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밥 많이 먹으면 출세길도 빨라진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2 청춘사극 <성균관 스캔들>, 일곱 번째 이야기
10.11.01 10:37 l 최종 업데이트 10.11.01 12:14 l 김종성(qqqkim2000)


▲  KBS2 <성균관 스캔들>. ⓒ KBS


조선시대 성균관을 소재로 한 KBS2 <성균관 스캔들>을 보면서, 성균관을 '조선시대 국립대학'이라고 규정하는 시청자들이 많다. 물론 틀리지 않는 생각이다. 성균관은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오늘날의 국립대학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성균관은 꼭 국립대학만은 아니었다. 성균관은 유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라, 제1단계 과거시험인 소과(小科)에 합격한 성균관 유생들이 장차 제2단계 시험인 대과(大科)에 합격할 수 있도록 적절한 지원을 베푸는 것도 목적으로 했다. 이런 점에서 성균관은 '국립 행정고시학원'의 성격도 함께 갖고 있었다. 

이같은 성균관의 이중적 성격은 자칫 성균관의 존립 의의를 훼손할 위험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학문 연구를 위한 '대학'이고 또 한편으로는 과거시험 준비를 위한 '고시학원'이기 때문에, 유생들이 전자보다는 후자에 지나치게 치중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유생들이 성균관 박사, 즉 교수들의 정규 강의에 집중하기보다는 기출문제나 예상문제 맞추기에 신경을 쓸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만연할 경우, 정규 교육과정을 등한시하거나 성균관 밖에서 외박을 하는 유생들이 많아지게 될 것이 뻔했다. <성균관 스캔들> 속의 걸오 문재신(유아인 분)처럼 말이다. 물론 문재신은 '더 나은 조선'을 위해 학생보다는 '쾌걸 조로' 홍벽서의 길을 선택한 청년이므로, 이런 학생을 학점이나 학업태도로 평가하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성균관 교육자들의 입장에서는 문재신처럼 복장도 불량하고 수업시간에 낮잠이나 자며 학교를 무슨 모텔쯤으로 생각하는 유생들이 늘어나는 것이 지극히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성균관의 고육지책, 원점제

▲  <성균관 스캔들> 속의 문재신(유아인 분). ⓒ KBS

학교가 고시학원 혹은 입시학원으로 변질될까봐 염려했다는 점에서, 성균관의 교육자들은 오늘날의 고등학교 교육자들과 비슷한 고민을 가진 셈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대과 합격률이 높아지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지만, 올바른 학문적 소양을 갖춘 건전한 관료들을 양성한다는 성균관의 취지를 달성하려면 훌륭한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고등학생들이 입시에만 매달리고 학교 수업을 등한히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신제라는 제도를 두고 있다. 내신제의 근본 취지는 고교교육 정상화라 할 수 있다. 내신제의 취지가 얼마나 잘 관철되고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학교가 입시학원 일변도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이 제도가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과거의 성균관 교육자들도 오늘날의 교육행정가들과 비슷한 마인드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들 역시 일종의 내신제라 할 수 있는 원점제(圓點制)를 통해 유생들의 마음을 정규 교육과정에 붙들어 두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석차라든가 출결석, 봉사활동, 입상성적이라든가 하는 다양한 기준을 근거로 내신을 평가하지만, 성균관의 내신제인 원점제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제도였다. 어떤 제도였을까?

<성균관 스캔들>의 시대적 배경인 정조시대에 실제로 성균관에서 생활한 윤기(1741~1826년)라는 선비가 남긴 반중잡영(泮中雜詠) 220수 속에서 원점제의 이모저모를 확인할 수 있다. 반중잡영은 성균관 내부(泮中)에 관한 갖가지 시(雜詠)로서 윤기의 유고시집인 <무명자집>에 수록되어 있다. 

반중잡영의 어느 시에 따르면 "아침저녁으로 연달아 참석해야만 1점이 된다"고 했다. 아침저녁으로 연달아 무언가를 해야만 내신 점수 1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이 시에 딸린 윤기 자신의 해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루에 한 번 식당에 참석하는 것으로는 점수 계산을 허용하지 않고,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연달아 참석한 연후에야 1점이 되었다."

성균관에서 아침식사와 저녁식사를 한 유생에게 원점 1점 즉 내신점수 1점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아침만 먹는 경우나 저녁만 먹는 경우에는 점수를 전혀 부여하지 않았다. 0.5점이란 개념이 인정되지 않은 것이다.

학교 식당에서 하루에 두 끼를 먹어야만 내신 1점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은, 개별 유생의 시간표를 학교의 시간표에 맞춤으로써 유생의 하루일과가 학교를 중심으로 영위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출결석 실태나 석차나 봉사 성적이 좋은 유생에게 내신 점수를 준 게 아니라, 학교와 학업을 자기 생활의 중심에 두는 유생에게 점수를 부여했던 것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학우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부지런한 유생이라면 강의에도 빠지지 않을 것이고, 밖에 외출했다가도 저녁에 일찍 돌아와서 학교에서 식사를 하는 성실한 유생이라면 다른 데에 정신을 팔지도 않을 것이라는 생각 하에 위와 같은 제도를 고안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밤에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거를 수도 있다. 하지만, 성균관은 유생들이 제때 자고 제때 일어남으로써 균형 잡힌 생활을 영위하기를 희망했다. 요즘 말로 하면, 저녁형 인간보다는 '아침형 인간'을 양성하려 한 것이다. 

