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40708/1/BBSMSTR_000000010227/view.do


신라, 대동강서 唐 군량선 격침적의 숨통을 죄다

기사입력 2014.07.07 17:43 


<114> 당의 침공과 신라의 대응


신라 인적자원 보충 절실해  백제인 구성 ‘백금서당’ 운영

대기병 장창보병부대 창설   당 기병의 일방적 우세 꺾어


평양의 대동강 전경. 정면으로 양각도 호텔(원 안)이 보인다. 671년 9월 당군 4만은 평양에 전진기지를 건설하고 대동강 수계를 이용해 보급을 받으려고 했다. 사진=김진황


세계 최강국 당나라와 전쟁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인적 자원의 감소가 예상되는가? 근 100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전투에서 더 많은 피를 흘렸으며, 민간인들은 더욱 빈번하게 공격을 당했다. 재산은 일상적으로 파괴됐고, 군대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규모의 팽창은 전장과 군인들을 더욱 효율적인 질병인자로 만들었다. 660년 13만 당군이 백제에 가지고 온 전염병이 이듬해 신라로 번져 많은 사람이 죽었고, 천연두는 어린아이들을 싹 쓸어갔다. 영양실조는 전염병의 시녀였다. 장기간의 전쟁기에 태어난 아이들은 영양실조 상태에 있으며, 그것은 허약한 면역 상태로 이어진다. 신라인들은 전염병에 감염되는 것과 영양실조의 상관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질병이 입김만 불어도 사람들은 거꾸러져 버렸다.


백제인 사단 백금서당 창설


신라는 인적 자원 보충을 위해 그 눈을 내부에 고정시키지 않고 외부로 돌렸다. 하나는 저절로 풀렸다. 설인귀의 군대가 청해호 대비천에서 토번군에게 궤멸된 670년 8월 신라 문무왕은 고구려에서 투항한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정예 병력 1만과 그것을 받쳐 줄 수 있는 백성들이었다. 고구려인 유치는 가히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모자랐다.


나당전쟁은 살아있는 인간 사냥과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라는 669년 어느 시기부터 당나라의 웅진도독부가 지배하고 있던 백제에 들어가 인간들을 잡아왔다. 당고종은 진노했다. 하지만 김흠순이 당 고종에게 사죄하러 간 사이에도 그 일은 지속됐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670년) 가을 7월에 (문무)왕이…略…군사를 내어 백제를 쳤다. 품일·문충·중신·의관·천관 등이 63성을 쳐서 빼앗고 그곳 사람들을 내지(內地:신라)로 옮겼다.”


백제 지역 63개 성의 인력은 소중한 자원이었다. 신라로 옮긴 백제인들은 신라의 중앙군단 백금서당으로 편제됐다. 백금서당의 장군이나 군관들은 모두 신라인이었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도 거의 10년간 저항한 것을 보더라도 백제인의 신라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했던 것이다. 저항적인 백제인을 신라군으로 조직하는 것은 어쩌면 생소한 것이며, 무장시켜 실전에 투입한다는 것은 모험이다. 당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서 그들의 투항은 치명적이다.


그렇다고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670년 5월 만주에서 정찰을 하고 돌아온 신라군은 향후 당나라 휘하의 말갈·거란 기병이 한반도 중북부 평야 지대를 휩쓸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신라에는 대규모 기병을 양성할 말이 없었다. 물론 훈련된 기병이나 말을 훈련시킬 목동의 수도 턱없이 모자랐다. 기병을 양성해 기병을 막아낼 시간과 방도가 애초에 없었다. 그것은 산악국가의 타고난 운명이었다.


대기병 장창보병 사단 창설


새로운 대기병(對騎兵) 전술을 개발하고 여기에 특화된 보병 전문 군단을 만들어 내야 했다. 장창당(長槍幢). 흑의장창말보당(黑衣長槍末步幢)은 이러한 전황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기병 보병조직이었다. 장창당에 관한 ‘삼국사기’ 무관조 기록을 보면 기병(騎兵)이 결여되고, 지극히 보병적(步兵的)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볼 때도 장창보병(Pikeman)은 기병이 절대적 열세일 때 조직되는 군사조직이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언제나 존재했다. 중국의 한(漢)·당(唐)·송(宋)에서 확인되며, 서양의 로마·잉글랜드·스코틀랜드·플랑드르·스위스에서도 볼 수 있다.


