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8031417001


[원희복의 인물탐구-임정로드 4000㎞를 가다]난징학살- 일본군 내기 참수 106명 살해

상하이~충칭|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입력 : 2019.08.03 14:17 


난징대학살기념관에 전시된 일본군의 참수대회를 보도한 <도쿄니치니치신문>. / 원희복 선임기자


2019년 올해는 3·1운동 100년, 임시정부 100년이 되는 해다. 강산이 열 번이나 변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한·일관계다. 특히 일본 아베 총리의 시대착오적 ‘군국주의’ 정치노선은 100년 전 그대로다. 그때 영토 침략은 경제 침략으로 바뀌었지만 본질적 의미는 변함이 없다. 이로 인한 우리 내부의 분열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혹은 ‘역사는 현재’라는 말이 실감난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100년 전 그들이 맘대로 다루던 힘 없는 나라가 아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이사장 김자동)는 1919년 세워지고 1945년 광복을 맞아 조국에 돌아올 때까지 임시정부의 27년 행적을 답사했다. 상하이(上海)에서 자싱(嘉興)-항저우(杭州)-난징(南京)-진장(鎭江)-창사(長沙)-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구이린(桂林)-치장-충칭(重慶)까지 이른바 ‘임정로드’를 완전히 돌아보는 것이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을 단장으로, 조범래 독립기념관 전시부장을 부단장으로 대학생 50여명과 성인 17명이 나섰다. 이번 임정로드 답사가 과거와 다른 것은 잊혀진 사실과 인물을 찾으려 했다는 점이다.


왼쪽부터 김가진·김원봉·김두봉·추푸청·류자명.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임정로드’ 답사


1919년 3·1운동 이후 4월 19일 상하이 임정, 4월 23일 서울 한성 정부가 수립되고, 연해주에서는 대한국민의회를 선포했다. 임정 산파역으로 법무총장·국무총리 대리·외무총장을 역임한 신규식과 안창호 등은 이 3개 임시정부를 통합, 그 해 9월 상하이에서 통합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임정청사는 ‘서금2로’ ‘하비로 460호’ 등을 거쳐 1926년부터 ‘마당로 청사’로 이어졌다. 이 임정청사 주변에 김구·신규식이 살았고, 한인학교인 인성학교가 있었다. 인성학교 초대 교장은 여운형이고, 김규식·서영해가 교사를 했다.


그러나 임정은 이승만의 대통령 탄핵문제, 사회주의 계열과 갈등, 출신지역 간 반목 등으로 계속 내분에 휩싸였다. 신규식이 임정 내분을 비관해 1922년 25일간 단식한 끝에 독립을 기원하는 유언을 남기고 숨진 사건이 이를 극명하게 설명한다. 신규식을 비롯한 안태국(105인 사건 주모자), 김가진(임정 고문), 김인전(임정 의정원 4대 의장), 박은식(임정 2대 대통령), 노백린(임정 군무총장) 등 임정 원로들은 상하이 외곽 만국공묘에 묻혔다. 이곳에는 한인으로 추정되는 묘 14기가 있었고 대한민국에서 서훈 받은 7인을 제외한 7인의 묘는 아직 남아있다.


이만열 단장이 만국공묘에 있는 김가진 묘소 추정장소에서 서훈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 원희복 선임기자


이 중 김가진은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대한협회 회장으로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와 맞선 인물이다. 1919년 대동단을 조직해 총재로 활동하다 아들(김의한), 며느리(장정화)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가 1922년 77세로 순국하자 임정이 주관해 성대한 장례식까지 치렀다. 그러나 신규식과 나란히 묻힌 그는 서훈조차 받지 못하고 묘소 역시 불분명하다. 일제가 준 작위를 반납하지 않고, 충청관찰사 시절 의병을 연행했다는 것이 이유다. 이만열 단장은 김가진 묘소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작위를 반납하고 갈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마지막까지 독립운동에 투신한 만큼 서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임정은 1923년 1월부터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갈등을 조정했으나 쉬 이뤄지지 않았다. 1926년까지 임정은 내각 구성조차 이루지 못했다. 1927년 조각에 성공한 김구는 ‘유일당 촉성운동’을 통해 민족주의와 사회(공산)주의 사이 협력을 모색하고,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해 임정의 틀을 잡아갔다. 특히 김구는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암살·파괴 등 특무공작을 시행했는데, 1932년 1월 이봉창·4월 윤봉길 의거가 바로 그 결과다.


