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61124


이승만·박정희 묘와 김대중 묘의 차이점

[동작민주올레 48]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역사 탐방 - 서울현충원 전직대통령길

19.08.13 10:09 l 최종 업데이트 19.08.13 10:09 l 김학규(hkkim21)


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에 이어 이번에는 '현충원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서울현충원 4·3길 – ②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길 – ③서울현충원 5월길 – ④서울현충원 친일파길 – ⑤서울현충원 전직대통령길 – ⑥서울현충원 평화·통일길


국립서울현충원에는 네 명의 전직 대통령이 안장돼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과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19년간 장기집권한 대통령 박정희(1917~1979), 문민정부를 이끈 대통령 김영삼(1927~2015), 헌정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일궈내고 6.15 공동선언을 통해 남북관계의 새로운 장을 연 대통령 김대중(1924~2009)이 바로 그들이다.


초대 대통령으로 두 번 탄핵당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 


▲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 363㎡ 규모의 이승만 전 대통령 묘는 묘두름 돌(병풍석)까지 갖추고 있어 마치 조선시대의 왕릉을 보는 듯하다. 묘에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1900-1992)도 함께 안장되어 있다. ⓒ 김학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묘는 서울현충원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는 창빈 안씨(1499~1549) 묘에서 한강을 바라본 왼편 등성이에 있다. 창빈 안씨는 조선시대 임금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할머니다. 363㎡ 규모의 이승만 전 대통령 묘는 묘두름 돌(병풍석)까지 갖추고 있어 마치 조선시대의 왕릉을 보는 듯하다. 묘에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1900~1992)도 함께 안장돼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이승만은 아다시피 1919년 3.1혁명 이후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1925년 3월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은 그를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로 규정하고 탄핵했다.


이승만은 1948년에 정식으로 수립되는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하지만 이때도 장기독재를 실시하다 3.15 부정선거에 항거한 1960년의 4.19혁명으로 권력에서 쫓겨나 하와이로 도주했다.


말하자면 두 번의 초대 대통령에 사실상 두 번의 탄핵을 당한 경력의 소유자로, 앞으로도 절대 깨질 수 없는,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진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인물이 1965년 하와이에서 사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립묘지에 묻혔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식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대만의 장개석과 같이 스스로 '국부'로 불리길 희망했다. 2015년 7월 '이승만 전 대통령 서거 50주기 추도식'에 참여한 당시 집권여당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가 이승만을 '국부로 예우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2019년에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이승만 추도식에 참석해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아 마땅함에도 위업이 폄훼되고 홀대 되는 현실이 죄송하고 부끄럽다"라면서 "위대한 건국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의 생애와 업적을 우리 국민 모두의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해 다시 한 번 '국부론'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물론 이승만에 대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자 6.25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인물로 높이 평가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두 번씩이나 탄핵당한 인물을, 더군다나 한국전쟁 전후에는 보도연맹 관계자를 비롯한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법적 근거도 없이 불법 처형한 책임자이기도 한 인물을 '국부로 예우하겠다'는 발상은 국민적 동의를 얻기가 결코 쉽지않을 것으로 보인다. 만에 하나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는 일'이 발생한다면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기본정신으로 담겨 있는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은 국부를 몰아낸 '배은망덕의 이념'으로 매도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하와이 한인동지회가 하와이 근해에서 채취해 제작·건립했다고 하는 묘소 왼편 헌시비의 헌시를 보면 우리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 헷갈리게 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최영옥(1924~?)의 작품(1971)으로 알려진 헌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배달민족의 독립을 되찾아 

우리를 나라 있는 백성 되게 하시고

겨레의 자유와 평등을 지켜

안녕과 번영의 터전을 마련해 주신

거룩한 나라 사랑

불멸의 한국인 우리의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금수강산 흘러오는 한강의 물결

남산을 바라보는 동작의 터에

일월성신과 함께 이 나라 지키소서


죽어서도 독재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 국립서울현충원의 중심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묘는 독재자의 권위주의적인 재임시절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묘소 크기도 580㎡로 다른 대통령 묘소와 비교를 불허한다. ⓒ 김학규

▲ 계단의 정치학?! 계단의 종교학?! 묘소 앞에 서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높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관람객들이 계단을 오르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마련된 장치인데, 마치 일제 강점기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을 보는 듯하다. 계단의 정치학, 또는 계단의 종교학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 김학규


죽을 때까지도 모자라 죽어서도 최고의 자리에 있고 싶었던 것일까. 서울현충원의 중심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묘는 독재자의 권위주의적인 재임시절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묘소 크기도 580㎡로 다른 대통령 묘소와 비교를 불허한다. 묘소 앞에 서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높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관람객들이 계단을 오르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마련된 장치인데, 마치 일제강점기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을 보는 듯하다. 계단의 정치학 또는 계단의 종교학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아 할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1925~1974)와 나란히 묻혀 있으니 말이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다. '경제발전을 통한 조국근대화를 일궈낸 민족중흥의 영웅'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5․16 군사쿠데타와 유신독재를 통해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그 뿌리까지 흔들어놓은 독재자'라는 부정적 평가가 극명하게 대립한다.


