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세종은 '해동의 요순'이 아니었다
이기환 |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han.co.kr  입력 : 2012-10-31 10:25:57ㅣ수정 : 2012-11-01 14:12:31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뭐라 이름을 짓지 못하여 ‘해동(海東)의 요순(堯舜)’이라 했다.”

1450년 세종대왕이 훙(薨)했다. 당대 사람들은 대왕의 치세를 두고 태평성대의 상징인 요순시대에 견줬다. 사실 지도자가 ‘요순’이라는 칭호를 역사서에 남기면 그처럼 영광일 수 없다.

임금이 누군지 신경쓸 필요없이 잘 다스린 시대…. 또 해뜨면 일하고 해지면 그만두면 되는 시대…. 그래서 부른 배를 두드리고(鼓腹) 땅을 구르며(擊壤) 노래를 흥얼거리며 살았다는 시대…. 그런 태평성대의 지도자를 빼닮았다는 소리이니 얼마나 좋은 평가인가. 후대의 신하들은 자신이 모시는 임금들에게 “세종대왕과, 세종을 빼닮은 성종을 본받아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세종은 ‘해동의 요순’이라 일컬어졌고, 성종은 ‘세종의 고사’를 따라 간언을 받아들이고 선비를 사랑했나이다. 세종과 성종을 따르는 것이 곧 성인을 본받는 것이라 했습니다.”(<명종실록> 1548년 3월14일)

조선 말기의 형장. 자백할 때까지 때리는 고문의 일종이기도 했다.


■“노비도 하늘이 내린 백성이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세종의 ‘애민정신’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1427년(세종 9년), 집현전 응교 권채 부부가 여종을 학대한 일이 적발됐다. 허락받지 않고 병든 할머니를 문병갔다는 이유로 집 안에 가둬놓고 구더기가 섞인 똥과 오줌을 강제로 먹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권채와 그 아내 정씨는 자백대신에 수사기관의 장인 형조판서에게 책임을 돌리는 등 적반하장의 추태를 부렸다. 

그러자 세종은 장탄식하며 “권채 부부를 형벌로 신문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진실로 차별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과 천인을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 권채가 기어코 복죄(服罪)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형벌로서 신문할 것이다.” 

그러나 임금의 지시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던 것일까. 그로부터 17년 후인 1444년(세종 26년) 임금이 형조에 지엄한 영을 내린다.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다같이 하늘이 낸 백성이다. ~그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무고(無辜)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노비가 죄를 지었거나 말았거나 관에 알리자않고 구타·살해한 자는 옛 법령에 따라 처단할 것”이라고 재차 단호한 의리를 천명한다. 

■죄수의 자식까지 돌보고, 귀휴제도까지 만들다 

이 뿐이 아니다. 죄수들의 인권에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토설할 때까지 주리를 틀고 있느 모습이다,

“각도 관찰사들은 들어라. 올해는 유난히 더위가 심하구나. 그래서 유배형 이하의 죄수는 모두 사면하라. 또 석방되지 않은 죄수는 옥에서 더위 때문에 죽게 될까 내 마음이 몹시 근심된다. 죄수들이 병나지 않게 잘 돌봐 주거라”(<세종실록> 1443년 7월12일) 1448년(세종 30년) 8월25일의 유시를 보라.

“매년 4~8월까지 냉수를 제공하라. 5~7월10일까지 몸을 씻겨라. 매월 한차례씩 머리를 감겨라. 10월부터 정월까지는 옥 안에 짚풀을 두텁게 하라.”

죄인의 인권까지 이토록 세심하게 신경을 쓰시다니…. 지금봐도 감탄을 자아낼 대목이 또 있다. 

“옥에 갇힌 죄수 가운데 홀아비와 과부의 어린 자식들을 돌보지 않으면 아이들이 굶주리고 추워서 죽음에 이를 것이 아닌가. 지금부터는 그 친족에게 주고, 젖먹이 아이는 젖 있는 사람에게 주어라. 또 친족이 없으면 관가에서 거두어 보호하고 기르도록 하라. 잘 돌보는 지 서울에서는 사헌부,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규찰하라.”(1413년 7월28일)

복역 중인 홀아비나 과부의 아이를 국가 차원에서 돌볼 것을 지시한 것이다. 심지어 제대로 돌보고 있는지 지금으로 치면 감사원(사헌부)이나 도지사(관찰사)가 감찰하라고 특별지시했다. 

