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1029172708253


당은 왜 백제를 공격하였나?

[고구려사 명장면 109] 

임기환 입력 2020.10.29. 17:27 


660년 6월 18일 20만이 넘는 대군이 백제의 북쪽 경계 너머 신라 영역에 집결하고 있었다.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는 당의 장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산동반도의 내주(來州)를 출발하여 바닷길로 막 도착한 참이었다. 태종무열왕은 김유신과 더불어 총력을 기울인 신라군을 이끌고 5월 26일에 수도 서라벌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신라 남천정(지금의 이천)에 이르러 머물렀다.


무열왕은 21일에 아들 법민을 덕물도로 보내어 당군을 맞이하고, 앞으로 군사 행동 일정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7월 10일에 백제 기벌포(伎伐浦 : 지금의 금강 하구)에서 양군이 만나 사비성을 공략하기로 정했다. 기벌포까지 각각 20일의 행군 기간을 둔 것이다. 당군은 해로로 이동하기 때문에 여유롭지만, 육로로 진격해야 하는 신라군의 이동 일정에 맞춘 것이다.


이 20일간이 백제의 운명을 결정짓는 시간이었다. 국운의 존망을 다투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보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록상에 나타난 백제 지배층의 대응을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은 수년 전에 이미 당과 신라의 침공을 예언하고는 글을 올려 기벌포와 탄현(炭峴)을 방어할 것을 간언한 바 있다. 또 다급해진 의자왕의 문의를 받은 흥수(興秀) 역시 같은 계책을 올렸다. 그러나 조정 중신들은 티격태격 논의만 분분할 뿐이었다. 그런 사이에 이미 당군과 신라군은 백강과 탄현을 지나 사비성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의자왕은 부랴부랴 달솔 계백(階伯)으로 하여금 신라군을 막게 하고, 기벌포에 상륙해 진격하는 당군을 웅진강 입구에서 방어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미 전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기울고 있었다.


12일에 나당연합군은 사비성을 포위하였고, 13일에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다. 사비성은 곧 항복하였고, 18일에 의자왕은 웅진성주의 배신으로 사로잡혀 당군의 포로가 되었다. 백제의 사직이 무너지기까지 단 7일만이었다. 이렇게 백제는 너무도 순식간에 멸망하였다.


이 멸망의 과정은 당시 백제 지배층이 얼마나 무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규모 당군이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군이 북진하여, 백제 북쪽 국경에서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결집하고 있었는데도 이에 대한 대비책을 모색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신라군과 당군이 육로로 해로로 사비성으로 다가오는 20일 기간 동안이라도 이들의 진격을 중간에서 차단하려는 시도가 있어야 했다.


설사 탄현과 기벌포를 막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사비성이나 웅진성에서 최소한 한 달 이상 지켜주었어야 했다. 그렇다면 지방에서 일어난 군대가 나당연합군을 포위하는 상황으로 바뀌어 전세가 역전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사비성 항복 이후 각 지역에서 일어난 부흥군에 의한 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사실이 그럴 가능성을 짙게 한다.


700년 가까운 사직을 유지해온 왕조라면, 비록 왕조가 멸망하는 비운을 맞이하더라도 적어도 굴욕을 줄이려는 최소한의 저항이라도 있어야 했다. 사비성이 무너지기까지 제대로된 저항이라고는 황산벌에서 계백과 5천 결사대의 순국, 그리고 웅진강에서 1만 군사의 분투뿐이었다.


개백묘로 전승되는 무덤. 1989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었다. /사진=논산시청 홈페이지


따지고 보면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붕괴된 것은 수도인 사비와 웅진뿐이었다. 각 지방에 온존하고 있던 지방군과 백제 주민들은 여전히 백제의 백성이었으며, 백제를 지키기 위한 군사력이었다. 그래서 이들이 치열한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럼에도 중앙정치세력은 이런 힘을 멸망과정에서 전혀 수렴하지 못하였다. 이런 백제의 모습은 한 왕조의 멸망에서 배우는 가장 큰 교훈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구려사 명장면이란 기획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 백제의 멸망 과정을 시시콜콜 언급할 생각은 없다. 그래서 이제까지 고구려 원정에 초점을 맞추고 군사행동을 벌이고 있던 당 조정이 왜 갑자기 백제 원정으로 방향을 선회했을까 하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648년 12월에 당태종과 신라 김춘추 사이에 맺은 협약에서는 고구려 원정이 우선이었고, 백제 공격은 차순위였다.