윤봉길 의거 배후로 지목된 김구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리고 일제에 쫓기는 몸이 됐다. 이때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하이를 탈출해 자싱으로 도피했다. 상하이에서 아내(최순례)를 잃은 김구는 자싱의 호숫가에서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朱愛寶)의 도움을 받으며 사실상 같이 살았다. 김구 도피처는 복원돼 있지만, 그를 도운 주아이바오는 작은 서훈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광저우 황포군관학교 앞 비석에 새겨진 제4기 졸업생 명부에서 김원봉(약산) 이름이 발견됐다. / 원희복 선임기자


상하이 외곽 만국공묘에 묻힌 임정 원로


임정은 1932년 5월 항저우를 거쳐 1935년 11월 난징 외곽인 진장으로 왔다. 난징 외곽에 있는 절 천영사 터는 김원봉의 ‘조선혁명군 정치간부학교’가 있던 자리다.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은 ‘테러단체’가 아닌 정식 군대를 원했다. 김원봉은 이곳에서 정식 군인을 양성하면서 난징 회청교에서 김구를 만나 좌우합작을 논의했다. 난징은 1937년 12월 일본군에 의해 50만 시민 중 30만명이 죽은 ‘난징대학살’의 장소다. 비극의 장소에 세워진 난징기념관은 끔찍하다. 기념관에는 참수(목을 베는) 경합을 벌여 1시간에 106명과 105명을 살해한 일본군 소위 2명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일본 <도쿄니치니치신문>이 전시돼 있다.


일제의 난징 함락으로 임정은 1937년 7월 창사로 왔고, 1938년 유명한 ‘남목청사건’이 벌어졌다. 이곳 김원봉의 조선혁명당 본부에서 김구·조완구·조소앙·홍진·지청천 등 3개 정당 대표가 모여 통합을 논의하다 김구가 가슴에 총을 맞았다. 중상을 입은 백범은 인근 상아병원에 옮겨져 아슬아슬하게 살아났다. (김구가 가슴에 총을 맞은 사진은 <경향신문> 2018년 12월 13일자에 처음 공개됐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임정 정파 간 갈등, 특히 좌파의 소행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2018년 발굴된 조선총독부 ‘대(對) 김구 특공공작 보고서’에서 일제의 치밀한 공작에 의한 밀정 소행으로 드러났다.


난징에 있는 이제항위안소기념관 앞에는 위안부 동상과 사진이 전시돼 있다. 이 사진에는 한국 김학순 할머니도 있다. / 원희복 선임기자


임정은 1938년 7월 중국 대륙의 남쪽 끝 광저우로 이동했다. 여기에는 1924년 쑨원(孫文)이 만든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가 있다. 김원봉이 4기로 입교한 것을 비롯해 임정 추천서를 받아 한인 80~200명이 이곳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황포군관학교 앞에 세워진 비석에서 김약산(원봉)의 이름을 찾은 것도 이번 답사의 성과다.


임정은 1938년 11월 내륙 류저우를 거쳐 이듬해 5월 치장까지 이동했다. 임정이 계속 옮겨가는 동안 임정 요인의 삶은 곤궁했다. 이동녕은 급성폐렴으로 숨지고, 송병조·차리석·이달은 치장의 구석진 산비탈에 묻혔다. 임정세력의 분열도 여전했다. 김구의 한국국민당, 신익희의 조선혁명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등이 우파라면,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류자명의 조선혁명자연맹,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 최창익의 조선청년전위동맹 등은 좌파로 분류된다.


