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8300600025


[대한민국 임시정부 99돌]독립, 그 이상의 꿈을 보았다

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 |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입력 : 2018.08.30 06:00:02 수정 : 2018.08.30 06:01:01 


ㆍ①임정 대가족 유랑의 3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11일 제정·공포한 대한민국임시헌장.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함’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중국 창사서 충칭까지 ‘대이동 3년’ 그들이 쏘아올린 민주공화국 화두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에게 묻는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함.” 99년 전인 1919년 4월11일 공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 1조다. 3·1운동에 이어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들어서면서 만든 첫 헌법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제헌헌법부터 현행 헌법까지 이어지는 ‘민주공화국’ 선언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됐다. 나머지 9개 조항에는 대의제, 자유와 평등 등을 명시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 공동체의 기본정신을 그대로 담은 씨앗이다. 


‘구황실’ 이후, 독립 너머의 이상을 품고 고향땅에 돌아오기까지 임시정부는 27년간 중국을 떠돌았다. 일본 경찰의 추격, 전쟁의 포탄이 이들을 계속 움직이게 했다. 상하이에서 출발해 광복을 맞은 충칭(重慶)에 이르기까지의 대장정이다. 1937년부터 3년간 중일전쟁기의 여정은 특히 고단했다. 짧게는 청사를 연 지 2개월여 만에 여장을 다시 꾸렸다. 그렇게 중국 동남부 2100㎞를 유랑했다. 상하이와 충칭 시기 중간에서 상대적으로 조명되지 못한 피란기. 이 여정 역시 고난의 시기인 동시에 희망과 투쟁의 시기였다. 


그날처럼…충칭 임정 청사 앞에서 1945년 11월3일 환국을 앞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국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 계단에 커다란 태극기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지난 19일 임시정부 후반기 족적을 따라가는 ‘독립대장정’에 참여한 시민들이 같은 장소에서 환하게 웃으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김동우 사진작가 제공


제73주년 광복절을 맞은 지난 15일, 시민 26명이 임시정부의 후반기 족적을 따라가는 여정에 올랐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내년을 기념해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기획한 ‘독립대장정’이다. 창사(長沙)에서 시작해 해방 당시 임시정부가 머물던 충칭까지 ‘대이동기’를 좇았다. 동행한 최태성 역사강사는 “후반기 임시정부의 대이동은 대한민국과 민주공화국,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힘겹게 짊어지고 폭격을 피해 이동했던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길”이라고 했다. 피란 중에도 3·1운동 기념식을 열고, 라디오 방송을 하며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났다. 수갈래로 쪼개졌던 독립운동세력 간의 이합집산과 고민이 담긴 장소를 지났다. 여정은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이 사라지고 없는 공터, 잊혀진 이들의 묘지로도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역사는 과거로의 여행인 줄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지금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기억하는 것을 넘어 무엇을 해야 할까” 등의 질문을 받아들고 왔다. 100여년 전 이국땅에 닿은 독립운동가들이 삶으로 쏘아올린 화두는 그렇게 다시 현재와 만났다.


김동우 사진작가 제공 


◆ 눈떠 보면 ‘붉은 하늘’…포격에 ‘피란 기차’서 뛰어내리기도


|일본군에 쫓기다 

열차 ‘한 칸’에만 100명 탑승, 목선 끌고 가던 증기선 도망, 밧줄로 배 끌며 40일간 이동 


|독립의 꿈을 좇다 

외국 인사 초청 국경절 행사, 광복군 창설해 항일투쟁 앞장, 좌우이념 없는 ‘통일의회’도 


1937년 쌀쌀한 바람이 불 때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100여명의 대가족이 길을 떠났다. 13년간 머문 상하이(上海)를 떠나온 지 이미 5년이다. 그해 7월7일 터진 중일전쟁의 전세는 일본으로 기울고 있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머물던 난징에도 포탄이 날아들었다. 백범 김구 선생은 기관포 소리에 잠이 깼다. “내가 누웠던 (집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 시체가 헤아릴 수 없었다. 각처에서 불빛이 하늘로 높이 치솟아 하늘색은 마치 붉은 담요와 같았다.”(<백범일지>) 그 길로 짐을 꾸렸다. 12월 초 창사(長沙)에 닿았다. 난징대학살을 겨우 피했다. 


