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301.html


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명문가의 만주 집단 망명…옹색한 푯돌·흉상

이회영·이시영 6형제 옛 집터

등록 : 2018-04-19 14:41


구한말 명동 일대 6천 평 땅에 모여 살던 이조판서의 아들 6형제

막대한 재산 다 처분하지 못한 채 1910년 급하게 만주로 독립운동행, 이상재 “6형제 결의 전무후무”

아버지 거지 생활에 충격받은 조카의 밀고로 우당, 체포·옥사

구국지사에 대한 예의는 초라해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 명동문화공원이 생겼다. 중앙극장 등을 헐고 대신증권 본점이 들어서면서 생긴 자투리땅에 들어섰다.


서울 중구 명동1가 1의3 이회영·이시영 6형제 옛 집터를 찾아 떠난다. 명동성당 앞 한국YWCA 회관과 NH농협 명동지점 사이 명동11길을 따라 50m쯤 내려가다 보면 서울YWCA 앞 오른쪽 화단에 푯돌이 있다.


명동11길은 2007년 ‘명동 우당길’이 됐다. 명동성당과 가톨릭회관, 향린교회와 한국YWCA가 버티고 있는 명동의 종교 성지에 둘러싸인 곳이다. 푯돌 옆에 우당 이회영 선생의 흉상이 있어 눈에 잘 띈다. 판석형 푯돌은 2002년 12월 서울시가, 흉상은 2014년 2월 서울 중구청이 우당기념관에서 기증받아 세웠다. 달랑 푯돌 하나만 놓인 다른 문화유적지에 비하면 그래도 낫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엄청난 푸대접이다.


푯돌과 흉상은 각 하나지만 이 스토리의 주인공은 ‘6형제’다. 바로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아들 6명이다. 첫째 이건영(1853~1940), 둘째 이석영(1855~1934), 셋째 이철영(1863~1925), 넷째 이회영(1867~1932), 다섯째 이시영(1869~1953), 여섯째 이호영(1875~1933)이다. 생몰연대만 훑어봐도 세기말 삶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우당 6형제가 지도를 펴놓고 집단 망명을 논의하는 장면을 그린 상상화.


이들 형제 가솔은 나라가 망한 1910년 겨울, 명동 집을 떠나 동토인 만주로 떠났다. 식민지 국민이 되기를 거부하고 집단 망명의 길을 택했다. 망명을 주도했던 넷째 이회영은 옥사했고, 다섯째 이시영은 해방 후 귀국해서 초대 부통령을 지냈지만, 나머지 형제들은 타국에서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적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의 실천이었다. 이들 일가족이 있기에 우리 독립운동사가 부끄럽지 않다.


월남 이상재는 “동서 역사상 망할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가족 4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히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의 형제는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오래도록 부는 맑은 바람)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고 예찬했다.


우당 이회영을 기리는 우당기념사업회가 펴낸 자료집 <우당 이회영, 애국의 길을 묻다>에 보면 6형제는 구한말 명례방 저동 65통11호 등 지금의 명동 한국YWCA와 서울YWCA 일대 6천여 평에 모여 살았다. 6형제가 만주로 망명하자 일제는 집과 토지를 빼앗아 일본 애국부인회에 넘겼고, 애국부인회는 일본YWCA 경성본부에 기증했다. 해방 후 한국YWCA 소유가 됐다. 미처 처분하지 못한 명동 다른 땅을 비롯해 개성, 장단, 양주, 충주에 흩어져 있는 여의도 면적 3배 넓이의 금싸라기 일가 땅이 총독부 토지조사를 거쳐 몽땅 몰수됐다.


우당의 부인 이은숙이 1966년 펴낸 자서전 <서간도 시종기>(西間島始終記)에 보면 “여러 형제분이 비밀리에 전답과 가옥·부동산을 팔았는데 여러 집이 일시에 급매하다 보니 제값을 받을 수 없었다”고 했다. 한 달가량 걸려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돈은 40여만원. 당시 3원이던 쌀 한 섬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대략 600억원의 거금이었다.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양자로 입적한 둘째 이석영은 물려받은 2만 섬 재산을 처분해 이주 자금을 댔다. 이유원은 서촌 필운대 이항복의 옛 집터에 암각 시를 남긴 사람이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양주에 별장이 있는데, 서울에서 왕래하는 80리 길이 모두 그의 밭두렁이라 다른 사람 땅은 단 한 평도 밟지 않고 다녔다”고 썼다.


