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3945


"화성행궁 앞에 기업 브랜드?…문화공간 훼손!"

[공공미술관을 시민의 품으로 연속 기고·③] '장소 특정성' 개념으로 살펴본 미술관 명칭

최준영 작가, 거리의 인문학자 2015.02.12 04:09:40

    

최근 수원시에서 공공미술관 명칭에 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 그 중심인 화성행궁 앞에서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이 미술관은 수원시가 부지를 제공하고 현대산업개발(대표이사 정몽규)이 건축해 수원시에 '기부채납'하는 미술관이다. 올해 6월 완공해 10월에 개관할 예정이다.


이 공공미술관의 명칭이 현재 '수원시립 아이파크 미술관'으로 잠정 결론이 난 상태다. 이에 수원지역의 문화예술인과 시민사회단체들이 문화와 공공성을 헤치는 명칭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에 네 차례에 걸쳐 관련 기고를 싣는다. 세 번째 기고는 최준영 작가가 보내왔다. 편집자. 


공공미술관을 시민의 품으로 연속 기고  


지금 수원에서는 한창 건립 중인 시립미술관의 입지와 명칭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발단과 경위는 앞선 기고들을 통해 충분히 소개되었을 터, 여기서는 쟁점 중의 하나인 '미술관의 입지와 명칭이 갖는 지역 정체성과의 상관성'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공공미술의 개념이 본격 수용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였다. 공공미술은 자기만족적인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거부감에서 출발했다. 더 이상 폐쇄적인 작업장에 미술 스스로를 유폐할 것이 아니라, 대중과 소통하는 대화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싹트면서였다. 공공미술의 탄생과 더불어 주목할 것은 미술과 공간, 즉 장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미술이 결합된 장소는 자연과 인간,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와 개념을 만들어 냈고 그의 확장이 곧 '장소 특정성'(site-specificity) 미술로 발돋움했다. 


지난 반세기 우리의 도시개발의 양상은 늘어나는 주거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재개발과 난개발이 주를 이루었다. 그로 인해 기존의 도시들은 고유의 문화적 향취를 잃어버리고, 그 자리엔 콘크리트 더미의 회색도시가 들어섰다. 세기말, 회색도시에 문화와 예술을 접목해서 도시의 재생은 물론이고 도시민의 막힌 가슴을 뚫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싹트기 시작했고, 일군의 예술가들의 실천이 마침내 공공미술이라는 개념을 도시와 마을에 뿌리내렸다. 그로부터 도시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했으며 장소에 대한 예술적 가치와 의미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다산인권센터  

 

공공미술과 '장소 특정성'(site-specificity) 미술의 출현 

  

공공미술의 출현 이후 도시의 장소에 대한 실질적인 정의가 바뀌기 시작했다. "물리적 근거가 있는 고정적이고 실제적인 입지로부터 유동적인 가상의 담론적 벡터로 전환"(권미원,<장소 특정적 미술>)된 것이다. 그로부터, '장소에 의해 규정된(site-determined), 장소 지향적인(site-oriented), 장소를 참조하는(site-referenced), 장소를 의식하는(site-conscious), 장소에 반응하는(site-responsive), 장소와 관계된(site-related)'과 같은 용어들은 최근의 장소 특정적 미술의 다양한 변화를 설명하는 새로운 용어로 등장했다. 


'장소 특정성' 미술은 공공미술의 한 축인 미니멀리즘의 교훈으로부터 출현했다. 처음에는 장소에 대한 현상학적이고 경험적인 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었는데, 이때 장소는 미술의 이데올로기적 시스템을 규정하고 유지하는, 상호 관련된 공간과 경계들로 새롭게 이해되었다.  


공공공간으로서의 미술(art-as-public-spaces)은 미술관을 단순히 지리적 입지나 건축적 배경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 즉 지역공동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상정한다. 장소가 공동체로 이행하고, 공동체가 장소로 변환함에 따라 미술가의 역할, 미술의 공공적 기능, 공동체의 정의에 대한 질문들이 더욱 긴급한 문제가 된 것이다.   


이쯤 수원시립 미술관의 입지와 관련한 문화적, 공동체적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수원시립 미술관의 입지는 수원의 전통과 문화가 응집되어 있는 화성행궁 광장이다. 이러한 입지는 곧 새로 들어설 시립미술관이 단지 하나의 건축물이 아니라 향후 수원 문화 정체성의 주요한 기표가 될 것임을 예감케 한다. 그럼에도 '주민자치 1번지'를 기치로 내걸고 있는 수원시는 미술관의 설계와 디자인, 입지의 적합성, 심지어 미술관의 명칭과 관련해서 지역의 예술인은 물론 시민의 의견을 묻는 과정조차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거버넌스의 개념을 무색케 했다. 이는 행정상의 실수라기보다 의도된 일방통행 행정의 선례이며, 결과적으로 수원시가 시민의 반발을 자처한 셈이다.