성균관에서 밥 많이 먹으면 출세길도 빨라진다?

▲  성균관 안에 있는 진사식당(오른쪽 건물). 왼쪽 건물은 동재 즉 동쪽 기숙사다. ⓒ 김종성

위와 같이 성실하고 부지런한 생활을 통해 매일 1점씩 축적한 끝에 총점이 일정 수준에 도달한 성균관 유생은 성균관 밖의 일반 유생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특혜를 누렸다. 엄청난 특혜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사실, 굳이 성균관에 입학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성균관 유생이 될 경우에는 '훨씬 더 많은' 종류의 과거시험에 '훨씬 더 자주' 응시할 수 있었다. 일반 선비들은 보통 3년에 한 번씩 과거시험에 응시한 데에 비해, 성균관 유생들은 제주에서 감귤이 올라오는 것을 기념한다든가 이러저러한 명절을 기념한다든가 할 때에 성균관에서 열리는 특별 과거시험에 수시로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성균관 유생들은 일반 유생들보다 훨씬 더 빨리 합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특혜를 누리는 데에 필요한 것이 바로 원점이었다. 원점이 일정 수준에 도달한 유생에게만 성균관에서 열리는 특별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다르기는 했지만, 일반적으로 원점이 30점이 되면 그 해의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고, 원점이 300점이 되면 그런 제약 없이 아무 때나 시험을 칠 수 있었다고 한다. 

식사 횟수를 기준으로 응시 자격을 부여하다 보니, 성균관 유생들이 응시하는 시험장에서는 총장인 성균관 대사성이 수험생들의 식사 횟수를 체크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윤기의 시에 따르면 "원점을 채운 유생만 입장을 허락하니, 명륜당(성균관의 강의실)의 대사성이 이름을 자세히도 살핀다"고 했다. 

300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600끼니의 식사를 꾸준히 하면 성균관에서 열리는 과거시험에 마음껏 응시할 수 있었으니, 성균관에서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제때에 밥을 찾아먹는 유생들에게 엄청난 특혜가 돌아간 셈이다. 이런 구도 하에서는, 아무리 공부를 잘하더라도 생활이 불규칙하거나 식사를 곧잘 거르거나 외식을 좋아하는 유생들은 자연히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식사 횟수로 학생들의 마음을 학교에 잡아두는 것은 어찌 보면 유치한 발상일 수도 있지만, 조선시대 교육행정가들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학교교육의 정상화를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원점 300점이라는 목표를 제시하고 학생들에게 그것을 향해 열심히 달려 가라고 채찍질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300점을 받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고 한다. 300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600끼를 연달아 먹을 수 있는 유생들이 많지 않았기에, 조선 후기의 어느 시점엔가는 300점이 70점으로 하향 조정되었다고 한다. 300점을 받는 데에 너무 오랜 세월이 소요되는 경우가 많아지다 보니, 부득이하게 4분의 1 수준으로 낮추어준 것이다. 

성균관에 입학하지 못해 보통 3년에 한 번밖에 응시할 수 없었던 일반 유생들은 원점 300점은커녕 70점도 못 채워서 쩔쩔매는 성균관 유생들을 보면서 "아니, 국가에서 공짜로 주는 밥도 제때 꼬박꼬박 못 챙겨 먹는단 말이야?"라며 분통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입시과열에 골머리, 조선도 예외 아니었다

▲  과거시험장으로 활용된 성균관 비천당. ⓒ 김종성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교육자들도 '입시과열'로 인해 학교교육의 기반이 흔들리지 않을까 하고 늘 염려했다. 조선시대판 내신제인 원점제는 그 같은 고민이 낳은 고육지책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골머리를 썩이는 문제점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고 하여 "예나 지금이나 한국이란 나라는 안 되는 나라야"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시험을 위한 열기가 지나치게 뜨거워지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만, 그것은 그만큼 시험을 통해 개인의 신분을 바꿀 기회가 많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험과열은 어찌 보면 역동적 사회의 징표일 수도 있다. 

시험을 통한 출세의 기회가 적은 나라, 즉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 하는 나라'에서는 누가 잔소리를 하지 않더라도 학교교육이 자연스레 정상화되겠지만, 이런 나라에서는 가난하지만 유능해서 결코 '송충이'의 삶에 만족할 수 없는 우수한 젊은이들이 처음부터 '솔잎'만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다.  

시험을 통한 신분 이동의 기회를 가급적 최대한 부여하되, 이로 인한 과열이 사회적 자원의 소모를 초래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세.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현실적 선택이 아닐까. 시험 열기가 과열되는 것을 핑계로 시험제도를 축소한다든가 아니면 필기시험 대신 면접시험으로 대체하려는 것은, 신분이동의 가능성을 그만큼 축소 시키고 나아가 사회적 역동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는 우수한 인적자원들을 불만세력으로 양성하여 도리어 정치체제를 약화시키는 결과밖에 초래하지 않을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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