그래도 치장에서 임정이 이룬 성과는 좌우합작과 한국광복군 창설이다. 답사단 조범래 부단장은 “1939년 8월 7당 합작회의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9월 5당 합작회의를 거쳐, 1940년 5월 3당 합작회의에서 김구가 주석에 취임하고 광복군 창설을 결정했다”면서 “이때야 비로소 임정이 당·정·군을 완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1945년 9월 3일 중국공산당 충칭시당이 있던 계원에서 임정 요원들이 마오쩌둥을 만난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 원희복 선임기자


군의 ‘자주권’ 되찾은 충칭 임정


김원봉은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이 됐지만 이 과정에서 한글학자 출신의 김두봉을 비롯해 최창익 등이 조선의용대 세력 80%를 이끌고 중국공산당이 있는 옌안(延安)으로 가버렸다. 이들은 연안독립동맹을 결성해 중국혁명에 큰 공을 세운다. 이들은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가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 세력,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과 함께 ‘북조선’ 건국의 일원이 된다. 김두봉은 김일성종합대 초대 총장, 최창익은 재정상을 지내지만 1956~1958년 연안파 숙청으로 잊혀진 인물이 됐다.


1940년 9월 충칭에 도착한 임정은 각 정당이 연합해 연화지 청사를 마련하고 해방 후 귀국할 때까지 머물렀다. 충칭에서 임정이 이룬 성과는 군의 ‘자주권’을 되찾은 것이다. 조선의용대 80%가 중국공산당으로 가버린 것에 충격을 받은 장제스는 한국광복군에 ‘오직 아국(국민당) 최고 통수의 군령만 접수한다’는 ‘9개 준승(準繩)’을 만들었다. 작전권을 중국 국민당이 가진 것이다. 이에 임정 요인들이 강력하고 집요하게 항의해 1944년 8월 작전권을 찾아왔다. 이만열 단장은 “나라 없던 광복군도 작전권을 갖기 위해 그리 노력했는데 독립한 정식 정부에서 창군 70년이 넘는 우리 국군이 아직 작전권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은 수치”라고 일갈했다.


1943년 7월 김구와 조소앙은 장제스와 면담하고, 1945년 국무위원 장건상을 옌안에 파견해 김두봉과 통일전선을 협의하는 등 임정은 마지막까지 좌우합작에 노력했다. 환국하기 전인 9월 3일 중칭 계원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을 만난 사실도 이번 답사에서 처음 확인됐다. 해방 후 김구·김규식 등 임정 요인들이 남북을 넘나들며 민족의 완전한 통일을 시도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충칭 연화지 청사 앞에서 답사단원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원희복 선임기자


김원봉은 김구와 함께 남북합작에 매달리다 친일 경찰의 연행에 분노해 북으로 갔다. 그리고 장관급 국가검열상을 지냈지만 역시 연안파 숙청 때 사라졌다. 최근 김원봉에 대한 서훈 문제로 논란이 많았지만 서훈이 이뤄지지 않았다. 의열단원·임정의원으로 김원봉의 비밀참모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류자명은 귀국하려다 6·25전쟁으로 중국에 발이 묶였다. 그는 농학자로 중국 대학에서 근무하면서 조국의 통일을 그리다 숨졌다. 중국 호남농업대학에 그의 동상이 있고, 자식들도 중국에 산다. 그는 남북 모두로부터 건국훈장과 국기훈장을 받았고, 다행히 대전현충원으로 돌아왔다.


일제 패망 후 북으로 간 임정 요원들은 한때 ‘높은 자리’를 차지했지만 대부분 숙청됐다. 남에 있던 여운형은 1947년 7월, 김구 역시 49년 6월 암살됐다. 좌우합작에 매진했던 김규식·조소앙·김의한 등은 북에서 사망했다. 파리에서 독립운동과 해방 후 좌우합작 운동을 벌이던 서영해는 1956년 상하이에서 ‘실종’됐다.


임정 27년을 지탱한 그들이 광복된 조국에서 얻은 것은 영광이 아니었다.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의 갈등과 반목, 그리고 암살과 숙청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27년간 중국 대륙에서 실천했던 정신을 기리는 행렬은 이어지고 있다. 임정 답사단이 그것이다. 그들은 ‘독립된 조국, 통일된 나라’라는 임정정신을 잇고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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