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Balhea/11.htm

발해국의 주민구성 : 서론 및 결론 - 한규철                        http://tadream.tistory.com/269
발해국의 주민구성 : 1. 종족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 한규철  http://tadream.tistory.com/271
발해국의 주민구성 : 2. 언어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 한규철  http://tadream.tistory.com/270 
발해국의 주민구성 : 3. 문화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 한규철  http://tadream.tistory.com/272


발해국의 주민구성 : 1. 종족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靺鞨' 기록이 문제가 많다는 점은 이미 여러 선학들에 의해 줄곧 제기되어 왔다. 우선 말갈족의 단일계통설에 대한 비판은 중국학계에서부터 있어 왔다. 즉, 읍루는 숙신의 일부라는 주장이 청대 지리학자인 丁謙에 의해 논증되어 馮家昇에 의해 지지를 받았고, 최근에는 薛虹이 이를 지지하고 있다. 더 나아가 숙신과 읍루는 그 계통이 전혀 다르다는 傅斯年, 李學智 등의 주장도 제시되어 있고, 일본의 池內宏과 한국의 리지린, 김정학 등도 이와 같은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숙신을 읍루의 선조로 보는 단일계통설은 여전히 楊保隆 등에 의해 강력히 주장되어 묵시적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말갈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는 정약용의 거짓말갈(僞靺鞨)說이 있고, 말갈이 단일 종족명이 아니라 몇 개의 종족에 대한 總稱이었다는 說(日野開三郞, 孫進己), 그리고 말갈이 濊 또는 濊貊系였다는 주장들(日野開三郞, 孫進己, 權五重)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 제기가 있게 된 것은 말갈이 살았던 곳이 과거 그들의 조상이라고 하는 흑룡강중하류의 숙신 등에 비해 남북만주 지역에서 한반도까지를 포함하여, 과거 예맥 및 부여, 옥저등이 살았던 곳과 상당부분 중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숙신족의 남하로 인한 말갈의 번성이라고만 볼 수 없는 문제이다.

필자도 선학들의 연구에 힘입어 따져본 결과 말갈의 단일계통설과 아울러 발해의 이원적 주민구성론이 문제가 있다고 단정을 내릴 수 있었다. 즉, 말갈의 조상으로 알려진 肅愼도 우리가 흔히 언급하는 흑룡강 중하류의 肅愼, 고조선과 계통을 같이 하는 남만주의 肅愼이 있으며, 말갈로 기록되는 주민들도 흑수말갈만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말갈은 예맥의 고구려계였다. 다시 말해, 흑수말갈을 제외하고, 발해건국의 주체가 되었던 송화강유역 주민[粟末靺鞨]과 백두산유역 주민[白山靺鞨] 등은 모두가 고구려유민이었다. 따라서 발해국의 주민은 고구려유민과 말갈의 이중적 구성이 아니라, 고구려유민을 중심이었다.

