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20121042639&section=03  

"'황산 붓겠다' 협박 견뎌냈는데, 무죄 판결 앞두고…"
[사연] 고문 피해자 김장현 씨, 때늦은 최종 무죄 판결
성현석 기자  기사입력 2012-01-25 오전 8:15:11                    

몸에 새겨진 기억은 여간해서 지워지지 않는다. 자전거 타기를 어릴 때 익혀둔 사람은 한참 뒤에 자전거에 앉아도 균형을 잡는다. 다른 운동도 비슷하다. 그러나 몸에 새겨진 기억이 꼭 좋은 역할만 하는 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문이다. 고(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심한 치통에도 치과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치료를 받기 위해 조명 아래 누울 때마다 고문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인의 부인인 인재근 씨는 한 인터뷰에서 "(고인이) 고문당한 게 1985년 9월인데 매년 9월부터 추운 기간을 넘기기가 힘들었어요. 몸이 기억을 하나 봐요. 한번 아프면 땀이 나고 열이 나고 벌겋게 떠가지고 앓아서 유리그릇처럼 조심스레 겨울을 났어요"라고 말했다.

종종 잊고 지내는 사실이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고문 피해자들이 있다. 고(故)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숨진 게 불과 25년 전이다. 고문 후유증을 앓는 이들은 '몸에 새겨진 기억'이 저주스럽다. 그러나 어떤 낱말을 보거나 들을 때면, 저주스런 기억이 고압 전류처럼 몸을 가른다. 예컨대 왕년의 '고문 기술자' 이근안 씨가 뉴스에 나올 때면 그렇다. 그때마다 '움찔'하는 고통 앞에선 장사가 없다. 숱한 고문 피해자들이 허물어진 몸과 정신으로 늙어간다.

"내가 간첩이라고?"…한 엘리트 공무원의 삶을 망가뜨린 조작극

올해 78세가 되는 김장현 씨도 이런 경우다. 목포고와 서울대 상대를 나와 경제기획원에서 근무하던 그는 1973년 '유럽거점 지식인간첩단 사건'에 휘말리면서, 그간의 궤도에서 벗어났다.

발단은 사소했다. 경제기획원 제1차 산업국 재경서기보로 근무하던 1963년 4월 17일, 그는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 주관 세미나에 참가하기 위해 네덜란드를 방문한다. 관료 신분이면서도 지식인 정체성이 강했던 그는 유럽 사회과학계 동향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현지 유학생들과 어울렸다. 그때 만난 이 모 씨가 동독의 수도 동베를린 방문을 제안했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이 첨예하던 당시에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 땅을 밟는 일은 물론 위험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 유학생들 사이에선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분단국가인 독일이었지만, 동서간의 왕래가 무조건 가로막힌 것은 아니었다. 김 씨는 같은 해 11월 동베를린을 방문했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사회과학도'로서의 관심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67년 7월 8일, 이른바 '동백림 사건'이 터진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동백림(동베를린)을 거점으로 삼은 한 무리의 지식인들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다"라고 발표했다. 기소된 34명 전원이 유죄 판결이었다. 이 가운데 두 명에겐 사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실제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때부터 불온한 단어가 된 '동백림'. 그곳에 다녀왔다는 건 정보기관이 언제라도 써먹을 수 있는 꼬투리였다. 결국 1973년 10월 25일, 사건이 터졌다. 김치열 중앙정보부 차장은 이른바 '유럽 거점 지식인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다. 당시 모든 일간지 1면에 실린 사건이다.

"간첩단 54명을 적발, 이 중 3명을 구속 송치하고 17명을 불구속 송치했으며, 미체포 3명을 제외한 나머지 32명을 불문에 부쳤다. 이들은 공무원, 교환교수 등으로 유럽에 체재 중 북한 대남공작원에 포섭되어 직분과 전문분야별로 정부 주요기관을 비롯해 학원과 주요 기업체에 침투,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혁명의 결정적 시기에 연합전선을 형성하려 했다. 이들 중 서울 법대 최종길 교수는 중앙정보부에서 구속 수사를 받던 중 간첩임을 자백하고 범행사실을 털어놓은 후 변소 창문으로 투신자살하였으며, 최 교수와 최근의 학원사태와는 관련이 없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최종길 교수가 동베를린에 다녀온 사실이 밝혀지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했다"라고 설명했다. 설령 동베를린에 다녀왔다 한들, 그게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었을까. 결국 이 사건은 이듬해인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폭로로 진실의 일부가 드러난다. 당시 사제단은 중앙정보부 내부의 제보를 근거로 "최 교수가 전기고문기의 오(誤)작동에 따른 심장파열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최종길 교수 의문사'로 대중에게 각인된 '유럽 거점 지식인 간첩단 사건'은 같은 해 8월의 김대중 납치 사건의 후유증, 당시 들끓던 대학가 유신반대 시위 등을 무마하기 위한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 엘리트 공무원이었던 김장현 씨는 최 교수 등과 함께 이 사건에 연루됐다. 김 씨는 1975년 3월 대법원에서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이 확정됐다.

▲ 김장현 씨. ⓒ프레시안(최형락)

중정 "휴전선에 끌고가 쏴죽인 뒤 월북하려 했다고 발표하겠다"

김 씨는 지난 1998년 <뉴스플러스>(현 <주간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자세히 회고했다.

