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51821


인현왕후·장희빈의 죽음, 숙종의 권력욕 때문이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동이>, 서른다섯 번째 이야기

10.09.27 14:35 l 최종 업데이트 10.09.27 17:59 l 김종성(qqqkim2000)


▲  숙종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두 여인 장희빈(왼쪽)과 인현왕후(오른쪽). ⓒ iMBC


조선의 궁정이 완전히 쑥대밭이 되고 있다. 숙종시대의 구중궁궐을 소재로 한 MBC 드라마 <동이>의 최근 분위기가 그러하다. 


장희빈(이소연 분)이 무속의 힘을 빌려 저주하는 가운데에 인현왕후(박하선 분)가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로 병들어 죽었다. 그런 뒤에 장희빈은 궁궐에 불을 지르고 혼란한 틈을 이용해 동이(한효주 분)와 연잉군을 죽이려다 실패했다. 이제는 도리어 장희빈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 동이는 장희빈의 자객이 휘두른 칼에 맞아 잠시나마 병석에 누웠다가 일어났다. 궁녀 시절에도 동이는 장희빈 쪽이 쏜 화살에 가슴을 정통으로 맞았다가 되살아난 적이 있다. 장희빈이 끊임없이 흉기를 휘두르는 가운데에 궁은 계속해서 불신과 비극으로 얼룩지고 있다.


궁궐에서 활극을 찍다니... 두 손 놓은 '망연자실' 숙종


이런 가운데, 세 여인의 공동 남편인 숙종(지진희 분)은 그저 당혹스럽고 참담할 뿐이다. 참혹한 가정사 앞에서 그는 어느 쪽을 편들어야 할지 몰라 하고 있다. 연이은 불행을 사전에 제어하지 못한 그는 뒷수습을 하기에도 마냥 버거워하고 있다. 이상은 드라마 속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 내용들은 대부분 '픽션'이다.


드라마 <동이>는 동이 모자와 관련해서는 숙종의 이미지를 파격적으로 탈바꿈시켰다. 두 모자와의 관계에서는 숙종의 이미지를 한없이 '경량급'으로 만들어 이른 바 '깨방정 숙종'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동이>는 전체 여인들과 관련해서는 숙종의 이미지를 별로 바꾸지 않았다. <사씨남정기>나 <인현왕후전> 등을 통해 300년째 내려오고 있는 숙종의 기본적인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처첩들 간의 싸움 속에서 현명하지 못한 판단을 내려 집안의 불행을 자초하다가 뒤늦게야 잘못을 뉘우치는, 어딘가 좀 모자란 남편의 이미지 말이다. 


숙종의 이런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서인당(이이·성혼의 추종세력) 소속의 김만중이 지은 <사씨남정기>에 의해 조장된 것이다. 조강지처인 사씨(謝氏)의 진가를 몰라보고 교활한 첩인 교씨(喬氏)의 말만 믿고 사씨를 내쫓았다가 패가망신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사씨를 도로 불러들인 유한림의 이미지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숙종의 이미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구도에서는 숙종 시대에 벌어진 불행의 책임이 여인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어딘가 좀 모자란 남편'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숙종에게 책임을 지우기에는 그 불행의 크기가 너무나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 숙종은 영원히 면책될 수밖에 없다. 


여인 손에 휘둘린 '깨방정' 숙종? 그건 착각일 뿐


▲  어딘가 좀 모자란 숙종의 이미지를 조장한 김만중의 <사씨남정기>. ⓒ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그러나 그 같은 숙종의 이미지가 실제의 이미지와 무관하다는 점은 <숙종실록>을 조금만 살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와는 전혀 무관한 허구의 이미지가 지난 300년간 한국인들의 관념을 지배해 온 것이다. 오늘날에는 드라마가 역사를 왜곡한다면, 지난날에는 <사씨남정기> 같은 소설책들이 역사를 왜곡했던 것이다.


