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archives/850227.html


‘민간인 사찰자료’ 들고 튄 탈영병을 보호하다

등록 :2018-06-22 14:39 수정 :2018-06-22 14:55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 30장면-6] 

1990년 군 보안사령부 ‘프락치’ 활동했던 윤석양의 양심선언 


탈출은 10월 2일로 잡았다.


‘혁노맹’ 건도 그렇고 추석에다 연휴까지 끼어서 4~5명씩 3박4일로 특박을 나가니까 사병들도 많지 않을 때였다. 이제는 정말 촌각을 다투게 되었다. 갖고 나갈 자료를 정리해야 했다.


1990년 9월 22일 오전 5시 30분. 내 담당구역 청소를 일찍 마치고 “도와주겠다”며 사무실 2층의 분석반으로 뛰어갔다. 병사들이 다른 사무실 청소를 할 때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노무현 의원 것을 찾아야 했다. ‘201~300번’ 대에 있을 거라 기억을 되살려서 찾고 있는데 ‘어렵쇼’, 김대중·김영삼·노무현 등등이 다 나오는 거였다. 이번에는 캐비넷을 열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노란 종이가 빽빽이 차 있는, 3면을 종이로 각을 잡고 붙여만든 통이 있었다. 두꺼운 노란 종이의 꼭대기에는 ‘ㄱ, ㄴ, ㄷ, ㄹ, …, ㅎ’이라고 적혀 있었다. ‘혹시…’ 하고 들춰보니 색인표였다. 파일에서 본 ‘김영삼’을 찾으니까 어김없이 ‘김영삼: 221번’이었다.


갖고 갈 자료는 찍어두었다. 색인표와 파일 몇 개, 컴퓨터 디스켓 등 가능한대로. 워드프로세서 실에 있는 디스켓이 한 통 당 10장, 1장 당 15명의 사찰대상기록이라는 것과 그게 파일을 입력해놓은 것이라는 사실은 알아두었다.


보안사에서 탈영한 윤석양 이병은 보안사에서 정치인들을 비롯한 민간인들에 대해 광범위한 사찰활동을 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사진은 윤 이병이 사찰의 증거로 제시한 사찰대상자의 색인표, 개인별 파일 및 컴퓨터 디스켓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9월 23일 새벽 2시였다. 보초 교대시간은 2시 40분이다. 잠수교의 비상통신망이 설치되어 있으므로 제1한강교를 건너 지리에 밝은 숭실대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왔다갔다 하는데, 서빙고의 군견 ‘트리카’가 갑자기 짖기 시작했다. 그래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담배도 피고 심호흡도 하며 맴을 도니까 2시 30분. 식당을 나가 왼쪽의 창고에 숨었다. 비는 이미 멈췄다.


2시 40분이 됐다. 근무자가 위병소를 나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런데 가로지르지 않고 잔디밭을 따라 빙 둘러서 내 쪽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상병은 내 앞에 서서, 졸리운 듯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하고 목덜미를 긁으며 기지개를 켠 채로 등을 보이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뛰었다. 많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빗장을 풀었다. ‘트리카’는 계속 짖고 있었다. 계속 울고 있었다.


-1990년 10월 13일치 한겨레 13면에 실린 윤석양 이병의 글


※윤석양 이병이 1990년 7월 3일 국군 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연행될 때부터 9월 23일 사찰자료를 들고 탈영할 때까지 겪은 불법 수사실태와 탈영의 동기, 경위 그리고 프락치 공작을 당하면서 느낀 고민과 좌절 등에 대해서 회고한 글을 한겨레에 기고했다.


윤석양은 1990년 5월 군에 입대했다. 그해 7월 3일, 국군 보안사령부는 윤석양을 연행했다. 입대 전에 활동했던 학생운동조직 ’혁노맹’을 문제 삼았다. 윤석양은 3월에 이미 혁노맹을 탈퇴한 터였다. 보안사령부 수사관들은 혁노맹 중앙위원들의 소재지를 대라고 을렀다. 혁노맹 조직사건 수사에 협조하면 군무원으로 채용해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했다. 이른바 ’프락치’ 활동을 제의했다. 윤석양은 두 달 동안 보안사 일을 도와줬다.


프락치 활동에 자괴감을 느끼던 윤석양은 9월 23일 새벽 사찰자료를 들고 탈영했다. 그리고 한겨레신문사를 찾아와 이 모든 사실을 폭로했다. 당시 사회부 경찰팀의 김종구 기자는 윤석양을 자신의 집에 숨겨줬다. 불안에 떠는 윤석양을 위로하며 자료를 일일이 검토했다. 한겨레신문사 안에서도 편집국장, 사회부장 등만 알고 있는 ‘극비 작전’을 폈다. 컴퓨터 디스켓 30장에 담긴 자료를 모두 풀어 정리했다. 사찰 공작의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 있었다. 관련한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취재도 진행했다.


윤석양에 대한 경찰 수배령이 떨어졌다. 얼굴과 이름이 공개되었다. 김종구의 집에 숨기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김종구는 고심 끝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윤석양을 보호해달라고 부탁했다.


1990년 10월 5일, 윤석양 이병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군 보안사의 민간인 불법사찰을 폭로하고 있다. 그는 9월 23일 새벽 탈영한 뒤 제일 먼저 한겨레를 찾아와 이런 사실을 제보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0년 10월 4일, 윤석양 이병이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했다. 국군 보안사령부의 민간인 사찰 실태를 폭로했다. 군 수사기관인 보안사가 군인이 아닌 시민을 상대로 사찰과 정치공작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윤석양이 들고 나와 한겨레와 함께 정리한 사찰자료들도 공개했다.


