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28395


양반만 드나들 수 있었다는 조선 '사교클럽'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짝패>, 첫 번째 이야기

11.02.24 14:34 l 최종 업데이트 11.02.24 18:15 l 김종성(qqqkim2000)


▲  MBC 드라마 <짝패>. ⓒ MBC


양반 출신이 천민 생활을 한다고 동정하는 이유


최근 시작된 MBC 드라마 <짝패>는 갓난아이 때에 신분과 이름이 뒤바뀐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양반가에서 태어난 아기는 거지 소굴에서 자라고 거지 소굴에서 출생한 아기는 양반가에서 성장한 것이다. 


이런 경우 시청자들은 본래 양반가에서 태어나 천민 생활을 하는 쪽(A)에 왠지 모를 동정심을 갖게 된다. 자신이 천민 출신인 줄도 모르고 양반가 도령으로 살아가는 쪽(B)에 대한 시선은 어딘지 곱지 않다. 


인간은 본래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습관처럼 말하면서도, B에 대한 우리의 심사는 어딘지 모르게 뒤틀리곤 한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심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심리가 그렇기에 드라마 작가들도 A를 '당연히' 주인공으로 선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A에게 심정적으로 끌리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양반계급은 아주 절대적이고 명확한 신분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이고 명확한 것이라서 쉽사리 바꿀 수 없는, 아니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 그런 것이 뒤바뀌어 A가 괜한 고생을 하고 B가 부당한 호강을 누리고 있다는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A에게 심정적 지지를 보내도록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조선시대의 신분적 특권층인 양반에 대한 우리의 지식. 그것의 정확성 여부를 한번이라도 검증해보았는가? 주로 소설이나 사극을 통해 얻은 양반에 관한 지식, 예전부터 그냥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양반에 관한 지식을 실증적으로 검토해보았는가?


조선 법전에 양반은 없다, 양인과 노비만이 있을 뿐


▲ <짝패>의 주인공인 천둥(천정명 분). 자신이 양반인 줄도 모르고 거지 소굴에서 성장했다. ⓒ MBC 


이 문제에 있어서 역사학계와 대중의 인식차이는 매우 확연하다. 양반문제 권위자인 송준호나 조선시대 권위자인 미야지마 히로시의 연구에서 나타나는 양반의 이미지와, 소설·사극이나 대중의 역사인식에서 나타나는 양반의 이미지 사이에는 상당히 넓은 간격이 있다. 


역사학계에서 연구된 양반의 실체를 정리해보자. 


첫째, 양반이란 신분이 조선시대 법전에 규정된 적은 없다. 경국대전-속대전-대전통편-대전회통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법전에 등장하는 신분은 양인(良人)과 노비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유민과 예속민만 법률로 정해져 있다. 따라서 법률상으로는 양반과 일반인을 구분할 수 없다. 법률외적 측면, 즉 사실의 영역에서 양반이란 지배층이 존재했을 뿐이다. 


이 점은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 재벌·국회의원·고급성직자·고급공무원·고급장교·판검사·교수·언론인·변호사·교장·의사·회계사·기업인·대지주·지방의원 등과 이들의 가족이 포함된 계층에게 지배계급의 지위를 부여하는 법률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런 법률을 제정했다가는 사회 통합성이 저해되어 금세라도 혁명이 발생할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법적으로는 안 그런 것처럼 하면서 실제로는 특권층을 보호하는 것이 '세련된' 통치기술이 아닌가.


조선시대에 양반의 지위가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았다고? 아니, 양반만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의 지위가 법적으로 보장되었다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다음 단계 논의로 넘어가자. 


양반만 과거시험 볼 수 있다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 


▲  천둥과 신분이 뒤바뀐 귀동(이상윤 분). 자신이 진짜 양반인 줄로 알고 성장했다. ⓒ MBC


둘째, 양반만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과거시험의 문호는 원칙상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개방되어 있었다. 송준호의 논문에서 이 점이 이미 규명된 바 있다. 1865년 편찬된 법전인 <대전회통> '예전'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이전에 나온 법전의 내용도 동일하다.  


"3년에 한 번씩 시험을 본다. …… 문과·무과는 통훈대부 이하, 생원·진사시는 통덕랑 이하만이 응시할 수 있다. 수령은 생원시·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다."


