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46009


세종과 소이의 러브라인, 사실상 '패륜'?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두 번째 이야기

11.10.28 15:02 l 최종 업데이트 11.10.29 13:47 l 김종성(qqqkim2000)


▲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소이(신세경 분)와 세종대왕(한석규 분). ⓒ SBS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대왕(한석규 분)과 궁녀 소이(신세경 분)는 무척 애틋한 관계다. 소이는 임금을 모시는 시녀가 아니라 제5왕자인 광평대군을 모시는 시녀다. 그런데도 세종은 침전에서 소이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이들이 한 방에서 단둘이 있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 주변 사람들은 이들의 관계에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문 밖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이들 사이에 애틋한 감정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세종과 소이의 애틋함은 드라마 속 허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만약 조선시대 왕궁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면, 임금과 궁녀는 클린턴과 르윈스키 이상으로 구설수에 휘말렸을 것이다. 조선시대 왕궁의 윤리관을 살펴보면, 세종과 소이의 행동이 얼마나 대담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왕과 세자는 궁녀들을 마음대로 사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왕과 세자가 궁녀를 사귀는 데는 윤리적 장애물이 존재했다. 어떤 궁녀를 함부로 건드리면, 뒷말이 나기 일쑤였다.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에 벌어진 사례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혜경궁 홍씨(사도세자의 부인)가 남긴 회고록인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대단한 바람둥이였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개혁 성향을 띠었지만, 이성 관계에서는 숱한 염문을 뿌렸다. 홍씨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동안에도 나인(궁녀)들을 가까이 하셨으나, 그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몽둥이로) 쳐서 피가 흐르고 살이 떨어진 뒤라도 기어이 가까이 하고야 마셨으니, 누가 좋아하였으리오. 가까이 하신 것이 많기는 하였으나, 한때 그리하시고 대수롭게 여기는 일은 없었다."


사도세자는 궁녀가 마음을 허락하지 않으면 매질을 해서라도 자기 여자로 만들었다. 그러다가도 마음이 금세 돌변해서 어느새 다른 궁녀를 가까이하곤 했다. 한때 가까이 했던 궁녀일지라도 "대수롭게 여기는 일이 없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많은 궁녀들을 건드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조는 아들의 행동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다. 칭찬할 만한 행동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처벌할 만한 행동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조를 분노케 한 결정적 사건이 있었다. 사도세자가 인원왕후전(殿) 소속의 침방나인(바느질 담당)이었던 빙애를 가까이 한 사건이었다. 


왕과 세자들이 마음대로 사귈 수 없었던 궁녀들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 33년 11월 11일(1757.12.21) 이 사건을 인지한 영조는 매우 격노하여 사도세자를 급히 불러들였다. "네가 감히 그리할 수 있느냐?"고 영조는 분개했다. 사귀지 말아야 할 궁녀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 날은 동짓날이었는데, 이 일 때문에 궁중 사람들은 팥죽도 제대로 못 먹었을 것이다. 


▲  바느질 도구를 앞에 놓고 있는 침방나인(밀랍인형). 빙애도 침방나인이었다.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안에 있다. ⓒ 김종성


사도세자와 빙애가 사귈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빙애는 영조가 가까이 하는 궁녀였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영조가 마음에 두고 있던 궁녀였을까? 아니다. 영조는 빙애의 얼굴도 몰랐다.  


영조가 격노한 것은 빙애가 인원왕후전 소속의 궁녀였기 때문이다. 인원왕후는 인경왕후·인현왕후·장희빈을 이어 숙종(영조의 아버지)의 네 번째 중전이 된 여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원왕후는 사도세자에게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시녀를 건드리는 것은 할머니를 건드리는 것과 같이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처음에는 빙애를 짝사랑하기만 했을 뿐, 쉽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인원왕후가 사망하자마자 빙애를 자기 방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행위는 불륜으로 간주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더라도 할머니의 궁녀를 건드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영조가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를 불러 "감히 웃전(윗사람) 나인을 데려다가 저렇게까지 하였는데도 (너는)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면서 꾸짖은 것은, 사도세자가 '성역'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왕이나 세자일지라도 윗사람의 궁녀를 건드리는 것은 패륜으로 간주되었다. 궁녀는 궁궐의 노비였고 노비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윗사람의 '물건'을 건드리는 것은 윗사람을 건드리는 것과 같다고 보았던 것이다. 


인원왕후의 '물건'인 빙애는 어떻게 됐을까? 영조가 "빙애를 내놓으라!"고 하자, 사도세자는 "얘가 빙애입니다"라며 궁녀 하나를 내보냈다. 그것으로 이 문제는 마무리됐다. 이 시기에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사실상의 왕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쉽게 무마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실상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빙애는 사도세자의 방 안에 숨어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영조는 빙애의 얼굴을 몰랐다. 세자궁 사람들이 굳게 함구했기 때문에, 빙애는 비교적 오랫동안 사도세자와 동거할 수 있었다. 빙애는 나중에 사도세자가 정신이상을 일으킬 때 그 옆에 있다가 세자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며느리의 궁녀' 범한 영조... 사도세자가 한 궁녀와 사귀자 분개 


왕이나 세자가 윗사람의 궁녀를 건드리는 경우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도 점잖지 못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윗사람의 궁녀를 건드릴 때보다는 비난의 강도가 덜했지만, 이 경우에도 상당한 부담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조와 문숙의(숙의 문씨, 영조의 후궁)의 사랑이 두고두고 문제가 된 이유 중 하나도 거기에 있다. 


