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64367


세종의 한글 반포, 실제는 드라마와 달랐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네 번째 이야기

11.12.01 15:19 l 최종 업데이트 11.12.02 17:47 l 김종성(qqqkim2000)


▲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으로 열연 중인 한석규 ⓒ SBS


SBS <뿌리 깊은 나무>(수·목 9시 55분)에서, 훈민정음 반포를 앞둔 세종(한석규 분)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수렁에 빠졌다. 몇몇 측근을 제외하고는 조정 전체가 새로운 글자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사대부의 천하'를 꿈꾸는 비밀조직 밀본의 배후 조종 하에 조정 전체와 선비들이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드라마 속의 조정 관료들은 사실상 총파업에 돌입했다. 그들은 출근 대신 시위를 선택했다. 대신들은 임금과 신하의 학술 세미나인 경연에도 불참했다. 경연장에 나온 세종이 허탈하게 그냥 돌아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격렬히 반대하는 것은, 새 글자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심지어 밀본은 광평대군(서준영 분)과 궁녀 소이(신세경 분)에 대한 납치를 시도한 뒤, 거리 곳곳의 공개 대자보를 통해 세종을 압박해 들어갔다. 글자를 포기하지 않으면 광평대군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드라마 속 세종은 훈민정음 때문에 자칫 왕권까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훈민정음 창제는 한자 중심의 문자생활에 대한 도전이고 혁신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위와 같은 드라마 속 상황이 상당히 그럴싸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드라마 내용은 부분적으로만 사실과 부합할 뿐이다. 


훈민정음 반포 후폭풍, 그리 강력하진 않았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반대 목소리가 강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실학자 이긍익이 편찬한 역사서인 <연려실기술> 권3에서는 "그때 주상께서 언문을 창제하자 집현전 선비들은 불가하다는 뜻을 집단적으로 표시했으며, 심지어는 상소를 올려 극단적으로 논의한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극단적으로 논의한 사람들'이란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을 지칭한다. 


그런데 최만리 등에 대한 세종의 대응을 보면, 이 문제가 조정을 파국으로 몰고 갈 정도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세종 26년 2월 20일자(1444년 3월 9일)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를 강력히 반대한 최만리·신석조·김문·정창손·하위지·송처검·조근을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다음 날 곧바로 석방시켰다. 이 중에서 추가적인 처벌을 받은 것은 김문·정창손뿐이었다.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훈민정음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한 파장이나 후폭풍은 드라마에서처럼 강력하지 않았다. 세종이 반대론자들을 가두었다가 곧바로 풀어준 데서도 그런 분위기가 잘 나타난다. 


▲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 김종성


만약 드라마에서처럼 사대부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면, 세종이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두고두고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고 칭송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요순'은 고대 중국의 전설적 제왕인 요임금과 순임금으로서, 예로부터 대대로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조선 사대부들이 세종을 동방의 요순으로 떠받든 것은, 무엇보다도 세종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방 양반들이 전직 사또를 위해 송덕비를 세워주는 것은, 전직 사또가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았을 것을 전제로 한다. 마찬가지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가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침해했다면, 사대부들이 세종을 해동요순으로 극찬하는 일은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훈민정음 창제가 사대부의 기득권을 위협할 정도까지는 안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대부들도 감탄하게 만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사실,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훈민정음을 수긍하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의 반감을 표출했지만, 얼마 안 있어 그들도 훈민정음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머리가 있기 때문에, 훈민정음의 가치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 권16에서 "(훈민정음이) 소리를 글자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면서 "사람들은 창힐(倉詰)과 주(籒)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기술했다. '창힐'과 '주'는 고대 중국에서 문자 제작에 공을 세운 인물들이다. 그런 인물들 이래로 이런 훌륭한 글자를 만든 것은 처음이라며 세종 당시의 사람들도 감탄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대부들도 중국 글자만 갖고는 문자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사대부들도 얼마 안 있어 훈민정음을 보조적인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상당수의 선비들은 언문 해설서를 옆에 두고 한문 서적을 공부하곤 했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문장가인 어우당 유몽인은 중국 역사서인 <십구사략>을 배울 때 문장 해석이 잘되지 않아서 "언문 해석을 참조했다"고 저서인 <어우야담>에서 회고한 바 있다. 유몽인 같은 대가도 언문 해석을 보면서 한문 서적을 배웠다면, 여타 선비들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관청에 제출하는 문서에까지 이두를 섞어서 사용


조선시대 사람들이 한자만 갖고는 독해는 물론 작문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점은, 관청에서 작성한 혹은 관청에 제출된 공식 문서에서 이두가 사용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자만 갖고 작문할 경우에는 자칫 '콩글리쉬'가 되기 쉽기 때문에 한자 중간 중간에 이두를 삽입했던 것이다. 


예컨대, 조선시대에 관청에 제출된 노비매매 문서의 서두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가 있다. "오른쪽 약정서가 하고자 하는 바는 ……입니다"(右明文爲臥乎事叱段 ……)란 구절이다. 


이 구절이 순전히 한문인 줄 알고 옥편을 뒤적이며 해석할 경우,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오른쪽 약정서'(右明文) 뒤에 나오는 '위와호사질단'(爲臥乎事叱段)은 고대 한문에도 없었고 현대 중국어에도 없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2개의 이두 단어인 '하고자 하는 바'(爲臥乎事)와 '는(은)'(叱段)이 합쳐진 것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한자 작문에 곤란을 느꼈기 때문에, 이렇게 관청에 제출하는 문서에까지 이두를 섞어서 사용했던 것이다. 


▲  광화문광장의 지하 전시관인 ‘세종 이야기.’ ⓒ 김종성


이렇게 한자만으로는 제대로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었기 때문에, 세종 이후에는 관청에서도 이두와 훈민정음을 보충적으로 사용했다. 일부의 극렬 반대론자들만 제외하고 조선시대 사람들은 훈민정음을 비교적 묵묵히 받아들였고, 필요한 경우에는 훈민정음을 도구로 혹은 한자·훈민정음·이두를 도구로 문자생활을 영위했다. 


사대부들이 세종을 격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이런 점을 본다면, 훈민정음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드라마 속의 풍경이 현실과 상당히 동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은 열렬한 환영의 대상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열렬한 거부의 대상도 아니었던 것이다. 


훈민정음이 열렬한 환영의 대상도 열렬한 거부의 대상도 아니었다면, 세종은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까지 사대부들로부터 성군이란 칭송을 들은 것일까? 사대부들이 그를 해동요순이라고 격찬한 이유는 무엇일까?


<연려실기술> 권3이나 세종 32년 2월 17일자(1450년 3월 30일) <세종실록> 등을 종합하면, 세종이 해동요순이라 불린 것은 동북방 여진족을 제압하여 국경을 안정시키고 각종 문물제도(과학·음악 등)의 기초를 확립하는 한편, 사대부들과 함께 학문을 발전시키고 그들과 더불어 경연을 즐겼기 때문이다. 


학문을 발전시키고 경연을 존중하는 것은 사대부의 취향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특히 경연은 임금이 사대부의 의견을 듣는 자리였기 때문에, 경연을 존중하는 임금은 대대로 사대부의 존경을 받았다. 외적을 잘 방어하고 문물제도를 확립한데다가 이처럼 사대부들이 좋아할 만한 일들까지 많이 했기 때문에, 세종은 그들로부터 대대로 해동요순이란 격찬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세종의 치세가 국민적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훈민정음 창제로 인한 갈등은 세종에 대한 평가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세종을 비판해야 할 이유보다는 칭송해야 할 이유가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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