발해주민의 고구려유민설은 북한에서도 주장되고 있다. 북한의 발해주민 구성에 관한 논의는 말갈 기록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으나, 발해의 주민들이 대개가 고구려유민이었다고 한다. 즉, 장국종은 종래 박시형설인 소수의 고구려유민(40%정도)과 다수의 말갈(60%정도)설을 따르지 않고 다수 주민의 고구려인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와 같은 문헌적 근거로는 말갈이 고구려와 다른 이민족이었다면, 거란의 남북원제도와 같이 이들을 다스리는 특별제도가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것이 없이 200여년간 유지되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말갈'이 살았던 지역에는 고구려계로 볼 수 있는 예맥, 옥저 등이 포함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숙신 그것도 흑룡강중하류의 숙신만을 의식해서 발해의 주민구성을 고구려유민과 말갈의 이원론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중국인들의 만주지역사에 대한 기록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더욱 자세히 기록되고 있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만주사의 새로운 변화에 발견에 기인하다 보다 기록자의 지식이 확대되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즉, 黑龍江 中下流 地域 주민들로 알려져 있으면서 말갈의 조상들로 알려진 肅愼에 대한 역사적 실상은 晋代에 그 실마리를 찾고({三國志}卷30, [東夷傳]의 읍루]), 隋·唐代에 가서야 비로소 중국측 기록에 자세히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晋書}卷97, [四夷,東夷傳]의 肅愼, {隋書}卷81, [東夷列傳]의 靺鞨). 그러나 문제의 말갈은 唐代의 {隋書}[東夷列傳]에 처음 고구려 등과 함께 立傳되었으나, 그 이후의 {舊唐書}(後晋) 등에는 [東夷列傳]이 아닌 [北狄列傳]으로 그 분류방식이 크게 달라졌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기록상의 변화는 어디까지나 중국측의 일방적인 분류방식이었던 것이지, '靺鞨'인 자신들의 종족적 변화가 아니었다. 아울러 이러한 기록상의 중국중심적 원칙은 말갈의 단일계통설에도 적용되었다. 즉, 만주 주민들이 秦 이전에는 스스로 肅愼이라고 하다가 漢代에는 읍루, 後魏(元魏)代에는 勿吉, 隋·唐代에는 靺鞨이라 그들 종족 이름을 고쳐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변화가 아닌 중국측의 일방적인 인식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중국중심적 세계관이 확립되고 있던 唐代인들은 만주 전 지역 주민들을 말갈이라 汎稱하였다는 것이다.

발해가 중국측 기록에 처음 입전되는 {舊唐書}(後晋, 945)는 [北狄列傳]에 '渤海靺鞨'과 '靺鞨' 등을 싣고 있다. 공식적인 '渤海'를 '渤海靺鞨'로, 그리고 黑水靺鞨을 '靺鞨'로 입전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舊唐書}보다 115년 늦은 宋代에 편찬된 {新唐書}(1060)는 [北狄列傳]에 '渤海'와 '黑水靺鞨'을 입전시켜 발해에 대한 입장을 달리하였다. 즉, 이것은 발해를 말갈로 인식하지 않고 '渤海國'으로 인식하였음을 반영한다. 이와 같이 중국측의 발해와 흑수말갈에 대한 기록상의 변화는 발해사의 변화에 기인했던 것이 아니라, 사서 편찬시대 지성들의 역사인식에 의거하였다. 발해인들이 스스로 '말갈'에서 '발해'로 그 명칭을 바꾸어 갔던 것이 아니다. 발해를 말갈이라 칭했던 것은 발해건국 직후 당의 일방적인 칭호였고, 그 이후 두 나라 관계가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발해라는 국호가 정식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말갈이란 중국측의 일방적 호칭으로써 존칭이 아닌 그들의 동북방 주민(종족)에 대한 卑稱이었다. 사서에 발해를 '靺鞨'이나 '渤海靺鞨'로 썼던 것은 '말갈'인들이 세운 발해로서의 표현방식의 차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우호 내지 대립관계에 대한 인식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예는 신라측의 기록도 마찬가지로써 신라인들은 발해를 '발해'로 부르지 않고 대개 '발해말갈'이나 '말갈'이라 하였다.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족 및 발해족의 형성을 언급한다. 이러한 이론적 근거는 고구려와 발해가 왕실을 세워 700여년 또는 200여년을 거치면서 새로운 종족으로 형성되어 나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발해족이란 다수의 말갈인들이 중심이 되어 새롭게 형성한 종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종족 형성론은 고구려나 발해족의 형성과정에서 그들은 하나의 역사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거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라면, 700년이 넘게 존재하였던 고구려지역에서는 고구려족이 형성되었다고 해야 한다. 아울러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발해가 세워져 발해족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곧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족 형성 부족이었던 부여, 옥저등이 언어·문화적인 측면 등에서도 같은 계열이었다고 중국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고구려족의 형성에 논의의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발해족의 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발해족이란 숙신계의 말갈이 주체가 되어 예맥계의 예맥, 부여, 옥저, 고구려족을 일부 흡수하여 漢化한 민족공동체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고구려족은 고구려가 성립할 당시의 일개 고구려족이었던 것이지 700여년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형성된 고구려족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唐書}등에 '濊貊故地', '高句麗故地'등이 구별되어 나오는 것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말갈인들만이 살았다고 해야할 '肅愼故地'도 함께 나온다는 점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것 같다. 단지, 孫進己 등이 말갈의 종족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을 정도이다.