평안도 관찰사, 한성재판소장을 지낸 다섯째 시영을 비롯해 다른 형제들도 기꺼이 따랐다.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10명의 재상을 배출한 조선 명문가가 만주로 옮겨갔다는 소식은 항일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다. 이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향후 10년 동안 3천여 명의 정예군을 배출했다. 김좌진·이청천·이범석 장군도 생도 또는 교관을 지냈다. 이들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충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등으로 맹활약했다.



<우당 이회영 실기>에서 이회영은 “사람들은 우리를 공신의 후예라 한다. 괴변으로 한반도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명문 호족으로서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지 않고 구차히 생명을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왜적과 혈투하시던 조상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하니…” 라고 형제들을 설득했다.


1932년 11월, 중국 상하이에서 다롄행 여객선을 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우당은 기다리고 있던 일경에 체포돼 뤼순(여순) 감옥에서 고문사했다. 밀고자는 형 이석영의 아들 이규서였다. 조선의 갑부였던 아버지가 상하이 빈민가에서 거지 생활로 연명하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조카의 밀고로 유명을 달리한 이회영의 남은 가족은 아내 이은숙이 옷을 수선해 번 돈으로 연명했다. 이회영 부부는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합장됐다. 안중근과 마찬가지로 시신 없는 헛무덤이다. 입신한 후예들이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우당기념관을 마련했다. 이시영은 서울 강북구 수유동 애국순국선열 묘역에 묻혔고, 남산 백범광장에 김구와 함께 동상으로 남았다.


이회영·이시영 6형제 생가 터 앞 명동길은 예부터 ‘북고개’(종현) 혹은 ‘북달재’라 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양호가 이 고개에 진을 쳤는데 남대문 종을 가져다가 달았다. 1619년 종로의 종각이 복원될 때까지 파루(오전 4시)와 인경(밤 10시)을 이곳에서 알렸다. 종현이나 북달재라는 지명이 여기서 비롯됐다. 이 시기 남산 아래 명동 일대가 종로와 맞먹는 번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반경 100여m 주변에는 고산 윤선도 집터와 이재명 의사 의거 터 푯돌, 나석주 의사의 의거 터 푯돌과 동상이 몰려 있다.


남산에서 바라본 경성 시가의 모습이 담긴 기념엽서. 오른쪽 우뚝선 건물이 명동성당이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고산의 옛 집터는 우당 6형제 집터와 맞물린다. 우당 형제가 명례방 종현에 터를 잡기 300년 전, 이 땅의 임자는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 고산 윤선도의 집이었다. 고산은 20년 유배 생활과 19년 은거 생활을 했지만 서해와 남해의 바닷길을 주름잡는 해운선단을 거느린 당대의 대부호였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불운했지만,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를 노래하면서 유유자적했다.


윤선도의 종현 집터 일부 작은 집에 정약용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산은 다산의 6대 외조부이다. 22살 때 성균관에 입학한 다산은 집 이름을 ‘누산정사’라고 짓고 정조 재임기 정치적 황금기를 누린 뒤, 39살 때 남양주로 낙향할 때까지 살았다. 다산의 청장년기가 고스란히 담긴 서울 명동에서 흔적 한 점 찾을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윤선도 집터


고산 집터를 알리는 푯돌은 한국YWCA연합회 회관 건물 앞에 반듯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유명 커피전문점이 대로변에 들어서면서 구석으로 밀려났다. 푯돌 앞은 배달 오토바이나 자전거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이곳에 다산 집터 푯돌을 따로 세우든지 아니면 고산 집터 푯돌에 병기라도 했으면 한다.


이회영 6형제의 결기와 행적은 로댕의 조각품 ‘칼레의 시민’ 속 프랑스 칼레의 사회지도층 6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능가하는 위국 헌신의 표상이다. 푯돌 한 점, 흉상 한 개로 기리기에는 너무 옹색하다. 조선 최고의 금싸라기 땅과 재산을 버리고 만주로 떠난 구국지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칼레의 시민급 조각상을 명동 한복판에 세워 6형제를 기리는 게 우리의 도리가 아닐까.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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