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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서부 해상세력

발해인의 해상 활동에 대해서 구체적인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여러 외국 사서에 기록 되어 있는 단편적 자료를 통해서 그나마 대략적인 실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해를 이용한 일본과의 교류는 자료가 많지만 발해 서해 해상 세력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 

등주 공격을 지원한 해상 세력은? 

발해의 뛰어난 해상 능력을 보여준 사례는 732년 9월에 진행된 등주 공격이다. 당나라 북방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이자 군사적 요새였던 그 지역을 발해가 수군을 동원해서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던 것이다. 

등주성을 손쉽게 함락 시켰다는 것은 많은 발해 군사와 함선이 투입 되었다는 의미이다. 8세기 초에 수군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해상 상륙을 강행한 것은 발해 건국을 전후하여 발해 서쪽 지역에 상당한 규모의 해상 세력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 해상세력의 실체를 밝혀낸다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서해 지역의 발해인의 활동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서해 지역에서 해상 세력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필자는 '고려후국'이라고 생각한다. 발해 시대에 한반도 북부와 요동 지역에 존재하던 '고려후국'이 발해에 귀속한 뒤에도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당회요나 책부원귀, 요사와 같은 사료에 고려와 관련된 기사가 8세기부터 10세기 초까지 나오고 있다. 이 당시의 고려는 이전 존재했던 고구려와 10세기 초 왕건에 의해서 건국된 고려와도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고려후국'을 지칭하는 것이다. 

고구려 시대부터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던 서해 해상 세력들은 고.당 전쟁을 통해서 몰락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일단락된 후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지고 당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힘의 공백 상태에 이르자 그 세력들이 다시 규합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했다고 본다. 

발해가 건국한 후 급속히 세력이 확대 되자 해상 세력이 포함된 '고려후국'은 자연스레 발해에 귀속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귀속과 더불어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승인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발해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제번(諸藩)의 상정은 말갈 뿐만 아니라 '고려후국'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발해가 내부적으로 황제체제를 유지했다는 점은 송기호 교수의 '황제 칭호와 관련된 발해 사료들' 논문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발해 시대에 존재했던 '고려후국'의 수도를 살펴보자. '고려후국'의 수도는 성천의 홀골성과 신의주의 국내성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국내성은 고려사, 세종실록에 나오는 기사 및 동국여지승람의 기사를 참조하여 당시의 국내성은 집안의 국내성이 아니라 신의주에 있던 국내성으로 북한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북한의 '장학종' 교수는 '고려후국'이 성천의 홀골성에서 신의주의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성천의 홀골성은 궁궐터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으며 졸본성이 도성으로서도 완비되지 못한 점을 보면 이 곳에 수도를 정하고 있은 시기는 몇 해 또는 10여 년에 지나지 않은 것 같다.1) 그렇다면 8세기 초 '고려후국'의 수도는 신의주의 국내성일 것이다. 

등주 공격은 발해의 주도 하에 '고려후국'이 협력했다고 본다. '윤명철' 교수는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의 저서에서 발해 수군이 박작성을 출발(사실, 발해 수군이 박작성을 출발했다는 내용은 사료에서 보지 못했다)하여 당을 공격했다고 하였다. 

필자는 '고려후국'의 수도이던 신의주의 국내성이 발해 수군 및 해상 세력의 중심지가 아닐까 싶다. 이미 박작성은 수.당의 전쟁을 거치면서 피해가 컸기에 그 맞은편이던 신의주의 '고려후국'의 수도인 국내성이 그 역할을 대신했을 것이다. 대규모의 선박을 건조하기 위해서라도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집단이 필요하다. 

서해 지역에서 발해인의 해상 활동 

일본 승려 '옌닌'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권2 에 보면 등주에 발해의 교관선이 정박하고 있으며, 발해관이 있다고 전한다. 

그리고 '옌닌'이 청주에 갔을 때 "발해 왕자가 이제 도착하여 본국으로 돌아갈려고 하는데 칙사가 오기를 기다려 떠나려 한다."는 기록을 참조하면 중국의 산둥 반도와 발해의 압록강구를 중심으로 일반 무역 역시 성행했다고 볼 수 있다.2) 이들 해상 세력은 산둥반도에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이정기'와 교역을 통해서 많은 이익을 남겼다. 특히 '이정기'의 군사력을 뒷받침해 준 명마는 발해 솔빈부에서 공급하였다. 

일본에 갔던 발해사절단이 동남아시아산 해구의 대모로 만든 주배나 중국 남서지방의 고지에 서식하는 사향사슴에서 채취되는 사향을 가지고 온 것도 3) 발해 서해상에서 원거리 무역을 주도한 국제 상인단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현재 서해안의 여러 섬에서 고구려 시대의 해상 방어 유적이 많이 발견 되고 있지만, 아직 발해 시대라고 단정 짓을 수 있는 군사적 방어 시설은 서해안에서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전 고구려처럼 섬을 이용하여 해상 방어시설을 구축한 연해주의 '빼뜨로프' 성처럼 발해는 서해안 지역에 있던 옛 고구려의 방어시설을 이용했을 것이다. 

현재 발해 국제상인단의 인물로 '이연효'가 주목 받고 있다. '이연효'의 경우 9세기 중엽의 인물로서 월주 등에서 활약한 국제 상인이다. 중국, 발해, 일본을 왕복하며 중개 무역을 하였는데 아마도 그는 동아시아 해상 세력을 주도한 발해 국제상인단의 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이광현'의 경우에는 일본, 중국학자들이 먼저 주목하였다. '이광현'도 9세기 발해 국제상인단과 관련 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 도가서 <도장> 속에 나오는 '이광현'은 어릴때 부모를 여위어 고아가 되었지만 집안이 부유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은 느끼지 않았다고 전한다. 구도에 뜻을 두어 발해와 중국을 오가던 그는 결국 배 안에서 도인을 만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임상선' 선생은 '이광현'의 고향이 해안가 부근인 점으로 미루어(고향 사람의 배를 탄 것으로 추정), '이광현'이 어렸을 시기 이전에 발해의 영역이 어떻든 오늘날의 발해만,혹은 한반도 서해 부근에 다다른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한다.(제54회 한국고대사학회에서 발표되었던 임상선 선생의 [渤海人' 李光玄과 그의 道家書 檢討] 논문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렇다면 서해 해안가에 막강한 부를 축적한 해상 세력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 해상 세력과 고려의 예성강 해상 세력과의 관계도 설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서해의 발해 해상 세력은 지금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들 세력은 발해와 중국의 무역을 주도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적대국이던 신라와 자유로운 무역 거래를 하였다. 

이 글은 자료가 부족하여 논리적인 비약이 많다. 하지만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제시한 소개글로 생각해 주기 바란다. 필자는 발해 서해 지역의 해상세력과 고려의 건국을 주도했던 예성강 일대의 세력과의 관계, 고려후국과 발해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할 생각이다. 


주) 
1) 장학종,<발해의 고려후국의 존립과 그 수도에 대하여>,<<자주독립국 발해>>,천지 출판,2000,p.152. 
2) 왕승예 저,송기호 역,<<발해의 역사>>,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1987 p.169-p.171. 
3) 스즈키 야스타미,이유진 역,<발해와 일본.당의 무역>,<<장보고와 21세기>>,혜안,1999, p.50. 


참고문헌) 
왕승예 저.송기호 역,<<발해의 역사>>,아시아문화연구소,1987. 
윤명철,<<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사계절,2000. 
발해사 편집실,<<자주독립국 발해>>,천지출판,2000.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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