발해족의 형성과정 즉, 발해의 주민구성에서 다수로 언급되고 있는 말갈의 존재는 정식으로 {隋書}[東夷列傳]에 立傳되었다. 이에 의하면, 말갈은 粟末部, 白山部, 安車骨部, 號室部, 拂涅部, 伯?部, 黑水部 등의 7부로 구성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기록은 고구려와 말갈은 결코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없다는 논거로 이용되어 오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같은 {隋書}'東夷列傳'에 말갈과 대등하게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함께 입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黑水部 이외의 말갈지역은 과거 예맥 및 부여, 옥저등이 살았던 곳과 대부분 중복되고, 발해시대에는 모두가 발해가 되었던 곳이다. 그렇다면, 산동 및 요동지역의 숙신과 남만주의 예맥, 그리고 옥저 등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가? 楊保隆 등의 주장대로 하자면, 이들은 대개 한반도 북부로 이동하였고, 흑수지역의 숙신이 남하하여 번성한 말갈들로 가득차다 되었다는 것이다(한반도남하설, 민족이동설). 그들은 이른바 고구려족이 되지도 않고 말갈족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지역은 농경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곳으로써 그토록 민족의 교체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리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종족명의 변화가 그 지역사의 변화에 기인했던 것이 아니라, 중국측 기록자들의 지식확대와 인식변화에 따른 면이 강했다. 따라서 남만주 지역에 넓게 퍼져있던 예맥, 옥저 등이 결코 모두가 한반도 등으로 남하했다고는 볼 수 없다. 예맥계 주민의 명칭이 다르게 불리워졌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만주지역 주민을 통칭하여 불렀던 '말갈'이라는 종족명은 별 의미가 없고, 粟末, 白山, 黑水人과 같이 앞의 지역 이름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요컨대 粟末靺鞨(粟末部 靺鞨)이란 松花江流域 주민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어, {新唐書}에 나오는 粟末靺鞨 大祚榮이란 송화강 출신 대조영이란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종족으로 존재하다가, 隋·唐代에 와서 말갈족으로 그 종족명이 일원화되면서 백산부 말갈이니 속말부 말갈 등으로 차별화되고 있는 것은 민족이동이 아닌 역사인식의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말갈의 문제에서 또 하나 짚고 넘어 가야 할 문제는 {三國史記}의 말갈이다. 즉, 중국측 말갈이 {北齊書}[武成帝紀]에서는 河淸 2年(563)에 처음 나오는 것에 반하여, {三國史記}에서는 東明聖王 원년(B.C.37)부터 景明王 5年(A.D.921)까지에 걸쳐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측 기록과도 같은 말갈이 그대로 전제되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唐書} 등 다른 어떤 곳에도 없는 말갈이 수처에 나오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결론을 말자면, 이곳의 말갈은 대개가 고구려나 백제의 변방주민들에 대한 卑稱에서 연유한 것이다. 전근대인들이 都城 중심의 지배층을 '國人'이라 하였던 예가 말갈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三國史記}에 보이는 바와 같이, 慶州가 新羅의 다른 이름으로 쓰였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사실을 고구려에 미루어 보면, 고구려사람 하면 평양 중심이었지 않았을까 한다. 이러한 왕조중심적 차별의식은 결국 {三國史記}가 말갈을 B.C년간부터 10세기까지 삼국의 변방주민들로 등장시켰던 것이 아닌가 한다.

요컨대, 발해건국의 주체가 되었던 속말인(속말말갈)과 백산인(흑수말갈) 등의 종족적 계통은 고구려인과 같은 예맥계였으며, 이들을 말갈로 기록하였던 것은 중국인들의 만주주민들에 대한 卑稱이자, 고구려 피지배주민들을 도성중심의 고구려인과 구별하여 기록하였던 결과였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