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528150324286


안시성은 어디에 있나?

[고구려사 명장면 97] 

임기환 입력 2020.05.28. 15:03 


안시성은 고구려와 당의 전쟁 역사에서 가장 먼저 기억에 떠올리게 되는 장소이며, 역사 현장이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늘 우리보다 더 열정적으로 안시성과 안시성주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지난 회에 살펴본 바와 같이 안시성주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조선 후기에 널리 퍼지는 계기가 바로 그러했다.


안시성주라는 인물만이 아니라 당 태종과 그의 대군이 패전을 자인하고 물러나야 했던 안시성이란 현장 또한 그들의 깊은 관심 대상이었음이 두말할 나위가 없다. 17세기 초 북경을 오고가던 연행사들이 중국 요녕성 봉성시에 있는 봉황산성을 안시성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봉황성은 중국에 가는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 책문을 통과한 뒤 하루 이틀 머물던 곳이었다. 봉황산 경관이 수려하여 눈길이 절로 가게 될 터인데, 게다가 이곳에 거대한 고구려 봉황산성이 있으니 더욱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곳을 주몽이 나라를 건국한 곳, 즉 고구려 도읍지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7세기 초부터 양만춘이라는 안시성주 이름과 더불어 봉황산성을 안시성으로 보는 인식이 점점 퍼지게 되었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에는 이곳 봉황산성에서 당 태종을 물리친 안시성 역사를 환기함으로써 청에 상처받은 주체적 자존감을 회복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18세기에는 많은 연행사들이 봉황산성에서 고구려 역사와 안시성, 양만춘을 떠올리는 시와 글을 짓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18세기까지 봉황산성이 안시성이라는 인식이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 통설처럼 굳어져 갔지만 이에 대해 의문을 품고 반론을 제기하는 의견도 없지는 않았다. 주로 안시성이 개주성 동북쪽 70리 지점에 있다는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1461)에 의거하여 '안시성=봉황성'설을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연행사들이 사행로를 벗어나기 어려웠기 때문에 봉황산성 외에는 현장을 답사하면서 안시성 위치를 파악할 형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안시성 실제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게다. 오히려 오고가는 길에 마주치게 되는 봉황산성이야말로 안시성의 빛나는 무훈을 기억하고 양만춘이란 영웅의 풍모를 회고하는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봉성의 봉황산성 : 왼쪽의 봉황산과 오른쪽의 고려산이 만나는 계곡 입구가 봉황산성의 남문지이다. /사진=필자


근대에 들어 역사지리학 연구들을 통해 안시성에 대해 새로운 위치 비정이 시도되면서 여러 견해들이 나타났다. 그중에 중국 요녕성 해성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 대석교시 해룡천산성(海龍川山城), 개주시 고려성자산성(高麗城子山城)이 현재까지도 안시성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그중 개주시 고려성자산성은 건안성(建安城)으로 비정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영성자산성과 해룡천산성이 남는데, 그동안은 영성자산성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다만 해성시 영성자산성은 그 규모에서 과연 당태종의 대군을 3개월이나 막을 만한 성곽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연구자들이 적지 않다. 영성자산성은 아직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현장을 일시 조사한 연구자들마다 성곽 규모와 구조에 대한 보고가 제각각이다. 성곽 구조에서도 하나의 성곽으로 보는 견해, 본성의 서북쪽 외곽으로 긴 방어용 성벽이 구축되었다는 견해, 이 외부 성벽이 또하나의 성곽을 이루어 본성과 외성, 즉 복곽식 성곽이라는 견해 등이 있다. 이렇게 성곽 구조를 다르게 파악하기 때문에 전체 성곽 크기도 다르게 보고되고 있다. 대략 본성 규모를 2.7㎞ 정도로 파악하고, 여기에 외부 성벽 혹은 외성 성벽을 더하여 4~4.5㎞ 규모로 파악하기도 한다.


본성 외부로 이어지는 성벽의 존재는 확인되지만, 아직 외성의 존재는 불분명하다. 안시성 전투 기록을 보면 이세적의 군대는 안시성 서쪽, 즉 서문 쪽을 공격하고, 이도종은 동남쪽에서 토산을 구축하며 공격하였다고 하는데, 이 기록이 당시 안시성 구조를 보여주는 기록이 될 수도 있다. 안시성 서북쪽에 외성이 있다고 해도 현재 지형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본성에 비하여 방어상 취약한 상태로 추정되는데, 당군의 공격이 서북쪽에 집중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외성의 존재를 고려하기는 어렵다고 보인다. 어쨌든 현재로서는 보다 본격적인 조사를 기다린 후에야 정확한 상황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안시성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요동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전개될 때에도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요동 일대에서 안시성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짐작케 하는데, 본성을 기준으로 보면 현재 건안성에 비정되는 개주시 고려성자산성 규모와 비교해도 제법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영성자산성을 안시성에 비정하는 데 주저하는 주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목한 산성이 대석교시 해룡천산성이다. 해룡천산성 규모는 중국 측 보고자마다 차이가 있는데, 대략 둘레 3~4㎞ 정도다. 산성 입지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아 서문이 기본 성문이며, 성 내부 경사면이 완만하고 내부가 평탄한 점 등은 영성자산성 입지와도 유사한 면이 있다.