"범죄를 저질러 영구히 임용되지 못하게 된 자, 부정부패를 범한 관리의 아들, 재혼하거나 행실이 부도덕한 여인의 아들과 손자, 서얼 자손은 문과와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


이 규정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과거시험을 볼 수 없는지 알 수 있다. 소과(小科)라 불린 생원시·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는 사람은 정5품 상(上) 통덕랑 이상의 현직 관리, 현직 수령, 범법 사실로 인해 관직에서 영구 파면을 당한 자, 부정부패로 처벌을 받은 관리의 아들, 재혼하거나 행실이 '부도덕'한 여인의 아들과 손자, 서얼 자손이었다. 


통덕랑 이상의 현직 관리와 현직 수령이 소과를 볼 수 없었다니? 그런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통덕랑 이상과 수령이 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럼 사람들이 뭐가 아쉬워서 소과를 본단 말인가? 답은 간단하다. 아버지가 공신이나 전·현직 고관이라는 이유로 과거시험 없이 관리가 된 사람들, 즉 음서(蔭敍) 출신들이 '쪽팔림'을 면하기 위해 뒤늦게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위의 규정은 의미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소과 응시를 금지한 이유는 무엇인가? 통덕랑 이상의 현직 관리들이 과거에 응시할 경우 젊은 선비들의 관직 진출 기회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기에, 또 지방에서 치러지는 소과에 현직 수령이 응시할 경우 시험의 공정성을 기할 수 없었기에 이들의 소과 응시를 금지했던 것이다. 


대과(大科)인 문과·무과에 응시할 수 없는 사람은 정3품 하(下)인 통훈대부 이상의 현직 관리였다. 이 경우에도 젊은 선비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이들의 응시를 금지했던 것이다. 문과의 경우에는 소과 합격자만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소과 응시결격자는 당연히 여기에도 응시할 수 없었다.


여기서 살펴본 <대전통편> '예전' 규정의 어디에도 '상놈은 안 되고 양반만 된다'는 표현을 찾을 수 없다. 양반만 과거시험을 볼 수 있다는 규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학습능력과 경제력과 시간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요건을 갖춘 사람들은 주로 양반 지배층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법제상으로는 양인이면 누구나 다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원칙상으로는 누구나 다 사법시험·행정고시·외무고시·기술고시·지방고시 등에 응시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학습능력·경제력·시간이 충분한 사람만이 응시할 수 있지 않은가.


아니, 법률에서 양반이 인정된 것도 아니고 양반만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라면, 양반이란 계층은 대체 어떻게 존재했단 말인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사교모임에 등록된 사람이 이른바 양반


▲ 글을 읽고 있는 양반의 모습. 출처: <한국생활사박물관> 제9권. ⓒ 사계절


셋째, 양반은 지역별로 존재한 사교클럽의 회원 같은 존재였다. 일례로 경상도 안동에서는 이 지역의 특권층이 진솔회(眞率會)라는 사교클럽을 형성했다. 이런 클럽의 회원명단인 향안(鄕案)에 등재된 사람이 이른바 양반이었다.  


미야지마 히로시의 연구에 따르면, 양반클럽에 가입하려면 자격요건을 갖추어야 했다. 제1요건은 과거합격자나 대학자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것, 제2요건은 양반가의 생활양식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양반가의 생활양식'이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잘 접대하며 학문에 힘쓰고 자기 수양을 쌓는 것을 말한다. 제4요건은 앞의 요건들을 모두 갖춘 가문에서 결혼 배우자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1요건·제2요건 뒤에 제4요건이라 표기한 것을 보고 '오타 났구나'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수도권 이외의 지방에 거주하는 가문에 필요한 제3요건을 따로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표기한 것이다. 지방에 거주하는 가문의 경우에는, 해당 지역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집단적으로 거주해야만 양반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예컨대, 안동 김씨의 세거지(世居地), 풍양 조씨의 세거지 등등에 거주하는 사람이 양반으로 인정된 것이다.