유신헌법이 통과되던 해인 1972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유신둥이'였던 필자는 그 시절만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앞선다.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면서 '유신형 인간'으로 거듭나고 있던 나는 '간첩식별법 10가지'를 외우다 평범한 농사꾼이자 민주시민이길 갈망했던 아버지를 간첩으로 오인해 경찰에 신고할 뻔한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용기 부족으로 끝내 아버지를 신고하지는 못했지만, '간첩 아버지를 신고한 자랑스러운 어린이'로 초등학교 운동장 교단에서 상까지 받는 꿈을 여러 차례 꿀 정도로 당시는 꽤나 진지하고 심각했다.


최근 한일 관계가 시끄럽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징용 등 강제동원에 대해 2018년 대한민국 대법원이 개인의 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판결에 대해 일본의 아베 내각이 수출규제라는 자유무역 질서를 흔드는 경제보복을 자행하면서 한일 갈등이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이래 최고로 높아져 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1965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일본과 맺은 한일청구권 협정의 한계와 문제점도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JTBC는 무상원조 3억 달러와 유상원조 2억 달러 등 8억 달러의 주요 사용처 중 하나였던 서울지하철과 포항제철의 건립 과정 분석 등을 통해 자금의 상당 부분이 일본을 위해 사용됐고, 일본의 전범기업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다. 특히 경제협력기금 8억 달러의 용처를 결정하는 데 핵심역할을 한 '한일협력위원회'의 활동 분석을 통해 '한일경제협력'이라는 이름으로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와 전범기업 신일본제철의 나가노 시게오 명예회장 등이 한국 경제를 일본 경제의 하청계열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최근 한일 갈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박정희가 물러난 지 40년이 지난 2019년에도 우리는 박정희 시대의 유산을 여전히 짊어진 채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남북관계 새 장을 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  

 

▲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 김대중 전 대통령 묘를 찾는 사람들은 묘의 규모나 그 상대적 소박함에 놀라게 된다. 물론 2005년에 제정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의 영향도 있겠지만, 이승만·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의 묘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은 264㎡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봉분을 두르고 있는 묘두름 돌(병풍석)조차 찾아볼 수 없다. ⓒ 김학규


김대중 전 대통령 묘를 찾는 사람들은 묘의 규모나 그 상대적 소박함에 놀라게 된다. 물론 2005년에 제정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의 영향도 있겠지만, 이승만·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의 묘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다(264㎡). 뿐만 아니라 봉분을 두르고 있는 묘두름 돌(병풍석)조차 찾아볼 수 없다.


2010년 서울현충원에 자리 잡은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는 현충원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당초 이명박 정부는 '서울현충원에는 자리가 없으니 대전현충원에 묘를 마련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유족 측의 끈질긴 설득으로 현재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가 서울현충원에 들어서기 전, 이곳 서울현충원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만 있었다. 그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독재자 이미지는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반면 김대중은 1973년 8월의 '김대중 납치사건', 1980년 5월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두 차례에 걸쳐 독재자에 의해 살해당할 위험에 처했던 인물이다. 김대중은 이에 맞선 민주투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일궈냈다. 여기에 대통령 재임시절 6.15 남북공동선언을 일궈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실현으로 나아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연 인물로도 평가받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계승한 인물로 평가되는 노무현 전 대통령마저 고향인 봉하마을에 안장된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이 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사실이 갖는 상징성은 크다. 반공·군사주의로 표상되는 국군묘지와 권위주의의 상징인 두 전직 대통령 묘소가 결합한 서울현충원의 부정적 이미지를 일거에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임정요인 묘역과 대한독립군무명용사 위령탑의 건립으로 한 차례 큰 변화를 겪은 서울현충원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가 들어서면서 반공군사주의와 권위주의의 전통이 더이상 독점적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됐다. 


