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54845


프랑스군이 외규장각 도서 탐낸 진짜 이유

[역사, 그 밖의 이야기들 6편] 병인양요를 둘러싼 배경

11.04.22 15:49 l 최종 업데이트 11.04.23 09:22 l 김종성(qqqkim2000)


▲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군'을 표현한 모형으로 강화역사관에 전시되어있다. ⓒ 김종성


1866년 겨울,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로즈 제독이 전함과 해병대를 이끌고 조선 서해안을 침입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을 박해하지 말라"며 침공했지만, 진짜 목적은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데 있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민가에 무차별 포격을 가하면서 통상관계 개설을 요구했다. 하지만 조선군의 격렬한 저항에 막혀 철군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군은 이 과정에서 강화도 내 관청들을 파괴하고 불살랐다. 


강화유수부(강화 광역시청) 역시 거의 다 불타버렸다. 1860년 영국군과 공동으로 중국 북경의 원명원(웬밍웬, 황실 정원)을 처참히 파괴할 때처럼, 프랑스군은 강화유수부를 그렇게 불태우고 나서 조선을 떠났다. 


▲  프랑스·영국 연합군에 의해 파괴된 북경 원명원. 건물 잔해가 인상적이다. ⓒ 김종성


이 전쟁은 음력으로 병인(丙寅)년에 서양인(洋)들이 일으킨 소요사태(擾)라 하여 병인양요(丙寅洋擾)라 불린다. 전투에서는 프랑스가 우위를 보였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프랑스가 졌다. 왜냐하면, 전쟁의 목적인 통상조약 체결에 실패하고 돌아갔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전쟁에 지는 대신, 패전의 상처를 달랠 만한 '돈 되는 것들'을 챙겨 갔다. 강화유수부를 파괴할 때, 그 안의 외규장각에서 조선 서적들을 약탈해 갔던 것이다. 비원으로 유명한 서울 창덕궁에는 정조 때 세운 왕립 학술원인 규장각이 있다. 외규장각은 그 분소로서 병인양요 직전까지만 해도 5067권의 서적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프랑스군은 고문서와 의궤(행사 가이드) 등을 집중적으로 약탈해 갔다.


이때 프랑스에 빼앗긴 서적 가운데서 75권이 지난 14일 '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5월 말까지 총 4차례에 걸쳐 도합 297권이 145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다. 왜 '반환'이 아니고 '대여'인가 하면, 프랑스 측이 자신들의 소유가 불법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대여'냐 '반환'이냐의 법리 논쟁이 아니다. 프랑스군이 왜 그토록 조선 서적에 집착했는가 하는 점이다. '건물 철거반'처럼 건물을 처참히 파괴하고 불태워버린 프랑스군이 외규장각 도서만큼은 소중히 챙긴 이유는 무엇일까? 19세기에는 서양에 비해 동양이 미개하지 않았는가? 미개한 나라의 서적 같은 것은 싹 불태워버렸어야 하지 않는가? 


"없는 것 없으니, 오랑캐(영국)에게서 구할 필요 없다"


▲  프랑스로 반출된지 145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가 14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하자, 관계자들이 의궤를 실은 상자를 수장고로 옮기고 있다. ⓒ 유성호


오늘날 세계를 '리드'하는 것은 미국과 서유럽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미국은 지난 세기의 대전을 거치면서 세계 일류로 떠올랐고, 서유럽은 아편전쟁 이후인 19세기 중반부터 세계 일류로 부상했다. 그 이전에 그들은 이류였다. 그들이 이류였을 땐, 동아시아가 적어도 국제통상 측면에서는 세계 일류였다. 


경제사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리오리엔트>에서 1545년 이후부터 1800년 이전까지 전 세계에서 생산된 13만7천 톤의 은(銀) 중에서 6만 톤이 중국에 유입되었다고 했다. 44%의 은이 중국으로 유입된 것이다. 당시에는 은이 지금의 금이나 달러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은의 유입은 곧 무역수지 흑자를 의미했다. 


