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90204100254602


[사법농단 2년의 기록-2·끝] 양승태에 가려진 '그림자 법관들'

정재호 입력 2019.02.04. 10:02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검찰 출석을 하루 앞둔 지난 달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사진기자협회 소속 기자가 포토라인을 설치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검찰 출석을 하루 앞둔 지난 달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사진기자협회 소속 기자가 포토라인을 설치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법관 블랙리스트의 존재에 저항한 이탄희 판사의 2017년 2월 사표 한 장으로 시작된 사법농단 의혹. 사법부 역사상 초유의 대형사건인 사법농단은,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여러 법관 엘리트들이 도운 조직적인 사건이었다. 현재까지 피의자나 참고인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은 법관들은 최대 3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담 정도와 공모 관계 여부에 따라 사법처리 여부와 처벌의 수준은 달라지겠지만, 양 전 대법원장외에도 복수의 고위 법관들이 법정에 서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농단의 정점인 양 전 대법원장의 신경과 수족으로 기꺼이 일했던 법관들은 사법부에 얼마나 퍼져 있었을까? 양승태라는 거목에 가려진 ‘그림자 법관들’의 행위를 복기하는 것도 이런 사건의 재발을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필수적인 작업이다.


‘그림자 속 숨겨진 핵심’ 이민걸ㆍ이규진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이 피의자로 사실상 확정한 고위 법관은 박병대ㆍ고영한 전 대법관과 유해용 전 고법부장 등이다. 이미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장, 구속된 양 전 대법원장까지 포함한 이들 5명은 어떤 형태로든 법정에서 피고인으로 서게 될 것이란 얘기다. 익히 알려진 대로 두 전 대법관과 유 전 부장은 사법농단의 핵심 사건들, 일제 강제징용 소송 재판개입과 판사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에 핵심 행위자이자 전달자로 지목된 인물들이다. 특히 박 전 대법관은 지인의 탈세사건 재판 청탁과 관련한 ‘셀프 배당’과 불법 열람 혐의까지 받고 있어 기소는 확실한 상태다.


하지만 법원 안팎에선 이들 못지 않게 농단의 핵심 인물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을 꼽는 목소리가 많다. 이 전 실장은 국회와 언론계 등에 발이 넓은 인사로 알려져 있고, 내향적일 것이라는 판사들의 정형화된 이미지와 달리 외향적이고 인간 관계에 적극적인 인물로 알려졌다. 이 전 상임위원은 이와 반대로 특유의 섬세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사법행정을 꼼꼼하게 처리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전해진다.


이들과 법원행정처에서 비슷한 시기에 근무했던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4일 “양 전 대법원장과 두 대법관, 임 전 차장과 사법농단의 큰 그림을 그리고 관련해 조언과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전 실장과 이 전 위원 정도였다”며 “이 전 실장과 이 전 위원이 윗선과 이야기를 끝내면 즉시 실무 판사들에게 지시가 내려오는 구조였던 점을 고려하면, 이 두 명만큼은 단순 전달자가 아닌 농단 그림자의 핵심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양형위원이 지난 해 8월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되고 있다. 연합뉴스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양형위원이 지난 해 8월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되고 있다. 연합뉴스


전직 대법관들 추가 사법처리 가능성도


숨겨진 두 핵심 인물 외엔 이인복ㆍ김용덕ㆍ권순일 전 대법관 등도 기소 가능성이 있다. 이 전 대법관은 중앙선관위원장 재직 당시 통합진보당 재산 국고귀속 소송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김 전 대법관과 권 전 대법관은 강제징용 재판 재상고심을 지연시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다만 검찰은 이미 대법관 2명을 기소선 상에 올려 놓은 점을 감안, 무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고위 법관에 대한 기소는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아직은 검찰의 최종적 정무 판단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인복 전 대법관의 모습. 연합뉴스

이인복 전 대법관의 모습. 연합뉴스


이 밖에 대법원이 사법농단 의혹으로 징계한 △방창현 대전지법 부장판사 △박상언 창원지법 부장판사 △정다주 울산지법 부장판사 △김민수 창원지법 마산지원 부장판사 △시진국 창원지법 통영지원 부장판사 등도 기소 가능 범위 안에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다만 문성호 서울남부지법 판사 등 심의관급 평판사들은 범죄의 고의성이 옅고 지시를 이행한 수준이라는 점 등이 참작돼 사법처리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평판사 중 일부 핵심 인사들은 양 전 대법원장 등 핵심 피의자 조사가 진행될 때마다 최대 7~8번까지 검찰에 반복적으로 참고인으로 불려와 조사를 받긴 했지만, 수사에 적극 협조하며 사법농단의 구조를 밝히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관계자는 “많은 사람에 죄를 묻는 게 우선이 아니라 사법부가 이번 수사를 통해 건전하고 신뢰받는 조직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목표”라며 “양 전 대법원장이 구속되고 사법농단 고리가 어느 정도 구체화된 만큼, 기소 대상을 늘리는 것보다 유죄가 확실한 핵심 인사들을 추려 재판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민변의 탄핵소추 시도, 어느 수준까지?