“주상께서는 일전에 유배중인 도형수 가운데 늙은 어버이가 있는 자에게는 휴가를 줘서 1년에 한번씩 만나보게 허락하고 그 휴가일수는 보두 복역일수에 통산하라고 하셨습니다.”(1444년 7월12일)

요즘의 귀휴(歸休)제도를 이미 세종시대에 시행했다는 것이다. 귀휴제도 자체도 대단한데, 귀휴일수를 복역기간에 산입시킨다는 교지까지 내렸다니….

■여노비는 물론 남편에게까지 준 출산휴가

또 있다. 세종이 관가의 여노비들에게 출산휴가를 대폭 늘려주었다는 소식이다. 1430년 10월19일(세종 12년)의 일이다.

청나라대의 능지처사를 집행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옛적엔 관가 노비의 출산 후 휴가를 7일 주었다. 100일 더 주어라. 또 출산 직전까지 일을 하다보면 미처 집에 가기도 전에 아이를 낳는 경우도 있다. 산전 휴가도 1개월 더 주어라.” 이것도 모자랐는지 4년 후에는 다음과 같이 전교한다.(1434년 4월26일)

“산모에게 출산휴가를 주었지만 남편에게 전연 휴가를 주지 않으니 산모를 누가 돌볼 수 있는가. 이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다니 진실로 가엾다. 이제부터는 산모의 남편도 30일간의 출산휴가를 줘라.” 

참으로 선진적인 성군이 아닌가. 다른 사람도 아닌 노비에게 출산휴가를 듬뿍 주었을 뿐 아니라 그 남편에게까지 한달간 쉬면서 부인을 간호하라 했으니 말이다.

또 조선시대엔 중죄인 가운데 전가사변(全家徙邊)이라 해서 전 가족을 변방으로 쫓아내는 형벌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지나는 각 고을의 수령들은 죄인들을 함부로 취급하고 홀대하기 일쑤였다. 세종은 “이들이 지나가면 각 고을의 수령들은 식량과 의복을 두둑히 공급하라”로 지시했다. 또 “이들 가족이 정착하는 고을은 토지를 주어 구휼하여 생업에 지장없도록 하라”는 교시를 내렸다.(18년11월17일) 

가히 ‘애민정신의 종결판’이 아닐 수 없다.

■미결 사형수가 190명 

그런데 말이다. 이쯤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우선 1439년(세종 21년) 12월15일의 실록을 보자.

“지금 복역 중인 미결 사형수가 190명에 이르자, 임금은 ‘근래 기근이 겹쳐 도적이 흥행하고 분쟁이 더욱 성하여 사형수가 예전보다 배가 된다. 내가 부끄럽게 여겨 깊이 반성한다.’고 말했다.” 

갑신정변 실패후 일본 망명했던 김옥균이 1886년 일본으로부터 추방령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 미국 조계 안에 있는 동화양행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됐다. 조정은 돌아온 김옥균의 시체를 능지처참한 뒤 양화진 부근에 효수했다.

그러면서 세종 임금은 “고의 살인이 아닌 과실치사와 전과 3범의 절도 등은 좀 형을 감하면 어떻겠느냐”고 의정부에 물었다. “의정부가 법을 존중하면서도 사형수의 수를 좀 줄이는 방안이 있는지, 그 법조문을 살펴보고 의논하라.” 

영의정 황희, 우의정 신개 등이 임금의 뜻에 따라 의논한 뒤 “아니되옵니다”라고 반대한다.

“주희(주문공)도 ‘때때로 형벌을 가벼이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지만 형벌이 가벼울수록 패역(悖逆)하여 작난(作亂)할 마음만 자라게 됩니다. 이제 이들이 살아난다면 사람들이 모두 범죄를 가볍게 여겨 범법행위가 날로 늘어날 것이 두렵사옵나이다.”

