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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1> 대조영이 야망을 꿈꾸던 땅 차오양
고구려 부흥을 향한 지혜가 싹튼 곳
초린과 숙영공주 역사기록 없어 
'고씨' 고구려 '대씨' 발해로 정치 순환 
부산일보 | 20면 | 입력시간: 2007-01-06 [16:41:52] 

차오양 근교 봉황산(鳳凰山)에 있는 요나라(遼代)의 마운탑(摩雲塔). 높이 37m의 13층 방형 벽돌탑으로 요에 귀화한 발해 지배층 유민들도 참가하여 조영되었을 것이다.

잊혀진 역사 발해사를 찾아 나선다. 발해사 찾기는 우리 역사의 경계와 지평을 잃어버린 왕국의 기억이 서린 만주 요동 연해주까지 넓혀나갈 것이다. '궁금하면 두드려라'는 말이 있다. 그 궁금증 앞에서 이 기획은 발해사를 활짝 여는 문이 될 것이다.

고구려의 청년 장수 대조영은 초린과 숙영 중에서 과연 누구를 선택하여 황후로 삼을 것인가. 요즈음 인기있는 TV 사극 '대조영'을 보는 이들의 관심이다. 이와 관련하여 자주 접하는 질문은 과연 초린과 숙영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등이다. 대조영에게 여인이 있었겠지만 초린과 숙영공주에 대한 기록은 없다.

발해 초대 고왕 대조영은 청춘기를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朝陽)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가 결혼하고 고구려 부흥의 꿈을 왕성히 피우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을 것이다. 차오양은 당시 영주(營州)로 불리던 곳으로 고구려가 멸망하고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 등이 고구려에서 669년경 옮겨와 696년 탈출하여 발해를 건국(698년)하기까지 27년 간 살던 곳이다. 대조영의 아들 제2대 무왕도 차오양에서 태어났을 개연성이 크다.

차오양이 발해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곳으로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곳은 고구려 부흥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한 곳이자,발해 멸망 후로는 지식층 유민들이 요나라 문화의 발전을 위해 활약하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요나라 불교유적에는 발해유민들의 열정과 지혜가 담겨있을 것이다.

발해국은 고구려 장수 출신의 대조영 등에 의해 698년 건국되어 926년 멸망할 때까지 15대왕 228년간을 유지했던 왕조이다. 그 영토는 지금의 북한지역과 중국 3성으로 불리는 지린성(吉林省),헤이룽장성(黑龍江省),랴오닝성 일부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남부로 고구려의 영역에서 동북으로 좀 넓어진 형세였다.

필자가 차오양을 처음 답사한 것은 1997년 8월 이곳과 인접한 푸신(阜新) 지역을 순회하며 개최된 3박4일간에 걸친 요금거란사연구회 주최의 발표 때였다. 초청자는 중국 동북민족역사학자이자 동북공정 이론가인 선양(瀋陽)의 쑨진지 선생이었다. 발표 주제는 '고려 내투·내왕 거란인'으로 고려에 투항하거나 왕래한 거란인 상당수는 발해유민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외국인으로는 나 혼자서 베이징 등 중국 각지에서 온 50여 명의 참석자들과 두 도시 유적을 순회하며 발표와 토론을 하였던 것이 인상 깊었다. 첫날과 둘째날은 푸신에서 그리고 다음날은 차오양에서 보냈다. 차오양에서도 요대(遼代)의 마운탑(摩雲塔)이 있는 봉황산 기슭의 운접사(雲接寺)와 차오양 시내의 연도빈관(燕都賓館) 등이 행사장으로 사용되었다. 토론회에서는 발해가 과연 어느 민족의 역사인가,하는 민감한 질문도 나에게 던져져 잠시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지만 우호적인 분위기는 유지되었다.

차오양은 고구려가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많은 유민들이 강제로 이주되었던 곳이다. 당나라는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이듬해부터 평양과 요동지역의 민호(民戶) 3만8천200호 약 15만명을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하였다고 하는데,사극에서 대중상으로 묘사되는 걸걸중상도 그 한 세력에 속했다. 강제 이주세력에는 이외에도 대조영과 함께 건국 길에 올랐다가 전사한 걸사비우(乞四比羽)나 안서도호부 고선지장군(?~755),그리고 이 지역의 지방장관이 되어 당조정까지 위협하였던 이정기(732~781)의 선조 등이 있었다.

그런데 거란의 이진충(李盡忠)과 이해고(李楷固)도 바로 이곳 차오양에서 대조영과 함께하고 있었다. 사극이 대조영의 첫사랑을 이진충의 딸인 초린으로 등장시킨 것도 바로 영주에서의 동거를 염두에 둔 설정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이진충은 발해가 건국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장본인이었다. 당나라 영주도독 조문홰의 학정에 분을 품고 그를 살해하면서 촉발된 '이진충의 난'(696~697),즉 '영주의 난'이 발해 건국의 도화선이 되었다.

'구당서'(940~945년 편찬) 북적열전 발해전은 대조영의 영주에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가속을 이끌고 영주로 옮겨가 살았다. 만세통천연간(696~697)에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니,대조영이 말갈의 걸사비우와 함께 각각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차지하고 수비를 굳혔다.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가 우옥검위대장군 이해고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 남은 무리를 토벌케 하니 먼저 걸사비우를 무찔러 죽이고 또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대조영을 바짝 뒤쫓았다. 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연합하여 이해고에게 항거하자 왕의 군대가 크게 패하고 이해고는 탈출하여 돌아왔다… (대조영은)성력 연간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에 올랐다"고 전한다.

이 기록을 보자면 영주 즉 차오양에서는 대조영과 이진충,그리고 걸사비우가 함께 당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진충에게 영주는 본거지였다. 거란의 발상지는 지금의 중국 내몽고 츠펑(赤峰)시 관할 서요하(西遼河)의 상류인 시라무렌(西拉木倫) 강 유역이고,몽골인들은 지금도 거란이 그들의 조상이었다고 믿고 있다.

이진충이 반기를 든 것은 이러한 지역 기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남 손만영(孫萬榮)과 함께 모두 죽임을 당하고 실패하였다. 그러나 대조영의 고구려부흥은 성공하였다. 발해가 건국된 것은 요동 등에서 아직도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과 영주의 지도자 대조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진충의 반란을 유도한 것은 바로 대조영 세력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검모잠을 중심으로 평양 지역에서 일어났던 고구려부흥운동은 실패하였다. 그러나 망명의 차오양에서 고구려부흥 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대조영과 고구려 유민들이 토대가 되어 세워진 발해국은 성공하였다. 30년간의 공백이 있었지만 고씨 고구려에서 대씨 발해로의 정치 순환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푸신에서 몽골인들의 혼인잔치에 초대되었던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들은 중국식의 멸시적인 '몽고'라는 이름을 꺼리고 칭기스칸의 후예인 '몽골'인임을 자부한다. 결혼식은 서양식 드레스를 입고 진행되었으나 축하연은 몽골문화 그대로를 보여줬다. 한국인들에 대한 몽골인들의 정서가 우호적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마침 당시 중국에서 인기가 있었던 프로축구에서 100만도 안된다는 조선족의 연변 오동팀이 성 대표들을 누르고 상위권에 진입하고 있었던 것도 한국인을 더욱 극진히 대접한 이유였다. 연변 오동팀은 조선족의 대표가 아니라 중국 55개 소수민족의 대표였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를 염두에 둔 것으로 오동팀의 해체는 예견된 것이었다.

한규철/경성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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