"남산 지하실에서 만신창이가 된 가운데 한 달쯤 지나 조사가 마무리될 무렵 내 방의 두 세 칸 앞에 '서울대 교수 최종길'이라는 명패가 걸렸다. 당시 중정 지하실에서 조사받던 사람은 나를 제외하면 최 교수뿐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수사관의 감시 아래 화장실에 갈 때 맞은편에서 좀 퉁퉁한 사람이 다리를 절며 화장실 쪽으로 걸어오더니 얼떨결에 나에게 목례를 했다. 순간적으로 '이 사람이 최종길이구나' 생각했다. 그도 나처럼 고문 때문에 거의 반 쯤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당시 <뉴스플러스>에 따르면, 김 씨와 최 교수의 만남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김 씨는 그날이 최 교수의 사망일이었던 걸로 추정한다.

김 씨 역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김 씨의 부인 김연주 씨는 지난달 말 <프레시안>과 만난 자리에서 김 씨가 전한 고문의 기억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양발목과 양손을 묶은 뒤 양 무릎 뒤에 봉을 끼워 사람을 허공에 거꾸로 매다는 이른바 '통닭구이', '몽둥이찜질', 그리고 물고문까지. 여기에 폭언과 협박까지 곁들여졌다. "휴전선에 끌고가 쏴죽인 뒤 월북하려 했다고 발표하겠다." "황산을 부어 살을 녹인 뒤 뼈는 갈아 날려버리겠다." 멀쩡한 사람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이 왕왕 일어나던 시절이다. 이런 협박은 빈말로 들릴 수 없었다.

▲ 김장현 씨의 부인 김연주 씨. ⓒ프레시안(최형락)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그가 목포 출신이고 경제 전문가라는 점을 들어 고(故) 김대중 대통령과 연결시키려 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와 박정희 대통령을 위협했던 정치인 김대중, 그가 <대중경제론>을 집필하는데 김 씨가 도움을 준 게 아니냐는 게다. 미리 만들어둔 황당한 각본 앞에서 김 씨는 도무지 할 말이 없었고, 고문의 수위는 계속 높아졌다.

고법 판사 "국가를 대신해서 사과드린다"

그리고 징역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평온한 생활은 기대할 수 없었다. '경제기획원 서기관'이라는 경력은 쓸모가 없었다. 취업은 불가능했다. 사설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근근이 번역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한국에서 간첩 사건에 연루됐다는 이력은 '불가촉천민' 낙인에 다름없다. 인간관계가 끊어졌다. 워낙 사람 만나기를 좋아했던 그에겐 큰 고통이었다. 어린 자식들은 끊임없이 근처를 맴도는 중정 요원들 때문에 마음에서 생채기가 아물 틈이 없었다.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부인의 고초는 말할 것도 없다.

김 씨를 옥죄어 왔던 굴레가 벗겨진 것은 불과 한 달 전이다. 지난달 22일, 대법원은 과거 그에게 적용됐던 모든 혐의에 대해 최종 무죄를 확정했다. 날로 쇠약해져 가는 그의 모습을 안타까워했던 주변 사람들이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찾은 게 지난 2006년이다. 여기서 그의 삶을 망가뜨린 '유럽 거점 지식인 간첩단 사건'이 박정희 독재정권의 조작극이라는 결론이 났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고등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판사는 김 씨와 그 가족에게 "국가를 대신해서 사과드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은 판결을 인정하지 않고, 결국 상고했다. 대법원이 사건의 매듭을 지었다. 검찰의 상고는 기각됐다. 대법원은 당시 판결문에서 "피고인은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에 의하여 장기간의 불법구금, 고문, 폭행, 협박에 의하여 허위자백을 한 다음 그러한 강박상태가 검찰 수사과정에서도 계속되었으므로 (…) 피고인이 작성한 각 자술서는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였다"라고 밝혔다.

▲ ⓒ프레시안(최형락)

뇌질환 발병, 무죄 확정 소식 인식 못 해

김장현 씨의 삶은 1973년 '유럽 거점 지식인 간첩단 사건'을 계기로 반반으로 나뉜다. 전반부가 엘리트로 승승장구해온 세월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국가의 폭력으로 망가진 세월이다. 그리고 지금, 삶의 후반부를 망가뜨린 책임이 국가에게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김 씨의 소감이 어떨까.

여기서 다시 비극이 있다. 김 씨는 4년 전부터 뇌질환을 앓고 있다. 재판이 진행된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판사가 국가를 대신해서 사과했다는 사실도, 최종 무죄가 확정됐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고문 후유증, 울분으로 지새운 지난 세월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의사의 판단이다.

지난 39년 세월에 대해 김 씨로부터 직접 듣지 못하고, 그의 부인을 만나야 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부인 김연주 씨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무죄 확정' 판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한숨을 푹푹 쉬었다. 기쁜 소식을 정작 당사자는 알지 못한다는 게다. '몸에 새겨진 고문의 기억'은 끝내 병이 됐고, 피해자의 정신을 함락시켰다. 왕년의 '고문 기술자' 이근안 씨를 둘러싸고 최근 쏟아지는 뉴스들이 씁쓸하게 들리는 이유다.
 
/성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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