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Premium/at_pg.aspx?CNTN_CD=A0002552151
인민군 피해 땅굴에 숨어 산 남자, 국군 총에 죽었다
기관사 우종석의 짧았던 삶
글 박만순(us2248) 편집 손지은(93388030) 등록 2019.08.09 08:29 수정 2019.08.09 18:55
1950년 7월, 피난길에서 돌아온 지 며칠 안 된 우종석 집에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우종석 동무 있소?"
"누구세요?"
"내무서에서 나왔소. 우종석 동무랑 상의할 일이 있어 왔소."
우종석의 어머니가 '없다'고 했으나, 그들은 쉽게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잠시 방 좀 보겠소" 하면서 방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방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그들은 '우종석이 집에 오면 내무서에 꼭 들려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물러갔다.
며칠 후 내무서에서 다시 왔다. 그때는 우종석의 어머니는 집에 없었고, 여동생 우정분(당시 15세)만이 있었다.
"오빠 어디 있나?"
"모르는디유."
내무서에서 나온 이들은 지난번처럼 집뒤짐을 했다. 여전히 우종석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그들이 쉬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내무서원들은 조카를 업고 있는 우정분에게 "오빠가 기관차 기술이 있어 협조를 얻으려고 하는 거야. 어디 있는지 솔직히 말해"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데 우정분은 정말 오빠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우정분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한 마디밖에 없었다.
"정말 몰라유."
그러자 내무서원들의 자세가 돌변했다. "이놈의 지지배가 버르장머리가 없네! 오빠를 찾아내지 않으면 네가 죽을 줄 알아"라며 목청을 높였다. 그들은 우정분을 집 뒤쪽 장독대로 끌고 갔다. 그러더니 그녀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 "자, 마지막이야. 오빠 어디 있어?" 우정분은 답변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탕' 소리가 나자 소녀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음과 동시에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시 후 애기 울음소리가 났다. 정분은 '아니, 저승에서도 애기가 우네?'라고 웅얼거렸다. 그런데 그곳은 저승이 아니라 장독대 앞이었다. 우정분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근처의 떡시루가 산산조각 나있었다. 그때서야 우정분은 내무서원들이 자신이 아니라 떡시루를 쐈음을 눈치 챘다.
땅굴에서 60일을 버텼는데 '잔류파' 낙인
▲ 온양온천에서 동료들과 기념촬영. 1947.2.28. 뒷줄 맨 우측이 우종석 ⓒ 박만순
내무서원들이 집에 들이닥쳐 여동생을 협박하며 간장 독을 쏜 시간, 우종석은 바로 근처에 숨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집 뒤쪽 울타리 아래에 굴을 파서 아들을 숨겼다. 그러한 사실은 가족 어느 누구도 몰랐었다.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한 60여 일간 우종석은 굴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식구들 몰래 밥을 날랐다.
후퇴했던 국군이 대전을 수복하자 군인과 경찰들은 인민군에 협력한 소위 '부역자'들을 검거하느라 눈알이 빨개졌다. 기관사였던 우종석은 업무 복귀를 위해 대전역에 갔다. 그는 인민군 점령 시절 인민군(내무서원)이 여러 차례 찾아와서 '열차 운행에 협조하라'고 했으나, 일절 응하지 않았다. 부역행위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운신에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전역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피난가지 않은 이들은 전부 빨갱이로 몰리는 상황이 돼버렸다.
우종석이 복귀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이 친구 임홍근이 집으로 찾아 왔다. 여동생 우정분이 집에 혼자 있는데, 임홍근은 "오빠 어디 갔냐?"라고 물었다. 우정분이 "집에 없는디유"라고 하자, 그는 세모눈을 뜨고 방문을 모두 열어 보더니 같이 온 이들과 함께 나갔다. 훗날 소문을 들으니 임홍근은 피난 가지 않은 이들을 '부역자'로 잡아들이는 일을 했다. 우종석 역시 피난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잔류파'로 낙인이 찍힌 것이다. 잔류파=빨갱이 등식이 성립되던 때였다.
하루는 마을 반장이 와서 "제2국민병 모집을 하니 이 집 아들도 신체검사를 받으시오" 하는 것이 아닌가. 소위 '국민방위군'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중공군이 참전하자 1950년 12월 17일 '제2국민병소집령'을 발동, 약 50만 명의 장정들로 국민방위군을 편성했다.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성들이 대상이었다.
우종석은 소집령에 응하지 않으려 했으나, 어머니는 아들을 설득했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거냐. 한때는 빨갱이들이 잡으려고 안달이더니, 이제는 경찰이 잡아들이려고 난리쟎어." 떳떳하게 직장에 복귀하려면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는 삼성국민학교로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다. 그런데 이후 소식이 감감했다. 신체검사를 받으러간 우종석은 대전경찰서를 거쳐 대전형무소에 구금되었기 때문이다.