<숙종실록>이 편찬된 1728년으로부터 근 30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태까지 실록과 무관한 숙종의 이미지가 그대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좀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명확하다. <사씨남정기>나 <인현왕후전> 등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데에 비해, 실록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인터넷에서도 사료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는 학자들도 사료를 이용하는 데에 많은 제약을 안고 있었다. 또 학문적 연구결과가 대중적인 문학작품에 반영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므로, 숙종의 이미지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실제의 숙종이 <사씨남정기> 속의 유한림과 너무나 딴판이었다는 점은, 숙종을 가까이에서 접한 사람들이 숙종 사후에 숙종(肅宗)이란 묘호(廟號)를 올린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표면상으로도 '엄숙함'의 이미지를 풍기는 숙(肅)자 속에는 훨씬 더 엄숙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경종 즉위년(1720) 6월 15일자 <경종실록>에 따르면, 숙종이 죽은 지 7일 뒤에 2품 이상의 대신들이 모여 '숙'이란 묘호를 올린 것은 그가 강덕극취(剛德克就)한 군주였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강덕극취란 '강직하고 덕스럽고 이겨내며 나아간다'는 의미다. 숙종을 가까이서 접한 대신들이 모여 숙종의 캐릭터를 이같이 정리한 것은, 그들에게는 숙종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저돌적인 인물로 비쳤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숙종의 이미지 중 하나는 남의 손에 놀아날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숙종에게 붙여진 '숙'자가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니라는 점은, 궁정의 여인천하와 조정의 붕당정치를 함께 연동시켜 적절히 활용한 그의 노련한 솜씨에서 잘 드러난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중전으로 책봉했다가(A)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세운 뒤에(B) 다시 장희빈을 폐하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는(C) 과정은, 숙종이 서인당과 남인당(이황의 추종세력)을 다루는 과정과 놀랍게도 일치한다. 


서인당 출신의 인현왕후가 중전이 된 사건 A는 정권이 남인당에서 서인당으로 넘어간 경신대출척(경신환국, 1680년) 직후에 일어났고, 남인당 소속의 장희빈이 중전이 된 사건 B는 정권이 다시 남인당으로 넘어간 기사환국(1689년)과 함께 일어났으며, 인현왕후가 복귀한 사건 C는 정권이 서인당으로 도로 넘어간 갑술옥사(1694년)와 함께 일어났다. 각각의 시점에서, 패배한 여인은 통곡을 했고 패배한 정당은 참극을 겪어야만 했다. 


이처럼 숙종이 중전을 세우거나 폐하는 과정은 집권당을 바꾸는 과정과 거의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집권당과 중전이 같은 당파가 되도록 조율했던 것이다. 전근대 정치의 두 축인 궁정과 조정에서 동시에 정권교체가 일어나도록 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중전을 바꾼 것은 여자에게 눈이 멀어서가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서 그렇게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숙종이 패배한 쪽을 완전히 죽이지 않고 어느 정도 살려놓은 뒤에, 승리한 쪽이 너무 강해진다 싶으면 또다시 집권당과 중전을 신속히 교체하는 정치패턴을 선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여인들이든 붕당들이든 간에 상호 신뢰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느 쪽이든지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분열시켜 놓은 상태에서 자신의 파워를 강화하는 데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숙종은 왜 최숙빈을 인현왕후 쪽에 붙였을까


▲  숙종의 무덤인 명릉의 입구에 있는 홍살문. 명릉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소재 서오릉 안에 있다. ⓒ 서오릉 홈페이지


이 과정에서 숙종이 여인천하와 관련해 취한 조치 중 하나는 상당히 흥미롭다. 그는 조정에서는 두 당파가 대립하도록 했지만, 궁정에서는 세 여인이 대립하도록 만들었다. 인현왕후와 가까운 하급 궁녀인 최숙빈을 가까이하고 후궁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인현왕후·최숙빈 대 장희빈의 대결구도가 형성되도록 만든 것이다.   


그가 일부러 그렇게 의도했는지 여부는 정확히 확단할 수 없지만, 이런 조치는 결과적으로 여인천하가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다. 만약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단둘이 대결했다면, 전자가 후자의 기세를 감당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장희빈은 비록 소수파인 남인당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역관 출신의 가문으로부터 든든한 재정적 지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급 궁녀에서 중전의 자리에까지 오른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적어도 인현왕후보다는 기가 세고 강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장희빈보다 훨씬 더 억척스러운 '밑바닥' 출신의 최숙빈이 인현왕후 쪽에 가담함으로써 양쪽의 대결은 비로소 균형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인현왕후가 사망한 1701년에 숙종이 취한 태도를 보면, 여인천하를 움직인 '보이지 않는 손'이 결국 숙종이었다는 판단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인현왕후가 죽고 장희빈이 유력한 중전 후보로 떠오르자, 숙종은 별다른 근거도 없는 최숙빈의 말을 근거로 장희빈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장희빈의 죽음이 확정적인 상태에서 최숙빈의 중전 책봉 가능성이 떠오르자, '앞으로는 후궁이 왕후가 될 수 없다'는 왕명을 만들어 최숙빈을 무력화 시키고는 최숙빈마저 궐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는 새로운 여인들로 내명부(궁궐 여인들의 조직)를 완전히 물갈이했다. 