차·비단·도자기는 중국의 전통적인 3대 수출품이었다. 이른바 '효자종목'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은 오랫동안 세계시장에서 무역흑자를 거두었다. 화폐(은)는 서유럽에서 중국으로 계속 빨려 들어갔고, 실물(차·비단·도자기)은 중국에서 서유럽으로 계속 흘러들어 갔다. '은의 블랙홀'이라 할 정도로, 중국은 은을 빨아들이기만 할 뿐 토해낼 줄을 몰랐다. 은이 수백 년간 중국으로 흘러들어 간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서유럽이 만성적인 적자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중국 소비자를 유혹할 만한 상품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서유럽의 대표주자인 영국이 아편을 뿌려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상적인 상품으로는 적자를 만회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에 성공해서 증기기관을 돌리기는 했지만, 영국은 19세기 중반이 되도록 경쟁력 있는 상품을 개발하지 못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있다. 청나라 황제 건륭제와 영국 특사 조지 매카트니의 1793년 회동이 그것이다. "통상관계를 확대해달라"는 매카트니의 요구를 건륭제가 거절한 본질적 이유는, 흔히 하는 말처럼 매카트니가 삼궤구고(三跪九叩)의 예법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황제 앞에서 세 번(三) 무릎을 꿇고(跪) 한 번 꿇을 때마다 세 번씩 해서 모두 아홉 번(九)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는(叩) 중국식 예법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자국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다면, 건륭제가 통상관계 확대를 거부했겠는가.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의 눈에는 영국이 별 볼 일 없는 나라였던 것이다. "우리는 물산이 풍부하여 없는 것이 없으니, 우리에게 없는 것을 오랑캐(영국)에게서 구할 필요가 없다"는 건륭제의 발언은 당시까지만 해도 서유럽의 경제력이 외형상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이 서유럽의 잠재력을 간과한 것은 분명히 실수였다. 하지만, 당시의 서유럽은 잠재력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아편전쟁 이전만 해도 그 잠재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서유럽과의 통상관계에 대해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에 관한 지식이 절실하고 긴요했던 서유럽 사람들


▲  <황청직공도> ⓒ 중국백과망


이 점은 조선과 청나라가 서유럽과의 관계를 주저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조선과 청나라라고 해서 서유럽의 존재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이전에도 중국인들은 무역항인 광주(광저우)를 통해 서양에 관한 정보를 획득했으며, 조선 역시 중국에 가서 이런 정보들을 광범위하게 입수했다. 


18세기 후반에 청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제작된 세계 풍속집인 <황청직공도>에는 영국·프랑스·네덜란드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생김새·문화·역사 등이 담겨 있다. 이 자료가 조선에서는 <환영초형기문>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그만큼 조선과 청나라에서도 세계 사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서유럽과의 통상관계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것은, 서유럽의 역량이 그때까지는 가시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자국이 세계무역의 중심이기에 서유럽을 무시했던 것이고, 조선은 청나라를 확실히 붙잡고 있었기에 굳이 서유럽에 눈을 돌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이 일찌감치 서유럽으로 눈을 돌린 것은 청나라와의 관계가 소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적어도 통상관계에서만큼은 동아시아가 우위를 점했기 때문에, 당시 서유럽 사람들에게는 동아시아에 관한 지식이 아주 절실하고 긴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동아시아의 서적을 아주 열심히 번역하고 또 번역했다. 


도널드 라크와 에드윈 클레이가 1965년에 쓴 <유럽을 만든 아시아>에 따르면, 16~17세기에는 수백 권의 아시아 서적이 유럽인 선교사·상인·선장·선원·의사·군인·여행가 등에 의해 유럽의 주요 언어로 번역되었다. 또 시어도어 포스가 1986년에 쓴 논문에 따르면, 18세기까지만 해도 서양인들은 중국의 기술서·실용서 등을 번역하는 데 아주 적극적이었다.


사상·문화적으로는 동아시아가 앞선다고 인식 


▲  건륭제를 만난 조지 매카트니 사절단의 모습으로 중앙의 남자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있다. ⓒ 위키피디아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세계무역의 중심인 동아시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동아시아에 진출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서양 서적을 열심히 번역하듯이, 19세기 이전에는 서양인들이 그렇게 했던 것이다. 


1866년에 프랑스 병사들이 건물은 불태우면서도 책만큼은 소중히 챙겨간 이유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적국의 정부기록이기 때문에 훔쳐 간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동아시아 서적은 귀중하다'는 인식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서적을 열심히 번역해내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프랑스 병사들의 눈에는 외규장각 도서들이 아주 값나가는 물건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군사적으로는 자신들이 앞서지만 사상·문화적으로는 동아시아가 여전히 앞선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의 서적들을 탐했던 것이다. 


서양 중심주의에 빠진 지식인들은 서유럽이 아주 오래 전부터 세계 일류였던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서유럽은 19세기 중반에야 비로소 동아시아를 능가하고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유럽은 지식인들을 동원해 '동양은 본래 미개했다'는 인식을 조장했다. 승자 중심의 세계관을 만들어내기 위한 일종의 역사왜곡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항구적인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동아시아의 우위가 19세기 중반에 끝났듯이, 미국과 서유럽의 우위도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다. 돈이 돌고 돌듯이, 패권도 돌고 도는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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