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62062


남과 북 국립묘지에 동시 안장된 최초의 독립운동가

[동작민주올레 50] 동작지역 독립운동·민주화운동 역사탐방-서울현충원 평화·통일길②

19.08.15 11:27 l 최종 업데이트 19.08.15 11:27 l 김학규(hkkim21)


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에 이어 이번에는 '현충원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서울현충원 4·3길 – ②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길 – ③서울현충원 5월길 – ④서울현충원 친일파길 – ⑤서울현충원 전직대통령길 – ⑥서울현충원 평화·통일길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유일한 혁명전통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북한의 애국열사릉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했던 임정계열의 민족주의 인사들이나 다른 계열의 사회주의 운동가들도 다수 포괄하고 있다.


남과 북이 동시에 인정하는 독립운동가도 25명이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의 남북 관계가 새롭게 회복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남과 북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상호 다양성을 존중하는 접근과 아울러 남과 북의 공통점을 넓혀나가는 노력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이때 남과 북이 동시에 인정하는 독립운동의 역사와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하고 확산시켜 나가는 일 역시 남과 북의 상호 공통점을 넓혀나가야 할 주요 분야의 하나일 것이다.


북에는 진묘, 남에는 허묘...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장군의 묘


▲ 애국지사묘역에 있는 양세봉 장군의 묘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는 양세봉 장군의 묘가 허묘로 조성되어 있다. ⓒ 김학규


▲ 애국열사릉의 "량세봉 선생"의 묘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는 "량세봉 선생"의 묘. 1961년 북한은 만주에서 양세봉 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여 평양으로 이장하였다. "조선혁명군 총사령"이 아니라 "독립군 사령"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 정창현

 

그중에는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돼 있는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장군(1896~1934)을 주목할 만하다. 양세봉 장군은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로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해 수많은 국내진공작전과 만주에서의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끈 인물이었다. 그는 북한의 애국열사릉과 남한의 애국지사묘역에 동시에 안장돼 있다.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어렸을 때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크게 감명받은 양세봉은 1919년 3.1혁명 시기 만주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22년 천마산대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양세봉은 이후 대한통의부와 참의부를 거쳐 정의부에서 1중대장을 맡았다. 1929년 신민부, 정의부, 참의부의 삼부통합을 위한 노력 과정에서 형성된 국민부를 지지하는 조선혁명당의 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에 참여했다. 1932년에는 총사령에 취임해 일제의 만주침략에 맞서 조중연합군을 형성해 영릉가 전투를 비롯한 200여 차례의 크고작은 전투를 치르며 맹활약했다.


북한의 김일성도 독립해 독자적인 항일유격대를 형성하기 이전에는 양세봉 부대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세봉은 김일성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오동진 등과 함께 적극 도와준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일제에 맞서는 반일연합전선의 형성에도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양세봉 장군은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였음에도 1961년 북에서는 환인현에 묻혀 있던 양세봉의 시신을 모셔갔고, 지금은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다. 남에서는 1962년 독립유공자로 인정했고, 1974년 애국지사묘역에 허묘 형태로 묘를 조성했다.


이렇게 해서 양세봉 장군은 최초로 남과 북의 국립묘지에 동시에 안장돼 있는 독립운동가의 지위를 확보하게 됐다. 중국 요녕성 신빈현에는 1995년 항일명장 양세봉장군 석상이 설치되는 등 만주 지역에서 한족과 조선족 모두에게 높이 존경받고 있기도 하다.


남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장재성과 김원봉

 

▲ 광주학생독립운동 사건의 공판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1930. 2. 15) 원 안의 인물이 장재성이고, 왼편 사진 속 인물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또다른 주역 장석천이다. ⓒ 동아일보

   

애국지사묘역의 조길룡(1909~1991)은 일제강점기 3.1혁명, 6.10만세운동과 더불어 3대 대중운동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광주농업학교 4학년생으로 동맹휴학을 주도했던 조길룡은 이후 체포, 대구복심번원에서 2년형이 확정돼 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에는 농민운동에 관여하다 1933년에 다시 체포돼 전남노농협의회 사건으로 8개월의 감옥살이를 더 해야 했다.


