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81327.html?_fr=mt2


[1919한겨레] 적국의 심장부, 조선인 유학생 ‘열화 같은 독립만세’ 외치었다

등록 :2019-02-08 09:50 수정 :2019-02-08 09:53


[2·8 독립선언 100돌] 

400여명 기청회관서 ‘조선청년독립단’ 발족 선언

이어 독립선언서 읽어가자 장내에는 절로 함성 


재동경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서 국문본. 독립기념관 제공


[1919년 2월8일 동경/엄지원 기자]


약속 장소에는 벌써부터 일본 쪽의 사복경찰과 정복경찰 수십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오전 10시 무렵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 국회 양원 의원들과 대신들, 각국 대사와 공사들에게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보낸 사실이 보고된 모양이었다. 학생들 쪽도 마찬가지다. ‘거사’가 예정된 것은 오후 2시인데도 정오 무렵 동경 신전(간다)구 조선기독교청년회관(기청회관)은 이미 여학생을 포함한 400여명의 학생들로 가득하여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재일본동경유학생학우회(학우회) 임원선거 총회를 내세워 소집한 자리였지만 총회 따위를 기대하고 모인 이는 없는 듯하였다. 모여든 조선 청년들의 눈은 흥분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2월 동경 날씨에 맞지 않게 펄펄 나리는 눈은 장내에 기묘한 기운을 더하였다.


“오늘 일이 끝나면 아홉 사람의 대표는 반드시 기소되겠지요. 반란죄로 몰릴까요? 모두 학생 신분이라는 점에서 관대히 해준다면 4~5년 정도가 아닐는지요.” 취재를 위해 기청회관을 찾은 기자를 보고 최승만(22)씨가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이날 예고된 유학생 독립선언에 대표로 이름을 올린 조선청년독립단 동지들을 염려하는 표정이었다. 최팔용·이종근·김도연·송계백·이광수·최근우·김철수·김상덕·백관수·서춘·윤창석 등 11명의 조선청년독립단원 중 이광수(27)·최근우(22) 양씨는 상해 방면 등으로 유학생 독립선언 소식을 타전하려 이미 일본을 뜬 상태다. 최씨는 대표단이 체포되면 나서서 ‘후사’를 도모하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하루 앞선 7일 밤 백관수(30) 조선청년독립단 단장은 조도전(와세다)대학 앞 본인 자취방에 동지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은 내일 다 붙들려 갈 것이요. 또 언제 나오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니 여러분들은 우리의 뒤를 이어 잘 일 해주시오.” 최씨는 그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국민의 일원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언제든지 한번은 죽을 인간이니 이러한 숭고한 일에 목숨을 바친다는 일이 오히려 영광”이라고 하였다.


이윽고 시곗바늘이 오후 2시를 가리켰다. 학우회장 백남규(28)씨가 개회를 선언했다. 개회 선언과 동시에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학우회 기관지 <학지광> 편집장 최팔용(28)씨가 개회 동의에 이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했다. 장내의 청년들은 박수와 함께 환성을 질러댔다. 백관수씨가 뒤를 이어 뛰어 올라갔다. “합병 이래 일본 조선통치 정책을 보건대 합병시의 선언에 반하여 오족(우리 민족)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 정복자가 피정복자에 대한 고대의 비인도적 정책을 습용(답습)하여 오족에게 참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을 불허하며 심지어 신교의 자유, 직업의 자유까지도 불소히(적지 않게) 구속하며 행정, 사법, 경찰 등 제기관이 조선민족의 사권까지도 침해하며 공사간에 오인과 일본과의 우열의 차별을 설하며…오족의 신성한 역사적 전통과 위엄을 파괴하고 능모(능멸)하고….” 백씨가 독립선언서를 읽어내려가는 동안 유인물을 손에 쥔 장내 유학생들의 입에서는 절로 “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2·8동경 유학생 독립선언의 주역인 최팔용·윤창석·김철수·백관수·서춘·김도연·송계백(가운데 줄 왼쪽부터). 일본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 제공


상해로 떠난 이광수씨와, 유학생 가운데 내로라할 웅변가들이 며칠씩 합숙하며 머리를 맞대어 쓴 선언서와 결의문은 구절구절 명문이었다. 억눌려온 식민지 청년들의 심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김도연씨의 결의문 낭독, 서춘씨의 웅변까지 이어지며 장내 분위기가 과열되자 일경은 계획된 절차에 착수했다. 오후 4시가 가까워질 무렵, 때를 기다려온 일경의 ‘해산명령’과 함께 진압이 시작되었다. 이미 격분할 대로 격분한 학생들이 순순히 흩어질 리 없었다. 그러나 소리 지르며 대항하는 것뿐 달리 무기를 갖지 못한 조선 청년들이었다. 일경을 상대로 ‘혈전’을 벌일 수단이 그들에겐 없었다. 달아나려는 조선 청년들과 체포하려는 일경이 서로에게 목재 의자를 집어던지는 바람에 장내는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선인을 잡으라고 가장 크게 고함을 지르는 이는 일경의 밀정으로 유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한 선우갑(26)씨였다. “이놈 잡아라! 저놈 잡아라!” 동년배 조선 청년들의 용기에 동조하기는커녕 노골적으로 일본의 주구 노릇을 하는 선우갑의 모습에 유학생들은 소란 속에서도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의 활약 덕분인지 일경은 이날 독립선언 사건 현장에 있던 조선청년독립단 전원을 포함한 주동자 20여명을 붙들 수 있었다. 백설이 흩뿌리던 8일 오후, 조선 청년들은 조국의 독립을 ‘선언’했다는 이유만으로 빨간 피를 흩뿌리며 서신전(니시간다) 경찰서로 끌려갔다. 총 한 자루, 나무토막 하나도 들려있지 않았던 이들의 선언은 조선 반도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일본 정부의 대응은 유학생 독립선언의 파장을 짐작하게 한다.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사건은 어떤 사건보다 속전속결로 처리된다. 이틀 뒤인 10일 경찰은 주동자 11명을 출판법 위반으로 동경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송치하고, 1심 법원은 15일 최팔용씨 등에 징역 1년형의 선고를 내린다.


△주요 참고문헌 


최승만, <2·8독립선언과 관동진재의 실상과 사적 의의>(기독교문화사·1984) 

백남훈, <나의 일생>(신현실사·1973)

김도연, <나의 인생백서>(삼성문화사·1965)

<독립운동사자료집13: 학생독립운동사자료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1977)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