물론 이 도전이 어느 정도 속도로,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진행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2019년 서울현충원이 발행한 '국립서울현충원 종합안내서'의 묘역 소개 순서에 독립유공자 묘역과 장병 묘역을 제일 먼저 소개한 뒤 장군 묘역은 네 번째로, 국가원수 묘역은 마지막 순서인 일곱 번째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공군사주의와 권위주의의 전통은 현충원에서도 점차 그 위력을 상실하는 추세에 있어보인다.


그럼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IMF 사태 극복 과정 중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비판적 평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도 언급해야만 한다. 우리 사회가 양극화를 해소하고 평등사회로 나아가는 과제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과제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에는 지난 6월 서거한 영부인 이희호 여사(1922~2019)가 나란히 안장돼 있다. 이희호 여사는 단순히 대통령 영부인이 아니라 여성운동가이자 민주투사, 평화전도사로 평가받고 있다.


군부통치의 종식과 문민정부 시대를 이끈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 

 

▲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는 다른 전직 대통령의 묘와 달리 한강을 바라보는 방향이 아닌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좌청룡 우백호 배산임수의 풍수지리적 요건은 다 갖추고 있다. ⓒ 김학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는 다른 전직 대통령의 묘와 달리 한강을 바라보는 방향이 아니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럼에도 '좌청룡 우백호 배산임수'의 풍수지리적 요건은 다 갖추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울현충원에 가장 최근 안장됐다. 2015년 안장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는 258.5㎡의 규모다. 원래는 묘두름 돌(병풍석)을 설치할 계획이었으나 이후 계획을 변경해 시행하지 않았다.


김영삼은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만 26세)으로 당선된 인물이다. 하지만 김영삼은 195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이 3선개헌을 시도하자 이에 맞서 자유당 의원 20여 명과 함께 3선개헌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야당의 길로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은 1969년 상도동 자택 입구에서 초산 테러를 당하는가 하면, 1979년에는 신민당 총재직과 국회의원직 제명도 당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전두환 신군부세력의 광주학살로 좌절된 직후에는 정계은퇴를 강요받으며 정치활동 금지조치도 당하는 등 크고 작은 수난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영삼은 1971년 대선을 앞두고는 비록 자신이 대통령 후보가 되지는 못했지만, '40대 기수론'을 제창해 야당인 신민당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1983년 5.18 3주년에 시작한 23일간의 단식농성을 계기로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를 조직했고, 이를 바탕으로 1985년 2.12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는 주역이 됐다. 그러면서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김영삼은 직선제로 치러진 1987년 대선에서 다시 한 번 좌절을 겪고, 이어진 1988년의 4.26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이 제3당으로 전락하면서 위기에 몰리기도 한다. 하지만 집권여당인 민정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손잡은 3당합당으로 정국을 주도하면서 1992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한다. 물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단행한 김영삼의 이러한 행보는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이 대통령으로서 한 군부내 사조직 하나회 척결,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와 금융실명제·부동산실명제 실시, 5.18 특별법 제정 등은 우리 사회의 발전과정에서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된다. 그 중 특히 5.18 특별법의 제정은 비록 특검제 수용을 회피했음에도 이를 계기로 광주민중항쟁은 '헌정질서파괴 범죄행위'(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1조)에 저항한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교육 개혁, 남북 관계, 재벌 개혁, 외환위기 대처, 국제관계 정립 등에서 실패와 한계를 노정했다고 평가된다. 물론 군부통치를 32년 만에 종식시킨 정부에게 더 큰 기대를 갖는 것도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의 장기적 전망의 부재와 직관 위주의 접근, 전문성 부족 등은 대단히 아쉬운 대목이었다.


묘 왼편에 있는 '김영삼 민주주의 기념비'에는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총재 수락 연설에서 한 유명한 말 "이제 민주주의는 개막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새벽이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새벽을 알리는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오고 있습니다" 등과 같은 어록이 새겨져 있다.


다른 전직 대통령의 묘는


독재자 박정희가 부하인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으면서 잠시 대통령 직을 담당했던 최규하(1919-2006) 전 대통령은 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돼 있다. 


국립묘지가 아닌 다른 곳에 안장된 전직 대통령도 있다. 윤보선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런 경우다.


윤 전 대통령은 국립묘지 안장 대신 충남 아산의 해평 윤씨 묘역에 잠들기를 선택했다. 생전 조상들이 잡아놓은 유명한 명당으로 불린다.


불의의 죽음을 맞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서에 따라 화장한 뒤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안장돼 있다. 봉하마을은 평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존경했던 사람들에게는 성지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곳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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