전쟁사가 베르부르겐(J. F. Verbruggen)에 의하면, 중세유럽에서 장창은 보병이 대기병(對騎兵) 전투를 하는 데 있어 기본병기였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장창(長槍)은 길고 육중했으며, 창의 끝이 굵었는데 이는 창의 밑을 땅에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육중한 말이 빠른 속도로 달려올 때 창(槍)을 땅에 고정시키지 않고서는 그 힘에 밀려날 뿐만 아니라 치명상을 줄 수도 없다. 따라서 장창 1개에는 2명의 병사가 필요했으며, 한 사람은 장창을 땅에 고정시키고 다른 한사람은 창의 각도를 잡았다고 한다.


이때 장창 보병 대열은 주로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를 잡아 강을 등지고 배수진을 쳤다고 한다. 여기서 배수진이란 결사적인 항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적의 측면공격이나 후면공격을 예방하는 전략적 위치 선점이었다.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평지에서는 원진(圓陣) 대열을 구사했다. 장창이 겨냥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말(馬)의 가슴이나 목이었다. 기병 선두를 낙마시켜 전기병대(全騎兵隊)의 흐름을 정체시키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것이다. 정체된 기병이란 기동성을 상실한 무력한 존재다. 차가 밀리듯이 막혀 있는 기병은 밀집돼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무기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 이때 장창보병의 역습을 받으면 치명적이다.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자국을 지키기 위해 제작 비용이 싼 장창으로 무장한 보병부대를 조직해 대항했다. 신라는 일반 사단 예하에도 장창보병부대인 흑의장창말보당을 다수 설치했다. 그 수는 신라 6정(六停)의 6개 사단 가운데 대당(大幢)과 한산정이 각각 30개와 28개로 가장 많고, 나머지 사단에 각각 20개를 배치했다. 신라의 중앙군단 구서당 9개 사단 가운데 백금서당을 제외한 8개에도 각각 24개에서 20개의 흑의장창말보당이 배치됐다. 신라군 전체 비율에서 장창보병의 수는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당전쟁기 말갈·거란 기병의 대규모 내습이 신라군 조직에 이토록 뚜렷한 흔적을 남겨놓았던 것이다. 대규모 기병 쇄도는 신라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현상이었다. 신라의 장창보병부대 창설과 증강은 평야지대 전투에서 당 기병의 일방적인 우세를 꺾어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백제인 부대 백금서당에는 기병을 막아낼 수 있는 장창보병이 없었다. 이는 백금서당이 기병의 공격에 정면 노출돼 있었음을 말해준다. 백금서당은 기병의 급습을 방어하기 위해서 신라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대기병 방어의 구조적인 의존은 백제인들의 이탈을 방지하는 작용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 하구에서 막아낸 첫 침공


671년 9월 당의 장군 고간(高侃)이 이끄는 말갈과 거란 기병 4만이 평양에 도착해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고 대방(帶方:황해도) 지역으로 침입해 왔다. 그러나 해상을 통한 그들의 보급에 이상이 생겼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671년) 겨울 10월 6일 당나라 조운선 70여 척을 공격해 낭장(將) 겸이대후(鉗耳大侯) 와 병사 100명을 사로잡았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급찬 당천(當千)의 공이 첫째였으므로 사찬의 관등을 주었다.”


당이 육상 보급으로 황해도까지 남하한 4만 대군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풀이 없는 겨울에 말을 먹이기 위한 건초나 곡물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곡물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말은 사람의 12배를 먹는다. 언제나 중국인들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들이 북서 남으로 사다리를 이루고 있는 한반도의 강들을 보급로로 이용하려 했다. 당군이 평양에 둥지를 틀었으니 대동강 입구로 보급함대가 들어올 것이 뻔했다. 그곳에 매복한 신라 수군이 보급품을 잔뜩 실어 둔한 배 70여 척을 급습했다. 그들은 가벼운 신라의 전함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미 겨울에 접어든 시점에서 보급이 단절된 당군은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듬해인 672년 7월에 다시 침공해 왔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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