■요순시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사형수의 숫자를 감하자는 세종의 생각은 중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후대 사람들은 이 대목 또한 세종의 애민정신을 일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칭송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소홀하게 넘어가는 대목이 있다. 바로 세종대에 사형수가 190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가 말하는 ‘요순시대’와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요임금 치세 때는 “한 사람만 죽이고 두 사람에게 형벌을 내렸는 데도 천하가 다스려졌다”고 했다. 나아가 “위엄은 엄격하지만 사용하지 않고 형벌을 두고도 쓰지 않는데 이상적”이라 했다,(<사기> ‘서(書’))

요임금의 뒤를 이은 순임금은 어땠나. 순임금은 정상의 형법을 기물 위에 새겨두고 오형(五刑)에 해당되는 죄를 지은 사람은 유배형으로 낮추었다. 오형이란 묵(墨·얼굴이나 팔뚝에 죄명을 문신), 의(劓·코 베기), 비(剕·발뒤꿈치를 자르기), 궁(宮·거세형), 대벽(大劈·참수) 등을 말한다. 신체에 해를 가하는 벌 대신 유배형으로 경감했다는 것이다. 순임금이 관리들에게 입버릇처럼 했다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엔 능지처사나 참수를 한 뒤에 창이나 긴 막대에 매달아 놓기도 했다.

“신중하라. 신중하라. 오로지 형벌은 신중히 해야 하느니라.(欽哉 欽哉 惟刑之靜哉)”(<사기> ‘오제본기’) 그런 측면에서 사형수가 ‘190명이나 만든’ 세종은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할까. 

■도둑의 창궐…내탕고까지 털리다 

또 살펴봐야 할 반전의 기록들이 있다. 세종시대에는 특별히 도둑이 창궐했나 보다. 

“서울 한복판에서 도둑을 맞는 집이 없는 날이 없고, 이를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거리 위에 들립니다. 이제는 내탕(內帑)의 금작(金爵)과 봉상시의 은찬(銀瓚)까지도 털리니…. 이들을 잡아도 장 몇대나 자자형(얼굴에 죄명을 새기는 벌)에 불과합니다. 죄를 받은 그 날부터 인명을 잔해하고 물건을 약취해서 온 백성이 이를 원망하며 그 고기를 씹고자 해도 어쩔 줄 모르고…. ”(<세종실록> 1435년)

‘도적떼의 고기를 씹고 싶을 정도’였다니 얼마나 포악한 도적이 들끓었다는 것인가. 게다가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탕고에서 금으로 만든 술잔(금작)이, 제사를 관장하는 봉상시에서 제기(은찬)까지 잇달아 털렸다니 오죽했던 것일까. 사실 <대명률>에 따르면 전과 3범의 절도범은 교수형의 극형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절도를 3번 범하면 교수형에 처한다’는 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해마다 국가의 경사나 수재, 혹은 한재 등의 이유로 대사면령이 내려집니다. 전과가 말소되면 그 날로 다시 도둑으로 되돌아가, 재범, 3범, 아니 10여 범에 이르러도, 끝내 형륙(刑戮)을 받지 않는 자도 허다합니다.”

■“도둑의 힘줄을 끊어라”

도둑이 창궐하는 세태를 개탄한 대신들은 계책을 낸다.

“<활민서>를 보면 송나라 때 흉년이 들자 도적떼가 나타나 마을 백성들을 결박하고 쌀을 빠앗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한쪽 발의 힘줄을 끊는 단근형(斷筋刑)의 벌을 내렸습니다. ~단근형은 팔다리를 끊는 것이 아니라, 그 억세고 날랜 힘만 꺾을 뿐입니다. 그러니 생업에는 방해되지 않습니다.”(1436년) 

요컨대 다시는 도적질을 하지 못하게 발뒤꿈치 힘줄을 끊어버린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고심 끝에 이 형벌안을 추인하고 말았다. 

하지만 발뒤꿈치 힘줄을 끊는다고 도둑이 근절되었을까. 물론 아니었다. 1년 뒤인 1437년 7월21일 형조는 “단근형을 당한 뒤에도 절도하는 자는 다리 양쪽의 힘줄을 모두 끊도록 하자”고 건의했다. 세종은 형조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8월12일 힘줄이 끊겼는 데도 걷거나 달릴 수 있는 전과자의 힘줄을 다시 끊게 했다.