양반클럽의 간부들은 자기 지역에 오래 거주한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회원 자격을 부여했다. 자기 혼자 객지에 떨어져 사는 경우에는 이런 자격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이것이 지방 가문에 필요한 제3요건이었다. 이들의 경우에는 제1·제2·제3요건을 모두 갖춘 배우자와 결혼해야만 제4요건을 충족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요건을 구비한 사람들이 각지의 사교클럽에 가입해서 양반 대우를 받았다.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만 가입하는 지역 사교클럽들이 있다. 이것이 과거의 양반클럽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양반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이다. 이어지는 단계에서는 지역별로 양반이 인정됨으로써 초래된 현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검찰총장급' 송순이 양반으로 인정받지 못한 까닭


▲ 담양 양반들은 송순이 대사헌이 된 후에야 그를 양반으로 인정해주었다. 사진은 담양향교의 모습. ⓒ 김종성


넷째, 양반의 선정에 관한 전국적이고 획일적인 기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역별로 양반클럽이 독립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했다. 양반은 상대적인 존재인 동시에 불명확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저 동네에서는 양반으로 인정될 수 있는 사람이 이 동네에서는 양반으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과거합격자나 대학자의 후손(제1요건)에서 '대학자'를 판정하는 기준이 전국적으로 획일화될 수 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양반의 자격요건을 구비했다 할지라도 클럽 간부들과의 관계가 매끄럽지 않아서 가입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양반클럽 내에서 자리를 잡아야만 양반으로 인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을 설명하는 데 적절한 사례로서 조선 중기의 유명한 문신인 송순(1493~1583년)을 들 수 있다. 대나무로 잘 알려진 전라도 담양 출신인 송순은 중종 14년(1519)에 대과에 급제하고 명종 2년(1547)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인물이다. 그가 지낸 관직은 개성유수(개성광역시장), 이조참판(행정안전부 차관), 대사헌(감사원장 혹은 검찰총장), 우참찬(의정부 소속 장관급) 등이다. 


TV 사극에 이 정도의 인물이 나온다면, 시청자들은 분명히 그를 양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이조참판이 된 후에도 양반 대우를 받지 못했다. 담양의 양반클럽에서 그를 회원으로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순의 외가가 담양 토박이가 아니라는 점과 송순의 집안에 유명한 관료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담양 양반들 중에서 송순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송순을 회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 서울 광화문 앞에 있는 이조 관청의 터. 별표 친 부분. ⓒ 김종성


이조의 회식 자리에서 이 이야기가 거론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부하 직원들이 "참판님도 금년에는 고향에서 양반으로 인정을 받으셔야 할텐데요"라고 농담하면, 송순은 말석에 앉아 있는 말단 직원을 가리키며 "자네는 양반이니 나랑 자리를 바꿀까?"라고 농담하고, 옆에 있는 또 다른 직원은 "저도 제 고향에서 양반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며 푸념을 하는 상황을 상상해보면, 양반이란 계급이 상대적이고 불명확한 관습상의 존재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1569년 이후에 가서야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대사헌이 되어 고향을 방문한 송순이 지역 원로들을 후히 대접한 일이 양반클럽 간부들의 마음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감사원장님 혹은 검찰총장님에게 밥 한 끼 후하게 얻어먹은 연후에야 담양 양반들이 그를 자신들과 '동급'으로 인정해준 것이다. 이 사례에서 잘 나타나듯이, 지역별로 양반 선정이 임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가 높은데도 양반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도 존재했던 것이다. 


누가 양반이고, 누가 일반인인지 가리기 쉽지 않아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 양반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설이나 사극에 나오는 양반은 실제 역사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제도적으로 양반계급을 인정한 것도 아니고 양반만 과거시험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일정한 요건을 갖추고 지역별 양반클럽에 가입한 사람들이 양반으로 인정되었기에, 전국적이고 획일적인 양반의 기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양반이란 것이 절대적이고 명확한 신분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지극히 상대적이고 불명확한 개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양반이고 누가 일반인인지를 가리기가 쉽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대한민국의 지배층을 명확히 확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위가 아주 높은 경우에는 모르지만, 지위가 어중간한 경우에는 지배층인지 피지배층인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조선시대에도 그러했다. 소설이나 사극에서는 양반과 상놈이 명확히 구분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그 구분이 모호할 때가 많았던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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