영조에게는 혜경궁 홍씨 외에 현빈궁 조씨라는 맏며느리가 있었다. 현빈궁은 첫째아들인 효장세자의 미망인이었다. 남편을 일찍 사별한 현빈궁은 시아버지에게 효성을 다하다가 영조 27년 11월 14일(1751.12.31)에 사망했다. 


아들 같은 며느리를 잃은 영조의 슬픔은 대단했다. 아들을 두 번 잃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영조는 며느리의 장례식을 손수 챙기는 지극함을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영조(당시 58세)의 또 다른 사랑으로 이어졌다. 며느리를 잃은 슬픔에 애통해하던 영조의 눈망울에 웬 궁녀 하나가 포착된 것이다. 현빈궁을 모시던 궁녀 문씨(문숙의)였다. 영조의 눈망울에서 순식간에 슬픔이 사라지고 호기심이 피어오른 모양이다. 장례식이 끝난 뒤, 영조는 문씨를 침전으로 불러들였다고 <한중록>은 말한다. 


▲  경복궁 강녕전의 내부. 이곳은 왕의 침전이다. ⓒ 김종성


동아시아의 전통 예법에서는 아랫사람의 의무만 강조하지 않았다. 윗사람의 의무도 강력하게 요구했다. <논어> '안연' 편에 따르면, 제나라 경공(景公)이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군주는 군주답게 하고 신하는 신하답게 하며, 어버이는 어버이답게 하고 자식은 자식답게 하는 것"(君君臣臣, 父父子子)이라고 대답했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시아버지에게는 시아버지다움이 요구되었다. 시아버지가 시아버지다움을 잃고 며느리의 '물건' 즉 며느리의 궁녀를 범하는 것은 며느리를 범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며느리의 궁녀를 탐하는 것은, 아들의 배우자인 양귀비를 가로챈 당나라 현종(당현종)보다는 덜 파렴치할지라도 충분히 구설수에 오를 만한 행동이었다. 당시 민간에서 영조와 문숙의를 두고 흉흉한 말들이 오고간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다.


<한중록>에 따르면, 당시 궁궐 밖에서는 "문숙의의 어머니는 비구니였다"느니 "문숙의는 밖에서라도 씨를 받아 왕자를 낳은 것처럼 조작할 것"이라니 하는 등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영조와 문숙의의 사랑이 아름답지 못한 사랑으로 인식되었기에, 이처럼 흉흉한 소문이 나돈 측면이 있다. 궁궐 사람들이 이들의 관계를 안 좋게 전달했기에, 궁 밖 사람들도 그런 말들을 한 것이다.  


'윤리적 이유'로 비·존속 궁녀와는 사귈 수 없어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문숙의를 죽인 것은, 문숙의가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간질한 장본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문숙의가 처음부터 할아버지의 첩으로 부적합했다는 인식도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정조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인 원수들에게도 함부로 원한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할머니뻘인 문숙의만큼은, 즉위하자마자 거리낌 없이 죽여 버렸다. 할아버지와 문숙의의 결합이 처음부터 천박한 것이었다는 인식이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정조가 문숙의를 문녀(文女)라고 부르며 천시한 이유 중 하나도 거기에 있다. 


영조가 문숙의를 건드린 때는 1751년이고 사도세자가 빙애를 건드린 때는 1757년이었으니, 자신이 6년 전에 벌인 일을 잊어 버리고 아들을 나무란 영조의 처사가 궁궐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쳐졌을지 짐작할 수 있다. 


궁궐 사람들이 보기에는 오십보 백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영조에게는 그 50보의 차이가 중요했는지도 모른다. 아랫사람의 궁녀를 건드리는 것보다는 윗사람의 궁녀를 건드리는 것이 훨씬 더 중한 사안이었으니 말이다. 


영조 집안에서 벌어진 추문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왕이나 세자라고 해서 아무 궁녀나 마음대로 사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존속의 궁녀는 건드리지 말아야 하고, 비속의 궁녀는 가급적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았다. 물론 그렇다고 사법부가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윤리관을 위배한 왕이나 세자는 도덕적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야 했다. 


이런 점을 보면, 궁녀 소이와 단둘이서 애틋한 감정을 나누고 있는 드라마 속의 세종이 좀 대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시녀를 자기 방안에 들이는 것은, 에로스 상황을 연출하든 안 하든 간에,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구설수에 오를 만한 행동이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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