“힘줄을 끊겼는 데도 달리고 걷는 자가 있사옵니다. <율문> 보자례(補刺例)에 따라 다시 끊어야 합니다. 단근(斷筋)했을 때의 관리와 옥졸들이 다시 걷거나 뛰는 전과자들의 힘줄을 다시 끊게 해야 합니다.”

■촘촘해지는 법망

그러나 역시 도적질은 끊이지 않았다. 2년 뒤인 1439년(세종 21년) 실록을 보자.

“의정부가 두 번째 힘줄을 끊긴 뒤에도 도적질하는 자가 퍽 많사옵니다. 단근의 입법취지는 힘줄을 끊음으로 인하여 종신(終身)할 때까지 폐인(廢人)이 되어 도적질하지 못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과자들은 힘줄을 끊긴 지 두어 달 만에 또 도적질을 합니다. 지금부터는 왼발의 전근(前筋)을 끊어서 시험해 보게 하소서.”

세종은 의정부의 상소를 따랐다. 세조와 성종 등도 단근형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세조는 1465년 도적이 창궐하자 절도 초범이지만 창고미(倉庫米) 2석(石) 이상·사처미(私處米) 5석 이상인 자는 단근하라고 지시했다.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일컬어졌던 성종 때는 단근의 규정이 더 촘촘해지고 더 엄해졌다. 

“3인 이상의 무리를 지은 떼절도의 경우 주범은 교수형, 종범은 단근과 경면(경面·얼굴에 죄명을 문신)한다. 또 장물이 2관(貫)이상 자 가운데 사형에 해당되지 않는 자는 모두 단근·경면하게 하라. 단근은 왼쪽 다리의 복사뼈 힘줄을 1치3푼 정도 자른다.”(1471년 6월11일)

■불은 그대로 두고, 물만 식히려는 것

갈수록 법이 촘촘해지고 엄중해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고금을 통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는 법정신이다. 

사마천은 <사기> ‘혹리열전’에서 “법망이 촘촘할수록 백성의 간교함은 도리어 악랄해졌다”고 했다.

“법령이란 다스림의 도구일 뿐이다. 진나라 때 법망이 치밀했지만 간사함과 거짓은 싹이 움트듯 일어났다. 그것은 불은 그대로 둔채 끓는 물만 식히려 했기 때문이다. 법망은 배를 집어삼킬만한 큰 고기도 빠져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너그러워야 한다.”

사마천은 공자의 ‘말씀’을 전한다.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릴 때 백성들을 무슨 일을 저질러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오로지 도덕으로 이끌고 예로 다스릴 때 백성들은 비로소 그 부끄러움을 알고 바른 길을 간다.”(<사기> ‘혹리열전’)

그렇다면 세종은 사마천이 말한 ‘불은 그대로 두고 끓는 물만 식히려 한(救火揚沸)’ 것은 아닐까. 즉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대증 요법으로 창궐한 도적떼들을 없애려 한 것은 아닐까.

■“죄인을 능지처사 시켜라.”

그런데 그저 힘줄을 끊는 단근형은 그래도 낫다. 다음 기사를 보라.

“사노 매읍동이 본주인을 때려 죽였으므로 능지처사 시켰다.”(1418년)

“형조가 ‘함길도 북청의 여자 금슬이 간부(姦夫) 정인중과 더불어 본남편과 시어미와 딸을 죽였사오니 모두 형률에 따라 능지처사하게 하옵소서.’라고 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1439년) 

모두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 때의 일이다. 그 뿐이 아니다. 1424년(세종 6년) 8월21일, 세종은 완전히 상반된 명령을 내린다.

“어진 임금이 형벌을 쓰는 목적은 형벌을 범하는 자가 없어지기를 바라기 위함이다. 어찌 차마 무식한 백성을 중하게 법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과인의 형벌을 조심하고 불쌍히 여기는 지극한 뜻에 합치되도록 하라.”

설사 백성이 법을 어기더라도 형벌은 조심해서 내리라는 성군(聖君)의 지엄한 분부였다. 그런데 바로 그 날이었다.