위와 같은 조치를 통해 숙종은 여인천하 시대의 세 여인을 모두 없앰으로써 생존자의 파워가 강력해지는 것을 방지했던 것이다. 이런 전개과정을 관찰하노라면, 여인천하의 숨은 주역은 다름 아닌 숙종이 아니었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숙종의 실제 이미지는 <사씨남정기> 등이 조장한 이미지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그는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붕당들은 물론이요 부인들까지도 과감히 이용할 수 있는, 냉혈한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의 묘호에 붙은 '숙'은 결코 그냥 붙은 '숙'이 아니었다. 


피비린내 나는 궁궐, 연출자는 바로 숙종


▲  조선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 있는 신위 봉안도. 별표 친 제11실에 숙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 김종성


그렇다면, 그런 숙종을 앞으로는 무한정 칭송해야 할까? 종래의 편견과 달리 숙종이 자기 실속을 차린 강력한 군주였다는 이유 때문에 이제부터는 숙종을 한없이 떠받들 것인가? 물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숙종의 정치패턴이 조정과 궁정에 미친 폐해를 냉정하게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권력강화를 위해서 부인들까지 과감히 이용한 그의 패턴은 궁중 여인들을 비극으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 여인들의 자식들(경종과 영조)까지도 훗날 상호 투쟁하도록 만들었다. 재혼 3회(인현왕후 책봉, 장희빈 중전 책봉, 인원왕후 책봉), 이혼 2회(인현왕후 폐위, 장희빈의 중전 폐위), 재결합 1회(인현왕후 복위)라는 화려한 이력에서 드러나듯이, 숙종시대의 왕실은 백성들 앞에서 얼굴도 제대로 들기 힘든 지경이 되고 말았다. 


권력강화를 위해서 붕당 간의 싸움을 조장하는 그의 패턴은 붕당정치의 단점을 극대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본래의 붕당 정치는 오늘날 우리가 선거 때마다 갈망하는 정책 대결 양상의 정치투쟁과 유사한 것이었다. 붕당 정치의 그 같은 장점은 숙종 이전인 현종 때까지만 해도 그런 대로 제대로 발현된 편이었다. 인조 쿠데타(인조반정) 때부터 현종 사망 때까지는 대체로 서인당이 정권을 잡았지만, 이 시기에도 서인당은 야당인 남인당을 배척하지 않고 어느 정도는 상호 협력을 추구했다. 


그런데 숙종이 들어서면서 이런 구도가 파괴되고 말았다. 국왕이 한쪽 당파와 손을 잡고 다른 쪽 당파를 파멸 직전까지 몰아넣었다가 몇 년 뒤에 상황을 다시 뒤집곤 하는 상황이 되풀이됨에 따라, 붕당 간에는 상호 협력은 고사하고 상호 공존까지도 불가능한 상황이 조성되고 말았다. 붕당들의 분열 위에서 자신의 권력을 추구한 숙종의 정치패턴이 붕당 간의 불신을 가중시켜 붕당정치의 와해를 초래한 것이다. 


숙종이 죽은 때로부터 4년 뒤에 등극한 영조가 붕당정치의 종식과 탕평정치의 수립을 외친 것은, 붕당정치가 본래 나빴기 때문이 아니라 숙종 시대에 그것의 장점이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숙종시대에 유난히 환국(유혈 정권교체)이 빈발하던 끝에 영조가 탕평책을 들고 나온 것을 보면, 붕당정치가 왜곡된 시기가 바로 숙종시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숙종시대에 궁정과 조정을 쑥대밭으로 만든 온갖 불행의 배후에는 당대 최고 권력자인 숙종의 과도한 권력욕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인들의 뒤에 숨어, 붕당들의 뒤에 숨어 시대의 불행을 가중시킨 최대의 주범은 인현왕후도 장희빈도 최숙빈도 서인당도 남인당도 아닌 숙종 그 자체였던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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