해룡천산성을 안시성으로 주장하는 견해를 보면 이른바 주필산 전투가 벌어진 지형, 지세를 해룡천산성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고, 또 당태종의 대군에 대응하여 항전할 수 있는 10만 대군이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산성 규모가 크며, 무엇보다 산성 동남쪽에 당군이 쌓았다고 하는 인공 토산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사실 주필산 전투가 전개된 지형을 충족하는 곳은 영성자산성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또 영성자산성 동남쪽에도 인공 구조물인 토산을 확인할 수 있다고 그동안 알려져 있었다. 물론 최근에는 이 토산을 자연 지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다시 말해 지형적 요소는 두 산성 입지가 비슷한 점을 고려하면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 어렵다. 다만 해룡천산성 규모가 영성자산성 보다 대형이라는 점에서 보다 유력한 근거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산성 자체 규모나 입지만으로 어느 산성을 안시성으로 확정하기는 곤란한 점이 있다. 이때 고려해야 할 점이 교통로 문제다. 해룡천산성도 교통로상 요처에 해당한다. 수암과 개현으로 이어지는 길이 지나가고 있는데, 대청하를 따라 개주시 방향으로 교통로 연결이 보다 수월한 위치다. 해성 영성자산성은 천산산맥을 넘어 수암으로 이어지는 주 교통로 입구에 해당한다. 그동안에도 영성자산성을 안시성에 비정하는 주된 이유는 바로 이점이었다. 요동성을 장악한 당군이 고구려 영역 내부 압록강 방면으로 연결되는 또 다른 교통로를 확보하려는 전략에서 보면 역시 해성 영성자산성이 최적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요동성으로 철군할 때 2~3일 걸렸다는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정호섭 교수가 지적한 바 있다. 전근대 시대에 일반적으로 하루 행군거리는 최대 30㎞ 내외다. 물론 상황에 따라 더 먼 거리를 이동할 수도 있으며, 통상 행군 거리를 20㎞ 이하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당시 당군 철군 상황을 보면 안시성은 요동성에서 대략 60㎞ 범위 정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위치는 해성시 영성자산성이다.


또 다른 근거도 있다. 당 태종과 군신들이 7월 초에 안시성을 공격할 것인지 아니면 오골성으로 직행할 것인지를 놓고 작전회의를 할 때, 군신들이 "비사성에 있는 장량의 군대를 부르면 2일만 자고 도착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장량은 개전 초에 수군 4만여 명으로 비사성(대련시 대흑산산성)을 함락시켜 장악하였다. 하지만 이때 장량이 비사성에 있다는 발언은 착오다. 당시 당군 지휘부는 건안성을 공격하고 있던 장검의 군대를 안시성으로 불러들이고 장량으로 하여금 대신하도록 해서, 당시 장량은 건안성 일대에 머물고 있었다. 대련의 비사성에서 해성시 영성자산성이나 대석교시 해룡천산성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 어느 곳이든 결코 2~3일 행군거리가 아니다.


정리하자면 건안성으로 비정되는 개주시 고려성자산성에서 2~3일 거리이며, 요동성에서 2~3일 거리인 위치, 즉 지금 요양시과 개주시 중간쯤 되는 위치에 있는 산성은 바로 해성시 영성자산성이다.


안시성 성문 입구 성벽 /사진=필자


필자는 1990년대 중반 해성시 영성자산성, 즉 안시성을 탐방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시성에 대한 출입 통제가 없었다. 성안 마을은 평온했으며 복사꽃이 만발한 성안은 봄의 햇살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성벽을 한 바퀴 도는 답사는 가시나무가 우거져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장엄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안시성을 탐방하는 그때의 두근거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성문 입구 쪽 성벽 윗부분에는 둥근 공 모양 석포환이 박힌 채로 남아 있었다. 아마 당군의 투석기에서 날아와 성벽을 강타했던 수도 없는 돌덩어리 중 하나가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 석포환으로 인해 문득 안시성 전투의 현장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그 오랜 세월 속에서도 육중하게 버티고 있는 성벽을 바라보며 당시 처절한 전투를 머리에 그려보려 했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에게 안시성은 처절한 전쟁의 현장이 아니라 후대인들이 그저 자랑스러운 승리를 환기하고 기억하는 추상적인 공간이었을 뿐이었다.


필자는 영화 '킹덤 오브 헤븐'(2005년)의 공성전과 양측 간 협정 과정을 보면서 안시성 전투의 긴 공방전이 절로 떠올랐다. 안시성 전투의 '현실'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싶은 분은 대규모 공성전을 정말 실감나게 그리고 있는 이 영화를 한번 보시기를 권한다.


양군이 쏘는 화살이 빗발처럼 상대 측에 쏟아지고, 투석기를 떠난 돌들이 허공을 가르고, 함성과 비명이 안시성 안팎 사방에 가득 넘쳐나는 격렬한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졌을 것이다. 말이 쉬워 90일이고 석 달이지, 생각해 보시라. 어마어마한 적의 대군이 사방을 둘러싸고 쉼없이 공격을 퍼부어댔으니 매일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안시성 성주와 군사와 주민들의 혹독했을 삶을.


안시성 전투는 그 승리만을 기억하는 역사의 한 장면이 결코 아니다. 승자든 패자든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치러야 했던 그 참혹했던 현실을 기억함으로써 전쟁의 참화를 성찰하는 교훈의 현장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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