사찰 대상은 광범위했다.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김대중 평민당 총재, 이기택 민주당 총재,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 강만길 교수, 성유보 한겨레 편집위원장, 김중배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 민간인 1300여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군 관계 정보수집과 군 수사업무라는 보안사령부의 본래 임무를 벗어난 정치사찰이었다. 군 보안사령부는 누가 언제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한겨레는 이같은 내용을 10월 5일치 1면에 특종보도했다.


군 보안사령부가 민간인 1300여 명을 사찰했다는 폭로를 특종보도한 1990년 10월 5일치 한겨레 1면.


다음날인 10월 6일치 1면에는 사찰자료를 분석한 내용을 1면에 단독으로 보도했다. 사찰 대상인 1300여명 가운데 국회의원 90명을 포함해 정계 136명, 종교계 186명, 총학생회 간부 등 학생 198명, 노동계 190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양심선언을 한 윤석양과의 1문1답도 실었다.


-국군 보안사령부로부터 프락치 활동을 권유받았나?

=보안사로 연행될 때부터 “너는 행운아다. 우리는 너를 감옥에 보내고 싶지 않다. 함께 일해보자”는 권유를 받았다. 그 뒤에도 “수사관으로 일하겠다면 조기 제대시켜 6급 군무원으로 채용해주겠다. 6개월 정도 현장에서 감각을 익히고 다른 조직으로 들어가라”는 프락치 활동 권유를 3~4차례 받았다.


-그런 권유에 어떻게 대응했나?

=학생운동 동지들을 점찍어주는 행동을 하고보니 이제 도리없이 프락치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자포자기했고 솔직히 운동을 그만둘 생각도 했다.


-그런데 왜 탈영을 결심하게 되었는가?

=<말>지 10월호에 실린 ‘보안사의 혁노맹 사건 조작 진상’이란 기사에 내가 혁노맹 사건 수사발표 하루 전인 8월 21일 보안사 수사관 2명과 함께 인천 누나집에 혁노맹 관련 자료를 찾으러 갔다가 누나에게 “내일 조직사건이 터지는데 나는 빠질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보도됐다. 이 보도가 나가자 “너 혹시 이중스파이 아니냐”고 물으며 의심하는 눈치를 보였다.


-탈영 경위는?

=분석반 사무실과 워드프로세서실에 들어가 이 자료들을 가지고 나와 경계근무 교대시의 감시 소홀을 틈타 빠져나왔다. 개인 색인표는 캐비넷 안에 있던 전부이고 디스켓은 90장 가운데 30장만 가지고 나왔다.


-보안사에 있는 동안 양심선언에 대한 경고를 받지 않았는지?

=수사관들로부터 “만약 양심선언 같은 행동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간다. 이 조직은 무시무시한 곳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1990년 10월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 소속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사실을 폭로했다. 윤 이병이 사찰의 증거로 제시한 사찰 대상자의 색인표, 개인별 파일 및 컴퓨터 디스켓들.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는 보안사가 정보 수집을 위해 운영한 카페 ‘모비딕’을 서울대 앞에서 찾아내는 등 연일 특종 보도를 이어갔다. 1990년 10월 7일치 1면에는 카페 ‘모비딕’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보안사가 민간인 정보 수집을 위해 위장 술집을 경영하고 있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보안사가 경영하고 있는 술집은 서울 관악구 신림본동 서울대 부근에 있는 ‘모비딕’ 카페로 이곳 지배인은 보안사 현역 장교이며 웨이터까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파견된 사병인 것으로 6일 밝혀졌다. (중략) 이 술집은 강아무개씨 이름으로 등록돼 있으며, 강씨의 남편은 보안사에 근무하고 있는 황아무개 중사로 드러났다. (중략) 관할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을 조회한 결과 지배인은 보안사 소속 박아무개 준위로 확인됐다.


2011년 개봉한 영화 ‘모비딕’에는 바로 이 ‘윤석양 사건’과 사회부 기자의 활약상이 주요하게 등장한다.


보안사가 위장 술집으로 운영했던 서울대 앞 카페 모비딕. 한겨레 자료사진


윤석양의 양심선언과 한겨레 보도를 계기로, 보안사령부는 이후 기무사령부로 이름까지 바꾸며 불법 사찰 기관의 오명을 벗으려 애써야 했다. 당시 이상훈 국방 장관과 조남풍 보안사령관은 해임되었다.


윤석양은 2년간 도피 생활을 하던 끝에 1992년 9월 23일 대구에서 붙잡혔다. ‘윤석양 후원사업회’ 사무국장과 저녁식사를 하던 중에 기무사 요원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급습했다. 윤석양 후원사업회와 각계 인사 500여 명은 윤석양 이병에 대한 수배 해제를 촉구하는 서명운동과 집회 등을 벌이고 있었다. 군사법원에서 군무이탈죄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윤석양은 1994년 11월 출소했다.


'윤석양 후원사업회 준비위'(위원장 이우정)는 1990년 11월 1일 기독교회관에서 발기인대회를 갖고 윤이병 신변보호, 폭압정보기구 해체 등을 위한 범국민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 한겨레 창간 30돌을 맞아, 한국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한 특종이나 기획 기사의 뒷이야기를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 30장면>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디지털 역사관인 '한겨레 아카이브'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한겨레의 살아 숨쉬는 역사가 궁금하시다면, 한겨레 아카이브 페이지(www.hani.co.kr/arti/archives)를 찾아주세요. 한겨레 30년사 편찬팀 achive@hani.co.kr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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