“형조가 ‘평안도 맹산에 사는 군인 이막동의 아내 보배가 병든 남편을 목졸라 죽였고. 경상도 함창의 능지기 김격의 집종이 김격의 아들을 때려 죽였다. 둘 다 능지처사의 법에 해당된다.’고 아룄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씨를 발휘하면서 한편으로는 능지처사의 끔찍한 형벌을 내린 것이다. 물론 죄질에 따라 형벌은 다를 수 있다. 또 그래야 질서가 잡힌다. 따라서 법대로 처단하되 인정을 발휘하는 이른바 ‘실질적인 법치주의자’라는 이름을 얻을 만 하다. 하지만 능지처사라는 벌은 극형 중의 극형이다.

■눈뜨고 볼 수 없는 능지처사

‘능지(凌遲)’는 말 그대로 산이나 구릉의 완만한 경사이다. 그러니까 능지처사는 되도록이면 천천히 고통을 극대화하면서 사형에 처하는 극형인 것이다. 동양에서 능지처사의 역사는 깊다. 은(상)나라(기원전 1600~1046) 갑골문에 나온다. 

“강족(羌族)이 폭동을 일으켰다. 강족 한 사람의 사지를 찢어죽였다.(책)” “강인 15명을 찢어죽일까요.(책)” 

강족은 중원의 은(상)을 위협한 최대 적국이었다. 상당수의 갑골문은 포로로 잡은 강족이 감옥에서 폭동을 일으켜 책형(책刑), 즉 사지를 찢는 극형에 처한 내용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또한 갑골문은 무정왕대(재위 기원전 1250~1192년)부터 전성기를 이뤘다. 따라서 3300년 전부터 능지처사의 일종인 ‘책형’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칼로 사지를 차례차례 베어 죽이는 능지처사는 거란족의 왕조인 요나라 때, 즉 기원후 10세기 때부터 시작됐다. 이후 송·원·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됐다. 능지처사는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극형이었다. 죽을 때까지 칼로 살을 베는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때인 1510년 권력을 남용한 환관 유근은 반역음모를 꾸민 죄로 무려 3357회의 절개형을 받았다. 1639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패륜을 저지를 혐의를 받은 정만이라는 사람은 무려 3600회의 절개명령을 받았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물을 뿌려가며 죽을 먹여가며 칼질을 해댔다니 얼마나 끔찍한가. 칼질이 아니더라도 죄인의 팔과 다리를 먼저 자르고 목을 치는 형태로도 이어졌다.

능지처사를 받는 죄목은 반역죄와 강상죄였다. 다만 조선 태종 때의 기록을 보면 능지처사가 거열(車裂), 즉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어 죄인을 찢어 죽이는 형벌로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1407년(태종 6년), 충청 연산의 내은가이라는 여인이 내연남과 짜고 남편을 살해한 뒤 시체를 땅에 묻어 유기한 죄로 거열형을 당했다. 태종 임금이 “법에 능지의 조항이 있느냐”고 묻자 황희는 “이전에 거열로 능지를 대신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태종은 “본보기를 위해 서울의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열하고 사지를 나누어 지방의 각 도에 보내라”고 지시했다.

■60명을 능지처사형으로 처단한 세종 

문제는 해동의 요순이자 백성을 사랑했던 세종대에 능지처사형을 받은 이가 60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세종실록>에 ‘능지처사’, ‘능지처참’, ‘거열’ 등의 단어로 찾았더니 능지처사 51명, 능지처참 7명, 거열 2명이 검색됐다. 그 가운데는 모반대역이나 불충한 말을 한 죄인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2명)였다. 절대다수는 주인을 죽이거나 부모와 남편 등을 살해한 강상죄인들을 벌한 것이다. 

신분을 중시하고 효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유교국가에서 주인과 부모, 남편을 죽이는 패륜범죄를 엄히 다스리는 것은 당연한 처벌일 수 있다. 하지만 능지처사는 너무 심한 벌은 아닌가.

1424년(세종 6년)의 일이다. 

전라 정읍현의 정을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정을손은 자신의 딸과 후처가 음란하다 하여 마구 구타했다. 또 딸의 남편, 즉 사위를 때려 내쫓으려 했다. 그러자 사위는 ‘하돈(河豚)의 독’ 즉 ‘복어 독’을 국에 타서 장인(정을손)울 독살했다. 세종은 아버지와 남편의 독살사실을 알고도 방관한 정을손의 딸과 후처를 능지처사 했다. 물론 딸과 후처가 당대의 윤리개념으로 볼 때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를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직접 살해한 것도 아니고 방관했다는 죄목으로 능지처사라는 최악의 극형을 내린 것은 심한 처사가 아닌가.

