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dn.d_0047_0040 (PDF 파일)
* "Ⅲ. 한성의 고구려국 성립과 대당전쟁" 중 14/31~17/31 내용만 가져와서 내용에 맞게 제목을 달았습니다.

백수성의 위치 
최재도(한성백제박물관 연구원)  2015년 3월 31일

(전략)

이렇게 한성의 고구려국이 정비되는 1년여 동안 당군은 안시성 등의 부흥군을 공격하느라 한반도로 진군하지 못하고 있었다. 42) 671년 9월 고간이 평양에 도착하였으나, 43) 조운선 70여 척이 공격당하여 퇴각하였고, 44) 이듬해 7월 재침입하여 45) 여·라연합군과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이게 된다. 


Ⓚ  문무왕 12년(672) 8월에 당나라 군사가 韓始城과 馬邑城을 공격하여 이기고, 군사를 白水城에서 500보쯤 떨어진 곳까지 전진시켜 군영을 설치하였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맞아 싸워 수천 명을 목베었다. 高侃 등이 후퇴하자 石門까지 뒤쫓아가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하였다. 대아찬 曉川, 사찬 義文, 山世, 아찬 能申, 豆善, 일길찬 安那含, 良臣 등이 죽임을 당하였다. 46)


Ⓛ  함형 3년(672) 12월 高侃이 우리의 남은 무리와 白水山에서 싸워 그들을 깨뜨렸다. 신라가 군사를 보내 우리를 구원하였으나, 高侃이 쳐서 이기고 2천 명을 사로잡았다. 47)


Ⓜ  함형 3년(672) 겨울, 左監門大將軍 高侃이 橫水에서 신라의 무리를 대패시켰다. 48)


사료의 백수성, 백수산, 횡수는 유사한 지역으로, 세 사료 모두 신라군이 등장함으로써 양국이 지속적인 협력관계였음을 보여준다. 평양에 진지를 구축한 고간은 한시성과 평양 인근의 마읍성 49)을 함락하였는데, 이것은 한성의 고구려국이 평양 이남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음을 보여준다. 연합군은 백수성에서 승리하고 고간을 쫓아 석문 50)에 이르렀는데 공을 다투어 병력을 분산하는 바람에 대패하였다. 51)


대당전쟁 과정에서 논란이 되는 점은 백수성의 위치다. 백수성은 재령강 52) 또는 예성강 하류 53)로 비정되는데 백수성이 재령강일 경우에는 고구려군이 당의 공격에 밀리지 않고 4개월간 대등하게 싸운 것이 되지만, 예성강 하류일 경우에는 전투가 발발한지 한 달 만에 황해도 전역을 상실하고 예성강 하류까지 밀려난 것이 된다. 그런데 예성강 하류로 보기에는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첫째, 전투과정에서 한시성·마읍성·백수성 등의 지명은 보이지만 한성 고구려국의 중심이자 전략적 거점인 한성이 함락당했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사료 Ⓚ가 상세한 기록임을 감안할 때 대동강에서 예성강으로 전장이 급격하게 바뀐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지도 1> 황해도 석문과 주변지역


둘째, 평양에서 주요성들을 점령해가며 한 달 만에 예성강 하류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661년 8월 평양을 공격한 소정방에게 군량을 운송한 김유신이 임진강에서 평양까지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보름 정도다. 54) 이동 루트나 조건은 다르지만 55) 당군은 진군로에 위치한 성들을 함락하여 보급로와 퇴로를 확보해야 했다. 이동시간을 제외하고 불과 보름 동안 평양에서 예성강 하류에 이르는 성들을 점령했다고 보기 어렵다. 


셋째, 백수성에서 패배한 당군이 석문으로 퇴각했다는 점이다. 예성강 하류에서 패배한 당군과 이를 쫓는 여·라 연합군이 <지도 1>에서 보듯이 엄청난 거리를 추격하여 석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백수성은 재령강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56)


(후략)




 42) 『자치통감』 권202, 고종 함형 2년 7월, “高侃 破高麗餘衆 於安市城”.


