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90815220019530?s=tv_news


항일 무장투쟁 새로운 발견..'40번의 전투·승전 또 승전'

안양봉 입력 2019.08.15 22:00 


[앵커]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 독립군은 중국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이어갔죠.


중국의 한 역사학자가 1920년대 중국 매체에 보도된 당시 항일 무장투쟁 기사를 정리해, KBS에 단독으로 제공했습니다.


상하이에서 안양봉 특파원이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독립군이 봉오동, 청산리에서 연거푸 승리하자 일제는 간도참변으로 보복합니다.


수만 명의 동포를 잃은 독립군은 선전포고를 하고, 강도 높은 투쟁에 들어갑니다.


[익세보(益世報) 1920년12월 23일 : "한인을 잔인무도하게 학살하고 있다. 원수를 잊지 않고 목숨 걸고 복수할 것이다."]


대표적인 전투는 함경도 경성, 청진항 전투였습니다.


[경보(京報), 신화일보-북경(新華日報-北京) 1921년 1월 27일 : "1월 4일 경성·청진항에서 일본군 병사 40여 명이 사망했다. 일본군이 급파돼 전투가 이어졌는데 일본군 사상자는 600여 명, 독립군은 50여 명이었다. 이 전투로 독립군 지원이 증가했다."]


독립군이 나타나면 혼비백산하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익세보(益世報) 1922년 3월 14일 : "독립군이 의주군을 습격했다. 면사무소 일본인 직원들이 총소리를 듣고 옷 입을 새도 없이 도망쳤다."]


[신보(晨報) 1921년 12월 27일 : "시베리아 통신에 따르면 일본군 43연대와 독립군이 교전했다. 쌍방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일본군은 피해를 확인해 주지 않았다."]


연이은 승전에 독립군의 기세는 나날이 올라갔습니다.


[익세보(益世報) 1921년 2월 16일 : "만주일일신문에 따르면 독립군이 이미 8천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쑨커즈/중국 상하이 푸단대 교수 : "(무장투쟁으로) 장래 민족의 독립, 조국의 독립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신념이 더 강해졌습니다."]


하지만 승전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신보(晨報) 1921년 2월 26일 : " 홍범도가 중상을 입고, 제1독립군 25명, 제2독립군 34명이 체포됐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이뤄진 외교와 선전 중심의 독립투쟁, 그리고 전력면에서 열세였지만 굴하지 않고 전개된 만주 항일 무장투쟁은 우리 독립운동의 두 축이었습니다.


1920년대 10년 동안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를 제외하고 당시 중국 언론에 보도된 독립운동은 96건, 이중 40건이 무장투쟁 기사입니다.


숨지거나 다친 일본군 등이 660여 명에 달했지만, 독립군의 피해는 70여 명이었습니다.


상하이에서 KBS 뉴스 안양봉입니다.


안양봉 기자 (beebe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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