역사교사 임선일씨가 지난 19일 충칭 임시정부 청사 내 백범 선생 흉상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김동우 사진작가 제공


지난 15일 광복절, 대장정에 참가한 26명의 시민이 도착한 창사시는 급박했던 피란행렬 대신 고층빌딩이 즐비했다. 가난했던 임시정부가 창사를 피란지로 택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창사의 곡식값이 쌌기 때문이다. 지금은 후난성의 성도이자 경제중심지로 곳곳에서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1938년 5월 한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3당 합당 회의 중 김구 선생이 총상을 입은 남목청 6호 주변은 고층빌딩 사이 푹 꺼진 섬처럼 남아 있다. 바로 앞 주택가에 사는 주민은 “당시 중국과 한국 다 항일하느라 고생이 참 많았다”고 말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그나마 “고등난민”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하나, 이곳도 안전하진 않았다. 일본군 세력이 확장하면서 ‘붉은 담요’ 같은 하늘이 창사까지 따라왔다. 


임시정부는 다시 짐을 꾸려 광저우(廣州)로 향했다. 후난성 장치중 주석의 도움을 받아 빌린 기차 한 칸에 100명이 탔다. 7월의 찌는 더위를 견디며 사흘을 갔다. 지금은 고속철로 2시간 남짓이면 가는 거리다. 광저우에는 임시정부가 1938년 7~9월 두 달간 사용한 청사 ‘동산백원’이 있다.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지난해 2월 실존이 확인된 곳이다. 광저우에서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강정애씨(63)는 “짧게 머물렀지만 외국 인사들을 초청해 국경절 행사를 하고, 경술국치일을 기억하는 사진전시회도 열었다”며 “중국 방송국을 통해 한·중 공동 항일투쟁을 해야 한다고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도 임시정부 요인들의 자취를 찾긴 쉽지 않다. 1층 입구와 2층 테라스에는 주민이 널어놓은 빨래가 즐비했다. ‘휼고원로 12호’라는 주소판 외에는 별도 표식이 없다. 남아 있는 자료들로 이곳에 머물 당시 임시정부의 행적을 그려볼 뿐이다. 


임시정부의 청사는 늘 ‘임시’다. 일본의 포탄은 그 ‘임시’ 청사마저 떠돌게 했다. 1938년 10월 초, 일본 육전대가 광저우로 진격해왔다. 다시 짐을 꾸렸다. 광저우가 일본군에 함락되기 하루 전이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중간 기착지에선 포탄이 쏟아졌다. 임시정부 살림을 도맡았던 정정화 선생은 “무슨 정신으로 기차에서 내려 밭까지 뛰어가 몸을 숨겼는지 모르겠다”(<장강일기>)고 당시를 기록했다. 큰 목선을 빌려 주강(珠江)을 거슬러 류저우(柳州)로 향하는 도중엔 목선을 끄는 증기선이 몰래 떠나버려, 임시정부 인사들이 물에 내려 밧줄로 배를 끌었다. 그렇게 류저우에 닿은 게 1938년 10월30일, 출발 40일 만이었다. 


고난의 여정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여정이기도 했다. 피란 중에도 독립운동 활동은 계속됐다.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당시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협력하면서 활로를 모색했다. 류저우에 머물던 1939년 3월1일엔 중학교 강당을 빌려 3·1운동 20주년 기념대회를 열었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조직해 중국청년공작대와 함께 활동을 폈다. 임시정부 청사로 추정되는 낙군사에서 관련 전시물을 찾아볼 수 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자주 지나다닌 유후공원의 정자는 그 모습 그대로다. 


피란의 종착지는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 정부가 수도로 삼은 충칭(重慶)이었다. 치장(江)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으로 임시정부 청사를 옮겼다. 대장정에 참여한 김진씨는 “독립운동가들이 한 치 앞만 봤다면 임시정부가 충칭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을까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상하이임시정부를 수립할 당시 청년들은 장년이 됐다. 중국에서 태어난 임시정부의 아이들이 장성해 이곳에서 칭화중학교를 다녔다. 석오 이동녕 선생과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비롯해 숱한 영혼이 중국 땅에 묻혔다. 


충칭에서 임시정부 군대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됐고, 1942년엔 약산 김원봉 등 조선민족혁명당 세력까지 참여하는 ‘통일의회’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도 충칭에는 임시정부의 환국 전 마지막 거처인 연화지 청사가 전시관으로 남아 있다. 최태성 역사강사는 “소라게처럼 짐을 이고 끊임없이 어딘가로 가는 여정” 속에서도 “민주공화국, 자유와 평화라는 씨앗을 지켜내고자 했던 몸짓이 대장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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