■고문으로 허위자백(?)한 여인까지…

또 한 사례가 있다. 1430년(세종 12년)의 일이다.

“내연남(춘길)과 공모, 본남편을 죽인 원비는 능지처사에 해당됩니다. 내연남 춘길은 참형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묘한 사족을 붙여 놓았다.

“국문 때 원비에게 매질을 17차례, 압슬(壓膝)을 5차례나 했는 데도 자백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때는 장형도 실시하지 않았는데도 자백했다. 사람들은 허위 자백이 아닌가 의심했다.”

세종의 치세에 여인에게 매질에, 더 나아가 압슬까지 혹독한 고문 끝에 자백을 받아냈다니…. 거기에 허위자백까지 의심된다니…. 압슬은 무릎에 자갈을 깔고 널판을 올려놓은 뒤 사람이 올라가 짓밟는 고문이다. 또 하나 여인에게 능지처사의 극형을 선고하고, 내연남에게는 그보다 한 단계 밑인 참수형에 처한 것도 실은 옳은 판단이라 할 수 있을까.

■결국 세종은 ‘해동의 요순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세종을 ‘해동의 요순’으로 추앙하는 것은 좀 과한 평가일까. “신중하라, 신중하라.(欽哉 欽哉)”고 외친 순(舜) 임금의 예를 감안한다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 뿐인가.

기원전 168년 한나라 문제가 사람의 몸에 손을 대는 육형(肉刑)을 폐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육형이 있어도 간악함은 멈추지 않는다. 그 잘못은 무엇인가. 교화를 먼저 베풀지 못하고 형벌부터 먼저 가하기 때문이다. 무릇 형벌이란 사지를 잘라 버리고 피부와 근육을 도려내어 죽을 때까지 고통이 그치지 않으니 얼마나 아프고, 괴로우며 부덕한 것인가. 육형을 없애라.”(<사기> ‘효문제 본기’) 

그러니 세종이 도둑을 잡는다고 힘줄을 끊는 육형(단근형)을 만들고, 공공연히 사람의 사지를 찢는 능지처사를 시행했다는 것을 어찌 봐야 할까. 물론 지금의 잣대로 조선시대의 법률을 제단할 수는 없는 일이기는 하다. 공자는 “형벌대신 도덕으로 다스리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하지만 “은(상)의 법도엔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았을 때 그 손을 잘랐다(棄灰于公道者 斷其手)”(<한비자>)는 대목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치국의 도리(此治道也)이다.”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자체는 가벼운 죄지만 이로 인해 더 큰 죄를 키울 수 있기 때문에 중형을 부과한다고 뜻이다. 사실 세종대에 단근법을 시행하면서 참조한 것은 주자(1130~1200)의 논의를 참고했다. 즉 주자는 “강도와 절도 같은 무리를 궁형(거세형)이나 비형(발뒤꿈치 자르기)으로 다스리면 몸의 일부분은 해하는 것이 되나 생명은 보전됨으로 시의에 맞다”고 했다. 어찌보면 세종은 주자가 말한 궁형과 비형보다는 더 가벼운 단근형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능지처사는 어떨까. 세종은 부모와 남편, 주인을 죽이는 패륜의 범죄에는 용서없이 대처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능지처사라는 극형을 남발했던 것은 아닐까. 다른 분도 아니고 세종대왕이기인데….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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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표, <조선시대 전통 행형제도에 관한 연구>, 한국형사정책연구원, 2000

안재순, <세종대왕의 윤리사상>, ‘세종학연구’ 제12·13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8

오미현, <세종시대 인권보장을 위한 형사법적 제도의 고찰:신주무원록에 나타난 법적 절차를 중심으로>, 공주대학원 석사논문, 2012

심재우, <조선시대 능지처사형 집행의 실상과 그 특징>, ‘사회와 역사’ 제90집, 한국사회사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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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출판사, <사진으로 본 백년전의 기록>, 김원모·정성길 편저, 1986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본 한국백년 1876~1978년>,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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