ⓒ다산인권센터  

 

거버넌스의 개념을 무색케 한 수원시의 일방적 문화행정 


도시는 인간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하나의 생명체처럼 성장과 쇠락을 겪는다. 그리고 도시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다. 부산의 마을 공공미술 사업에 대한 꼼꼼한 기록을 담은 <공공미술 도시의 지속성을 논하다>(구본호 지음, 산지니, 2013)에는 공공미술이 단지 일시적인 사업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마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며, 무엇보다 시민과 지자체가 함께 하는 사업일 때 의미가 커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건축가 양상현은 "우리가 사는 환경을 살 만한 곳이 되게 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일"이며 "시민의 광범위한 참여가 우리의 자연과 도시환경을 지키는 힘"(양상현, <거꾸로 읽는 도시, 뒤집어 보는 건축>, 동녘, 2005)이라는 말로 공공미술과 시민참여형 도시 디자인의 의미를 정리한다. 


서양어에서 '정치'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인 '폴리스polis'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정치는 우선 공간의 문제로 인식되어야 한다. 따라서 도시의 문화공간을 만드는 문제에서 시민참여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정치이면서 동시에 지역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중요한 문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새삼 주목할 것은 인문학자 김찬호가 주장하는 '커뮤니티 디자인'(김찬호, <도시는 미디어다> 책세상, 2002)의 개념이다. 


'커뮤니티 디자인'은 근대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과 자아 사이의 유기적인 연결고리가 끊어져버린 지역 공간 속에 다시금 '역사성'과 '장소성'을 심는 작업이다. 지역사회를 조화로운 생명의 질서와 문화의 향기가 담긴 건실한 공공영역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또한 커뮤니티 디자인이다. 그것은 곧 지역의 구심력과 문화적 이미지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의 과제로 이어진다. 문화가 경제의 성패를 좌우하는 지식 정보사회에서 지역은 그 인프라를 구축해야 하는 구체적인 장(場)이 된다.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참여와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되는 특유의 지역문화는 기존의 표준화된 국민문화를 대체함과 동시에 다양한 지구촌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구성하는 활력소가 될 것이다.  


'커뮤니티 디자인'과 공공공간으로서의 미술관 


장소 특정성 미술은 이런 맥락에서 새롭게 중요성을 얻는다. 현재 전 지구적인 경제적 위계질서가 경쟁적으로 재편되면서 지역과 도시를 홍보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나고 있는데, 장소 특정성은 대단히 매력적인 특성, 곧 장소(place)의 '구별적 특징'이나 독특한 '지역 정체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소 특정성은 다양한 도시들의 개별성과 정체성을 차이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만들어버리는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지금까지 <장소 특정적 미술 ONE PLACE AFTER ANOTHER>(권미원 지음, 김인규`우정아`이영욱 공동번역, 현실문화 간, 2013)을 중심으로 현재 건립 중인 수원시립 미술관의 입지에 대한 문제들을 살펴봤다. 미리 결론하건대 장소(place)는 정체성의 요체이며 근간이다.  


수원의 문화적 성소인 화성행궁 광장에 현대적 건축인 미술관이 입지하는 것은 좋은 의미로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일 수 있다. 그러나 미술관의 이름에 특정기업의 브랜드가 들어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기보다는 화성이라는 전통의 문화공간을 기업의 홍보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하는 일이다. 문화공간의 훼손이며 수원의 문화정체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입지도, 명칭도 시민의 동의와 참여 없이 지어지는 수원시립 미술관은 자칫 '플롭 아트'(Plop Art, 거대한 추상조각 형태로 된 공공미술을 비꼬아 부르는 속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일련의 미술작업 혹은 건축물이 주변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과 무관하게 '물에 풍덩하고 떨어지듯'(plopped) 공공장소에 떨어졌다는 의미로 플롭 아트라 부른다. 바라건대 수원시립 미술관이 플롭 아트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수원시는 다시금 '미술관의 입지와 명칭이 갖는 지역 정체성과의 상관성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다산인권센터  


전통과 현대의 조화인가, 특정기업의 '홍보관'인가? 


앞서 논하였다시피 공공미술에 있어서 장소의 의미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울러 명칭 또한 그에 못지않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봐야 한다. 앞서 <장소 특정적 미술>에서 밝혔던 바, "정부, 기업, 교육, 종교기관이라는 맥락의 틀 안에서 세워진 미술관은 해당 기관의 상징물로 이해될 위험에 처한다." 모든 맥락은 나름의 틀과 나름의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갖는다. 그 맥락의 구속에 대항하여 미심쩍은 이데올로기와 정치권력을 긍정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역 문화공간의 명칭과 관련해서 필자 또한 고백할 것이다. 필자는 수원시민이다. 그러나 부끄러운 수원시민이다. 평소 화성의 관문인 사대문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의 이름이 '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저 '북문, 남문…'으로 부른다. 일본 제국주의가 획책한 우리 문화 말살 정책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 입에 붙은 이름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이름이 중요한데 한번 잘못 붙여진 이름은 두고두고 부작용을 낳는다. 뒤늦게 손을 써본들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공자는 "올바른 정치를 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느냐"는 자로(子路)의 질문에 "이름부터 바로 잡겠다"고 했던 것일 테다.


* '수원시민미술관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화성행궁 앞 공공미술관 명칭, 아파트 브랜드 사용반대' 온라인 서명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 온라인 서명운동 바로가기 http://goo.gl/KpKX4d) 


* 이 글은 수원 지역 신문인 <대안미디어 너머>에도 실립니다. 


최준영 작가, 거리의 인문학자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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