그런데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언론에 대문짝만한 사진과 함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지목되면서 대구복심법원에서 가장 높은 형량인 징역 4년형을 언도받았던 장재성(1908~1950)은 국립현충원에서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장재성 역시 4년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나온 이후에도 1939년 '적색교원 사건'으로 일경에 다시 체포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기도 하는 등 일제강점기 내내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사실 장재성은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3.1절을 앞두고 독립유공자에 대한 대대적인 표창을 시작한 1962년 당시, 처음에는 표창대상자 208명의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이 확인됐다'면서 서훈 취소가 발표됐다. 결국 최종 표창대상자 명단(205명)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이후 장재성은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장재성은 해방정국에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 광주청년동맹 의장,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 전남대표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분단에 반대하여 세 차례에 걸쳐 남과 북을 오가며 활동했지만, 분단 현실은 장재성을 그냥 두지 않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직후 검거된 장재성은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고,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법적 근거도 없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총살당해야 했다.


막상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 3대 대중운동의 하나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그 운동의 최고 지도자는 독립유공자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모순적 현실은 해방 74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장재성은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기념사를 계기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의열단의 김원봉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내내 비타협적으로 일제에 맞서 싸운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럼에도 의열단 단원들은 안장돼 있는데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을 찾을 길이 없듯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동료들은 독립운동가 묘역에 안장돼 있는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 장재성은 찾을 길이 없다. 국립서울현충원의 독립운동가 묘역은 우리에게 분단의 현실을 하루바삐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한다.


이들 위대한 독립운동가들을 우리의 역사에서 올바로 자리매김하는 일은 이들 덕분에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에서 살고있는 우리 모두의 몫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후선열제단의 납북인사들

  

▲ 무후선열제단의 납북인사 16인의 위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부주석 김규식(1881-1950), 3균주의(정치, 경제, 교육에 있어서의 균등)를 제창하여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핵심정신의 기초를 마련한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 조소앙(1887-1958), 영화 <박열>로 유명한 아나키스트 박열(1902-1974) 등 그야말로 쟁쟁한 인물들이다. ⓒ 김학규

 

애국지사묘역 위쪽에 있는 무후선열제단 왼편 끝에는 김규식, 조소앙, 유동열, 오화영, 조완구, 윤기섭, 김붕준, 안재홍, 박열, 명제세, 원세훈, 최동오, 정인보, 정광호, 고창일 등 납북인사 16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할 때 미처 피난하지 못한 채 서울에 있던 중 인민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납북된 인사들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부주석 김규식(1881~1950), 3균주의(정치·경제·교육에 있어서의 균등)를 제창해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핵심정신의 기초를 마련한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 조소앙(1887~1958), 영화 <박열>로 유명한 아나키스트 박열(1902~1974) 등 그야말로 쟁쟁한 인물들이다.


납북 직후 전쟁 중에 사망한 김규식과 유동열 등을 제외하고는 이들은 북한에서 1956년에 결성된 재북평통(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활동을 활발히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소앙·안재홍 등이 주도한 재북평통은 결성대회에서 "남북정권당국과 국회, 모든 정당·사회단체 대표 및 애국인사들은 평화적인 통일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상설기관을 수립할 것" "남북총선거에 따라서 통일민주연합정부를 수립할 것" 등을 제의했다. 재북평통은 북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남북한 중립노선을 견지하면서 중립화통일방안에 기반한 평화통일 실현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활동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지향적인 공통분모를 만들어내고 확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경험과 역할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고, 올바른 자리매김 역시 살아있는 우리의 몫이다.


무후선열제단에 위패가 모셔져 있는 납북인사 중에 최동오(1892~1963)도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는 독립운동가이다. 정의부와 조선혁명당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최동오 집안의 역사는 한반도 분단이 한 집안의 삶을 어떻게 굴절시킬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최동오의 아들 최덕신(1914~1989)도 한국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였다. 해방 이후 한국군 창설과정에 참여했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1963년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는 외무부장관까지 역임했다. 그런 최덕신이 박정희와 갈등을 빚다가 1970년대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1983년에는 아버지 최동오가 묻혀있는 북으로 들어가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의 부인 류미영(1921~2016)도 아버지가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무후선열제단의 납북인사 유동열(1879~1950)인데, 남편에 이어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을 역임해 북한에서 고위인사로 장기간 활동했다. 이들 최덕신-류미영 부부의 둘째 아들 최인국도 지난 2019년 7월초 돌연 북한으로 망명했다.


