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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기획 - 친일파 후손의 70년]해방 후 ‘반민법’ 무력화… 수십년 흘러 후손들 ‘알짜 땅’ 거의 처분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입력 : 2015-01-01 22:12:21ㅣ수정 : 2015-01-01 22:19:20


친일파 재산 환수 어떻게


친일파들은 국권 피탈 당시 이미 엄청난 부를 쌓고 있었다. 1911년 무렵 박영효, 이완용, 송병준, 민영휘 등의 친일파는 재산이 50만엔 이상이었다. 현재 가치로의 환산은 어렵지만 100억원대로 추정된다. 국운이 기울고 나라를 빼앗기는 혼돈의 시기가 그들에겐 재산을 늘리는 절호의 기회가 된 셈이다.


민영환가의 식객이었던 송병준은 1905년 민영환이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해 자결하자 그 부인을 속여 민영환가의 토지를 탈취했다. 이완용은 일제로부터 받은 하사금도 엄청났지만 매관매직과 뇌물로도 축재를 서슴지 않아 ‘경성 최대의 현금 부호’로 불렸다. 이완용이 총리대신으로 있는 동안 그의 집은 인사청탁하는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토지대왕’ ‘조선 제일의 갑부’로 불렸던 민영휘는 소작료와 고리대금업 투자로 부를 축적했다. 일제 협력의 대가로 개발 정보를 빼돌리거나 특혜 융자를 받는 일도 많았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제정됐던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은 친일파의 부정축재를 단죄하기 위해 사형·징역형과 함께 재산몰수형도 부과했다. 그러나 이 법으로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은 친일파들의 방해로 좌절됐다. 결정적으로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반민법의 모든 조치를 무효화하는 법률까지 공포된다. 반민법으로 실형이 선고된 자들은 모두 석방하고 재산이 몰수된 이들에게는 재산을 반환해야 했다.


친일재산 환수가 다시 논의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친일파 후손들 덕분이었다. 1990년대부터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로부터 ‘조상땅 찾기’ 소송을 제기해 친일매국 행위로 취득한 재산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완용의 후손은 1992년 서울 북아현동의 시가 30억여원의 땅 2372㎡(712평)를 돌려달라고 소송을 해 되찾은 뒤 이를 팔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몰염치한 행동에 국민적 분노가 들끓었다. 하지만 법률 제정은 난관을 거듭했다. 17대 국회 들어서야 최용규·노회찬 의원 등이 발의한 ‘친일반민족행위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전원 불참한 가운데 통과됐다.


특별법에 따라 2006년 출범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4년의 활동기간 동안 시가 2100억여원의 친일재산에 대해 국가귀속 결정을 내렸다. 대상 친일행위자만 해도 168명, 토지 규모만 1113만9645㎡에 이르렀다. 하지만 광복 60년이 지난 뒤 시작한 재산환수는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었다. 


위원회에 참여했던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 연구위원은 “알짜배기 땅은 모두 처분됐고 남아 있는 건 주로 분묘가 있는 임야여서 임야 중심으로 환수될 수밖에 없었다”며 “해방 직후에 반민법에 따라 재산몰수가 제대로 됐더라면 동산, 고서화, 금까지도 되찾아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위원회 활동이 종료된 후에는 법무부가 친일행위자 재산 국가귀속 관련 소송업무를 계속하고 있다. 후손들이 국가귀속 결정에 불복해 낸 행정소송에서는 69건 중 66건에서 승소했다. 특별법 시행 이후 친일재산을 처분한 후손들의 부당이득 반환을 청구하는 국가소송은 14건 모두 승소했다. 아직까지 남은 행정·국가 소송 4건 중 2건이 이해승의 손자 이우영 그랜드힐튼호텔 회장이 낸 것이다. 1건은 친일파 민영은의 토지 환수 관련 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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