을 후원하고 있다”고 했다.


- 평양에는 자주 가십니까.


“통영에 정착한 뒤로는 한두번 갔어요. 하지만 제 나이에 앞으로 여행이 힘들 것 같은데 평양 집을 너무 오래 비워두는 게 부담스러워 지난 4월 방문 때 돌려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저희의 의견을 받아줬지요.”


- 생전 김일성 주석이 윤 선생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저택 말씀이죠.


“김일성 주석이 남편에게 선물한 집은 호수가 있는 평양 철봉리 산속에 있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엔 평양의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해서 10년간 베를린과 아들 부부가 살고 있는 미국, 그리고 그 집을 오가며 살았지요. 딸은 평양의 윤이상음악연구소 일로 오가야 하지만 저는 고령이라 힘들 것 같습니다.”


- 베를린 집도 다 정리하셨나요.


“네. 베를린 집에 있던 남편의 자료 상당수는 통영시에 기부했습니다. 남편이 너무도 사랑하는 고향이고, 통영국제음악제도 있고,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도 있고, 기념관도 생겼으니까 다 가져왔죠.”


- 며느님이 북한의 무용수 출신인 것으로 알아요. 결혼 후 부부가 독일로 나왔다가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요.


“며느리는 결혼 후 북의 허락을 받고 독일로 와서 독일 국적을 취득했어요. 지금은 아들 내외 모두 미국 영주권자입니다.”


- 요즘은 남과 북이 모두 윤 선생을 자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내세우고 있어요.


“남편은 음악가일 뿐이고, 이념을 떠나서 남과 북 모두 내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모두 내 민족이니까요.”


이수자씨가 지난 12일 도남동 통영국제음악당 뒤편에 있는 윤이상 선생의 묘를 찾아 묘비를 어루만지고 있다(왼쪽). 자택 마당에서 딸 윤정씨와 함께. 이상훈 선임기자


- 생전 윤 선생이 부인께 보낸 편지를 보면 애정표현에 적극적이시더군요.


“예술가니까요. 외로운 사람이기도 하고요.”


- 평생 서로 많이 사랑하셨습니까.


“그랬죠. 옛날에 성북동 살 때 동네에서 유명했다고 해요. 하도 저녁마다 둘이 산보를 나가니까 동네 아주머니들이 저를 ‘산보댁’으로 부르며 부러워했답니다. 남편은 평생 제게 큰 바위였고 스승이었지요. 그런데 돌아가시고 나니까 허허벌판에 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딸이 아니었다면 벌써 남편을 따라 갔을 겁니다. 남편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훗날 우리가 환생을 하게 되면 그때쯤은 통일이 돼 있을 조국에서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자고 했습니다.”


- 언제 남편이 많이 보고 싶으세요.


“언제랄 것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가면 남편이 거기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론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저도 모르게 ‘당신 거기 있어요?’라고 묻지요. 당신이 좋아하는 고향에 와 있으니까 여기에 있겠지, 싶은 겁니다.”


이씨가 바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비 온 뒤 막 개인 날씨여서인지, 시원한 바람 한 줌이 그의 머리카락과 블라우스 앞자락을 건드리며 지나갔다. 언덕 위에 위치한 모녀의 자택 앞에도 통영 앞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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