납북인사는 아니지만, 무후선열제단에 위패가 모셔져 있는 인물 중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이었던 오동진 장군(1889~1944)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동진 역시 북한의 애국열사릉에도 묘가 조성돼 있어 남과 북에서 동시에 인정하는 독립운동가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하는데,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여러 차례 언급된다고 한다. 1926년 김형직이 사망한 이후 어린 김일성을 정의부가 운영하던 화성의숙에 입학시킨 것도 오동진과 최동오였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의 손정도 목사

  

▲ 임시정부요인묘역에 있는 손정도 목사의 묘 정동제일교회 6대 담임 목사를 지내기도 한 손정도 목사(1882-1931)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임시의정원 부의장이었고, 이어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런 손정도 목사가 북한의 김일성과 각별한 관계를 맺은 것은 만주 길림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1920년대 말이었다. ⓒ 김학규

 

정동제일교회 6대 담임 목사를 지내기도 한 손정도 목사(1882~1931)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임시의정원 부의장이었고, 이어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다. 그런 손정도 목사가 북한의 김일성과 각별한 관계를 맺은 것은 만주 길림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1920년대 말이었다.


1926년 사망 직전 김형직은 "어머니를 모시고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라"고 유언을 남겼고, 1926년 김일성은 길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그를 찾아갔다. 손정도 목사는 이미 평양 숭실 출신의 졸업생과 재학생을 중심으로 조선국민회를 조직했다가 옥사한 장일환(1886~1918)으로부터 김형직을 소개받아 알고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숭실중학 후배 김형직의 아들 김일성이 찾아오자 손정도 목사는 친자식처럼 돌봤다. 더구나 김일성이 만주 군벌에 의해 감옥에 갇혔을 때 힘써 석방시킨 까닭에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그를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 생명의 은인"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손 목사 자녀들과 김일성은 형제처럼 지냈는데, 큰아들 손원일은 해외에 유학 중이었던 관계로 두 살 어린 둘째 아들 손원태가 함께 육문중학을 다니며 친형처럼 따랐다고 한다. 해방 이후 미국에 살면서 의사로 지낸 손원태는 팔순 잔치를 평양에서 치렀고, 2005년에는 북한의 국립묘지인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2003년 10월에는 평양에서 손정도목사기념사업회를 비롯해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독립기념관의 학자들이 북조선 학자들과 손정도 목사를 기념하는 학술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돼 있는 손정도 목사, 장군 제2묘역에 안장돼 있는 큰아들 손원일 제독,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는 둘째아들 손원태 박사로 구성된 손정도 목사 집안의 역사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밝혀내는 일 역시 살아있는 우리의 몫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주역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

 

▲ 6.15 남북공동선언의 주역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남북관계는 앞으로도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시대적 요구는 남과 북의 주체역량이 강화됨에 따라 주변 환경을 극복하면서 점차 구체화될 것이다. ⓒ 김대중도서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 중이던 2000년 방북을 성사시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성공리에 개최하고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등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인물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승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10.4 공동선언'을 발표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여정에 한 단계 진전을 이뤄냈지만, 이후 남북관계는 한동안 경색국면에 접어들었다.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지금 한반도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새로운 돌파구가 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촛불혁명의 결과 탄생한 문재인 정부 하에서 지난 2018년부터 남북 정상회담이 연이어 개최되고 북·미 정상회담까지 성사되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기대가 다시 높아졌다.


지난 2월 말 개최된 하노이 북-미정상회회담에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한동안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지난 6월말 판문점에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극적으로 만난 사건은 일시적으로 얼어붙어 있던 북미 관계에 새로운 돌파구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남북관계는 앞으로도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시대적 요구는 남과 북의 주체역량이 강화됨에 따라 주변 환경을 극복하면서 점차 구체화될 것이다.


이때 국립서울현충원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복무하는 새로운 시대의 현충시설로 거듭나는 길에 2009년에 자리잡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는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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