물론 이때 김춘추가 당태종에게 신라군이 고구려 원정에 나서기 위해서는 백제부터 먼저 멸망시켜야 함을 피력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645년 당태종의 친정 때에 백제의 공격으로 고구려 남쪽을 공격하던 신라군이 회군해야 했던 선례가 있으니, 당 태종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수긍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 공격을 우선하는 전략 자체가 그 자리에서 논의되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고, 또 당시는 이미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기 때문에, 백제를 선공하는 전략은 애당초 논외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 태종이 사망하고 당 고종이 즉위한 이후 당 조정이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위해 신라와의 연합을 추진한 흔적은 사료상으로는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신라 입장에서는 당 태종과의 협약을 성사시킨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뒤에는 지속적으로 나당연합 전략을 꾸준하게 제기하였을 것이다. 어쨌든 당이 백제를 먼저 공격하기로 최종 결정한 시점은 659년 11월 무렵이었던 듯하다. 11월 21일에 소정방을 신구도총관(神丘道總管)으로, 유백영(劉伯英)을 우이도총관(?夷道總管)으로 임명하였다는 기사에서 이 무렵 당이 백제 정벌을 결정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해 윤10월 29일에 일본 사신이 당 낙양에 도착하고 일을 마친 뒤에도 당이 백제를 정벌하려는 정보가 새어나갈까봐 일본 사신을 백제 멸망 때까지 가두었다가 돌려보낸 사실도 확인된다. 또한 660년 3월 10일에 당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기사를 보면, 3월 시점에서야 비로소 신라 측에도 백제 원정 계획을 최종 통보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사례들은 당이 매우 은밀하게 백제 정벌을 추진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난 회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백제 원정을 확정할 무렵인 11월에 양건방, 글필하력, 설인귀 등이 중앙에서 동원된 군사력을 이끌고 고구려 공격에 대거 참여하고 있는 점, 특히 그동안 없었던 요동에서 겨울철 군사작전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군이 고구려 공격에 다양한 전술을 탐색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이와 아울러 당의 백제 원정 계획을 은폐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다고 파악된다. 당시 백제와 고구려 양국 모두 당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측의 동향을 파악할 통로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군의 거듭되는 고구려 공격은 당군의 다음 행보가 백제로 향하리라는 예측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당군이 고구려 원정에 앞서 백제 공격을 시도한 것은 고구려 공격에 신라군을 동원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우선이었을 것이다. 물론 백제 땅에 기미지배체제를 시행하여 당의 영토로 삼는다는 점은 당연한 전제이고 말이다. 그 외에도 당군은 다양한 전술과 병력의 이동 방식을 실전으로 점검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정방이 거느린 13만 군사를 모두 배로 이동시킬 때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배를 동원했다. 이 광경을 <삼국사기>에서는 당군이 1000리에 배가 맞닿게 하고 해류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또 <삼국유사>에는 "향기(鄕記)에 의하면 (당의) 군사가 12만2711명, 배 1900척이라고 하는데, 당사(唐史)에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고 하여 신라의 독자적인 전승 기사를 전하고 있다. 당의 군사를 매우 구체적으로 적기하고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고 보이는데, 따라서 당시 당군의 수가 13만명이었다는 점에서 동원한 배가 1900척이라는 점도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이 점을 왜 따져보냐 하면, 백제 멸망 이후 661년 8월에 고구려 원정 시에는 요동지역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소정방이 대동강에 상륙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는 전혀 새로운 전략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렇게 보면 당군의 바닷길로 대군을 이동시켜 백제를 공략한 것은 바닷길로 고구려 평양성을 직공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던 것이다.


백제가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군은 원정을 손쉽게 끝내고 의자왕 등을 포로로 삼아 개선하였다. 그런데 이번 백제 원정으로 고구려 공격을 위한 여러 전술과 전략도 시험하였고, 동시에 백제 영토에 고구려 공격을 위한 거점도 마련할 수 있었다. 게다가 신라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남쪽으로부터 공격이 가능해지면서 평양성 공함의 성공 가능성도 커졌다. 이렇게 당은 손쉽게 많은 것을 얻었다.


그러나 김춘추와 당 태종이 맺은 협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당 고종은 그럴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이제 신라는 자신의 힘으로 그 협약을 성취해야 했다. 나당연합이 균열되기 시작한 것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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