 43) 『삼국사기』 권7, 문무왕 11년 9월, “唐將軍高侃等 率蕃兵四萬到平壤 深溝高壘 侵

帶方 ……”. 


 44) 『삼국사기』 권7, 문무왕 11년 9월, “…… 冬十月六日 擊唐漕船七十餘艘 捉郞將鉗耳大侯 士卒百餘人 其淪沒死者 不可勝數 級湌當千 功第一 授位沙湌”.


 45) 『삼국사기』 권7, 문무왕 12년 7월, “唐將高保率兵一萬 李謹行率兵三萬 一時至平壤作八營留屯”.


 46) 『삼국사기』 권7, 문무왕 12년 8월, “攻韓始城馬邑城克之 進兵距白水城五百許步作營 我兵與高句麗兵逆戰斬首數千級 高侃等退追 至石門戰之 我兵敗績大阿湌曉川 沙湌 義文 山世 阿湌 能申 豆善 一吉湌 安那含 良臣等死之”.


 47) 『삼국사기』 권22, 함형 3년 12월, “高侃與我餘衆 戰于白水山破之 新羅遣兵救我 高侃擊克之 虜獲二千人”.


 48) 『구당서』 권5, 고종 함형 3년, “是冬 左監門大將軍高侃 大敗新羅之衆於橫水”.


 49) 『삼국사기』 권22, 보장왕 20년(661) 8월, “蘇定方 破我軍於浿江 奪馬邑山 遂圍平壤城”라 하여 마읍성이 평양 근처임을 알 수 있다. 


 50)  황해도 서흥군 서북쪽에 있는 雲磨山에 石門寺가 있는데, 절 이름이 지명에서 따온 듯하므로 석문을 그 부근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119쪽).


 51) 『삼국사기』 권43, 김유신전 하 원술전, “初法敏王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有之 唐高宗大怒遣師來討 唐軍與 靺鞨營於石門之野 王遣將軍義福 春長等禦之營 於帶方之野. 時長槍幢獨別營 遇唐兵三千餘人捉送大將軍之營 於是諸幢共言長槍營獨處成功必得厚賞吾等不冝 屯聚徒自勞耳遂各別兵分散 唐兵與靺鞨乘其未陣擊之吾人大敗 將軍 曉川 義文等死之”.


 52)  池內宏, 1930, 앞의 글, 439~440쪽.


 53)  이병도, 1977, 앞의 책, 118쪽.


 54)  김유신은 662년 1월 23일 칠중하(임진강)를 건너 산양에 이르렀고 2월 1일 장새(황해도 수안)를 거쳐 6일에 양오(평양 강동)에 이르러 당에게 군량을 넘겨주었다. 가는 도중 길이 험해 군량을 소와 말에 옮겨 싣고 고구려군을 피해 험하고 좁은 길을 이용하였으며, 고구려군과 한 차례의 전투도 벌이면서 걸린 시간은 약 보름 정도다. 


 55)  이상훈(2012, 「662년 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 107쪽)은 칠중하에서 장새까지의 거리가 약 96km인데 7일 정도 소요되었기 때문에 1일 평균 약 14km의 속도로 행군하였다고 하였다. 고대의 행군속도가 1일 30리(12km) 내외인 점, 군량 수송을 위해 수레와 우마를 대거 운용해야 했던 점, 혹한기에 적지의 소로를 이용해야 했던 점 등을 감안하면 비교적 빠른 속도로 행군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56)  백수성이 재령강 주변에 위치한다면 위에서 지적한 난점들은 자연스레 해결된다. 사료 Ⓚ에서 한성을 포함한 황해도 전역의 전투가 누락된 것이 아니라, 당군이 한시성·마읍성 전투 이후 재령강 주변의 백수성으로 이동한 것이므로 자연스럽다. 또, 평양에서 성들을 점령해가며 재령강에 도착하는 데 한 달이면 충분한 시간이며, 재령강 인근에서 전투를 했다면 당군이 가까운 지역인 석문으로 퇴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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