임성근(왼쪽 여섯 번째) 당시 형사수석 등 서울중앙지법 판사들이 2014년 7월 서울구치소 내 봉제교육장에서 수형자들을 만난 후 구치소 관계자로부터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제공

임성근(왼쪽 여섯 번째) 당시 형사수석 등 서울중앙지법 판사들이 2014년 7월 서울구치소 내 봉제교육장에서 수형자들을 만난 후 구치소 관계자로부터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제공


검찰의 기소 대상 범위 선정과 별개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시도하는 탄핵소추 대상 판사들의 운명도 새로운 관심사다. 현 정권 들어 영향력이 커진 민변이 처벌을 강조하는 인사들이다 보니, 검찰도 이들 주장을 모두 무시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민변이 주축이 된 ‘양승태 사법농단 공동대응 시국회의’는 지난해 10월 권순일 전 대법관과 이규진 이민걸 김민수 박상언 정다주 판사 등을 1차 탄핵 대상자로 발표했다. 발표 당시는 의혹만 있었지만, 이들은 이미 검찰의 기소선상에 오른 상황이다. 탄력을 받은 시국회의는 지난 달 31일 2차 탄핵 대상자 10명을 발표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이상 고위법관으로는 윤성원 인천지방법원장과 임성근ㆍ신광렬ㆍ조한창ㆍ이진만 부장판사가, 일반법관으로 시진국ㆍ문성호ㆍ김종복ㆍ최희준ㆍ나상훈 판사가 이름을 올렸다.


민변은 탄핵소추안에서 임성근ㆍ신광렬ㆍ조한창 부장판사가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행정법원 등의 수석부장으로 일하면서 법원행정처로부터 재판개입 지시를 받고 담당 재판부에 전달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윤 법원장과 이진만 부장판사는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관련 태스크포스(TF)팀 등에서 지휘부 역할을 했다는 게 민변의 주장이다. 일반 법관들은 사법행정권 남용 문건 작성 등에 가담한 횟수가 많거나 헌법재판소 등 기밀 유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소추 대상에 포함됐다.


법조계는 1차 탄핵 대상자 발표 때와 달리 2차 대상자에 대해선 민변 등의 입장을 100% 지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윤성원 법원장은 민변 발표 이후 법원에 전격적으로 사표를 제출하며 민변 주장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와 함께 일했던 대다수 법관들도 “윤 원장에게까지 사법농단의 직접 책임을 묻는다면, 나머지 300명 중 과연 몇 명이나 검찰 수사에 자유로울 수 있겠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법원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사법농단의 가담 정도와 관련해 임 부장판사와 조 부장판사, 시 판사에 대해선 이견이 적을 수 있으나, 나머지 7명의 판사들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며 “죄가 전혀 없다는 게 아니라, 죄를 물을 정도로 고의성이 있었는지, 적극적으로 당시 사법농단 상황을 인지했는지 등을 꼼꼼히 따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도 “1차 탄핵 대상자와 달리 2차 대상자 대부분은 사건 개입 수준과 이행 정도가 비교적 경미하다”며 “민변 등의 문제의식은 알겠지만, 이런 식으로 탄핵 판사들의 숫자를 늘리는 것은 사법 시스템 개혁의 논지를 흐릴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서울중앙지법 성창호 부장판사가 지난해 7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수수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중앙지법 성창호 부장판사가 지난해 7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수수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고 있다. 연합뉴스


성창호ㆍ김연학 부장판사의 운명은?


남은 쟁점은 지난달 30일 김경수 경남지사를 법정구속한 성창호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와 31일 김성호 전 국정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같은 법원 김연학 부장판사에 대한 검찰과 민변의 입장 정리다. 성 부장판사는 2016년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 재직 당시 형사수석부장에게 영장 관련 기밀을 유출한 의혹을, 김 부장판사는 동료 법관에게 우울증이 있다는 허위 사실을 인사자료로 작성한 의혹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 민변은 “단순히 윗 선의 지시에 따른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이라면 탄핵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는 말로 이들 부장판사들의 탄핵 추진 가능성을 시사했다.


검찰은 정치적 폭발력을 지닌 두 부장판사의 처리 문제에서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검찰은 성 부장판사가 양 전 대법원장의 연금을 늘려주기 위해 관련 공무원들을 불러 압박한 정황을 확인했지만, 그 자체로 사법처리를 해야 할지는 “여전히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고 보고 있다. 김 부장판사 역시 인사자료 작성이 통상 업무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법리 검토가 더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성창호ㆍ김연학 부장판사를 사법 처리하면 현 정권 지지자들에게 환영은 받겠지만, 역으로 숨죽이고 있는 법원이 들고 일어서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며 “가뜩이나 최근 들어 행정부와 입법부가 사법부를 지나치게 공격해 상처 입은 법원 입장을 고려하면 검찰이 쉽게 이들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침묵을 지키던 김명수 대법원장도 두 부장판사에 대한 정치 공세가 이어지자 1일 “도를 넘은 법원 공격은 적절하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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