"별 일 없을 거예요"
대전형무소 간수 송중근은 순찰을 돌다가 얼굴이 퉁퉁 부은 친구를 만났다. "종석이 웬일이여?" 우종석은 그간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송중근에게 "울 어머니한테 가서 진정서 좀 받아달라고 전해줘"라고 부탁했다.
송중근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어머니는 충남 대덕군 회덕면 대화리 가구를 일일이 다니며 진정서를 받았다. 당시 어머니를 따라 다니며 진정서를 받은 우정분(85, 대전 광역시 유성구 송광동)은 "밤저골, 황소, 말랭이, 고마니 150 집에를 일일이 다녔어요"라고 한다. 대화리 자연마을을 모두 다니며 진정서를 받은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선뜻 진정서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종석은 효자로 소문난 이였고, 인민군 점령 시절에 열차를 몰지 않은 것은 모두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진정서까지 들어갔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어느 날 송중근이 우종석의 어머니를 찾아와 "모레가 재판인데, 걱정 마세요"라고 했다. 재판날에도 우종석의 집에서는 참석할 여력이 없었다. 잘못한 게 없으니 우종석도 석방되리라 기대했다.
그후 송중근이 와서 우종석의 여동생 정분에게 전한 소식은 하늘이 무너지는 얘기였다.
"동생, 이리와 봐."
"....."
"네 오빠 산내에서 죽었어. 어머니한테는 얘기하지 말어."
▲ 우종석이 이적행위로 사형을 받았다는 판결문 ⓒ 박만순
우종석(1927년생)은 1951년 1월 6일 육군본부 군법회의에서 이적행위(국방경비법 위반)로 사형 선고를 받아 대전 산내에서 죽었다. 25세 젊은 나이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마을 사람이 다 보는 앞에서 '효자상'을 받았던 그의 생은 이렇게 짧게 끝나버렸다.
그 기차가 멈추지만 않았어도
▲ 철도 직원들과 함께. 1948.4.12. 앞줄 우측 3번째가 우종석 ⓒ 박만순
삼성초등학교를 나와 대전공립공업전수학교를 졸업한 우종석은 일본으로 가서 기관사 교육을 받았다. 귀국한 그는 한국전쟁 전까지 대전역에서 일했다. 어려서 효자로 이름을 날린 그는 청년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직장에 근무하면서도 서울이나 부산 출장 일이 아니면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만큼 효성이 지극했다. 퇴근이 조금 늦으면 어머니는 우정분을 시켜 마중을 나가게 했다.
전쟁이 나서 피난길에 올랐을 때 우종석 집안은 열차를 이용하는 행운을 얻었다. 우종석이 기관사였기에 방치되었던 열차를 그가 운전하고 가족들 일부는 타고, 일부는 매달려 낙동강까지 갔다.
그런데 기차는 낙동강 앞에서 멈춰야 했다. 헌병이 제지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다리를 끊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도 지나갈 수 없소." 사정을 했지만 군인들은 단호했다. 우종석 가족은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이 대화리로 돌아왔을 때는 집에 있던 가축과 식량이 인민군 손을 탄 뒤였다. 이것이 우종석 가족이 '잔류파'로 찍히게 된 이유였다.
우종석이 대전 산내에서 '이적행위'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학살된 이후, 그의 아들은 7세에 병에 걸려 죽었다. 딸은 남대문시장에서 옷가게를 크게 하다가 사업에 실패하고 2014년 사망했다. 우종석에게 남은 가족은 여동생 우정분(85)·우매자(82) 자매뿐이다. 이제 그녀들의 나이는 여든을 훌쩍 뛰어 넘었다.
▲ 우정분-우매자 자매 ⓒ 박만순
우매자는 막내가 초등학교 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고 말한다. "막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요,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었는데(1979년), 막내가 영문을 몰라 울지 않자, 담임선생님이 '빨갱이 자식이라 울지도 않는다'며 혼찌검을 냈어요"라고 회고한다. 우정분 역시 친정 엄마가 죽을 때까지 오빠가 산내에서 죽은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엄마의 지병이 도질까 걱정이 돼서였다.
마음의 상처를 간직한 우정분·우매자 자매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있다. 그것은 오빠의 명예회복이다. 69년 전 엄마를 따라 다니며 오빠의 무죄를 주장하는 '진정서'에 서명을 받았던 우정분과 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뒷바라지했던 우매자 자매의 표정은 결연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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