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1618.html


독립군의 어린 신부·반독재 투사의 아내…인고의 한평생

등록 :2018-07-02 20:29 수정 :2018-07-02 22:07


장준하 선생 부인 김희숙 여사 별세, 18살때 결혼…열흘만에 학도병 ‘이별’ 

한국전쟁때 ‘사상계’ 편집·경비 돕고 75년 남편 의문사 뒤 3남2년 홀로 키워 

“성당에서 입관봉사해 먹을거리 마련”


지난 2016년 8월 파주 장준하공원에서 남편 고 장준하 선생의 부조를 제막하고 있는 고 김희숙 여사.


항일 독립군이자, 박정희 유신독재 반대 운동을 하다 의문사한 고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가 2일 오전 별세했다. 항년 92.


경기도 파주의 한 요양병원에서 임종을 한 장남 장호권(69)씨는 “어머니께서 오늘 오전 11시24분 지병으로 눈을 감으셨다”며, “심장병과 신부전증을 앓아오신 어머니는 그동안 약으로 치료를 해왔지만 노환이 더해지며 더 이상 치료가 어려웠다”고 부음을 전했다.


고인은 호권·호성·호준 세 아들과 호경·호연 두 딸을 뒀다. 하지만 막내 아들인 호준(60)씨의 얼굴은 끝내 보지 못한 채 떠나 안타까움을 남겼다. 목사인 호준씨는 지난 2016년 ‘4·16총선’을 앞두고 미국에서 ‘불의한 정권을 투표로 심판합시다’ 광고를 신문 등에 게재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기소됐다. 1심에서 벌금 200만원을 선고 받고 항소심을 진행 중인 그는 외교부에 의해 여권이 정지되는 바람에 지금껏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장 목사는 지난달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제는 말씀조차 못 하실 만큼 위독 하시지만, 제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자식이 옳고 그른 것을 가리기 위해, 정의로운 일을 위해, 항소를 포기 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모습 보시기를 더 원하시리라 믿는다”는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김 여사의 병환이 깊어진 지난 5월부터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장씨의 여권을 돌려달라’는 청원이 두 차례 제기됐고 총 1만5천여명이 힘을 보태기도 했다.


고인은 장준하 선생의 동반자이자, 평생의 동지였다.


1926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장준하 선생이 소학교 교사시절 제자이자 묵었던 하숙집의 딸로 인연을 맺어 1944년 18살 때 결혼했다. 일본 유학중이던 장 선생은 정신대(위안부)로 끌려갈 위기에 처한 김 여사를 구하고자 귀국해 결혼식을 올렸다. 그 열흘 뒤 학도병으로 입대하면서 그는 어린 신부에게 ‘중국에서 광복군으로 탈출할 계획’을 털어놓으며 기도를 부탁했고, 김 여사는 그날부터 평생토록 천주교 신앙으로 인고의 한평생을 견뎌냈다.


고인은 50년대 한국전쟁 와중에 남편이 발행한 잡지 <사상계>를 만드는 데도 힘을 보탰다. 호권씨는 “잡지는 만들어야 하는데 형편이 어려워 직원이 없으니 어머니께서 편집도 도왔고 사무실 임대료와 인쇄할 종이값이 없을 때에는 당신의 외투를 몰래 팔아서 운영비를 대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난 1985년 8월 경기도 파주시 광찬리 천주교 나사렛공원묘지에서 열린 고 장준하 선생 10주기 추도식 때 남편 묘소 앞에 앉아 있는 김희숙 여사. 사진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일제 만주군 출신 박정희는 75년 8월17일 장준하 선생 의문사 이후 중앙정보부를 통해 내내 유족을 철저히 감시하고 일체 어떠한 생계 수단도 가질 수 없도록 괴롭혔다. 지난 2016년 1월 구순 생신잔치 때 고인은 “정보부원들이 장례식 때만 성당에 가도록 허락해줘서,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기다려야 하는 나날”이었고, “성당에서 주검을 씻기고 수의를 챙겨 입히는 입관 봉사를 하면 유족들이 이것저것 챙겨주어 아이들을 먹일 수 있던 시절”이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고인은 장준하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장준하공원에서 남편과 함께 영면에 들 예정이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미사는 오는 4일 오전 8시, 발인은 9시 예정이다. (02)2072-2091.


최민영 기자 my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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