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대지주가 한국인 4.5배… 불이농장 수탈 앞장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식민지 부호들 ⑨ 소수의 상류사회
| 제302호 | 20121223 입력  

일본의 자본주의는 식민지가 필요할 만큼 발달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주로 토지를 빼앗거나 금광을 캐는 1차 산업에 매달렸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경제적으로 몰락했지만 소수의 친일파는 살아남았고 광산·부동산 재벌도 탄생해 식민지의 상류사회를 구성했다.

골프의 발상지인 스코틀랜드의 한 코스에서 운동하고 있는 영친왕 . 그는 순종 서거 (1926년) 이듬해 유럽여행을 떠났다. [사진가 권태균]


식민지 한국 땅에서 제일의 부호는 누구였을까? 한국인으로는 연간 쌀 5만 석을 수확한다는 민영휘 일가를 제일로 쳐주었지만 일본인들을 포함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932년 8월 함경도 나진이 동해 종단항(終端港)으로 결정되면서 김기덕, 홍종화 같은 부동산 재벌이 탄생했지만 이 역시 일본인들을 제외할 때의 이야기다.

『삼천리』 1932년 12월호는 “나진, 웅기 양 지역 토지가격의 상승분이 1억원을 돌파하면서 홍종화와 김기덕이 갑부가 되었지만 전체의 분배 비율을 보면 조선인이 10분의 3~4이고 일본인이 10분의 6~7에 가깝다”면서 나진항 선정으로 일본인 부호가 더 많이 배출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자금력과 정보 면에서 앞서는 것은 물론 조선총독부와 결탁했던 일본인들이 부동산 개발의 이익도 선점하기 마련이었다.

식민지 한국에 진출했던 일본인 부호는 대부분 광산 부호 아니면 농토 부호였다. 조선농회(朝鮮農會)에서 발간한 조선농업발달사(朝鮮農業發達史: 1944)에 따르면 1933년에 300정보(町步: 1정보는 3000평)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 숫자가 한국인은 43명인 데 비해 일본인은 192명이나 돼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동척은 식민지 시대 최대 회사로서 농지 강탈에 앞장서야 했던 일본 자본주의의 후진성을 잘 보여준다.


식민지에 공장을 세울 정도로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했던 일본은 근원적 수탈, 즉 토지나 토지에서 나오는 생산물을 수탈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1910년부터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던 이유도 토지를 강탈하기 위해서였다. 토지조사사업의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사실상 일본 정부 소유였던 동양척식회사였다.

동양척식회사 수탈로 천석꾼도 급감

동양척식회사는 1930년께 41만여 정보(町步)의 토지에 50여만 석의 쌀을 수확하는(숫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 전국 최대 규모의 농장이자 식민지 한국의 최대 회사였다. 그보다는 규모가 못했지만 총독부와 결탁한 일부 일본인들도 흥업(興業), 실업(實業) 등의 요상한 이름으로 농토 획득에 나섰다. 그 결과 1920년대 초반에 이미 1000정보 이상의 농지를 소유한 조선흥업㈜, 조선실업㈜, 불이흥업(不二興業), 구마모토농장(熊本農場), 사이토농장(齋藤農場) 같은 기업형 농장이 전국 각지에 우후죽순 식으로 생겨났다.

그중 유명한 것이 불이흥업㈜의 불이농장(不二農場)이었다. 1904년 오사카(大阪)에 본점을 둔 오사카후지모토합자회사(大阪藤本合資會社)에서 한국에 파견한 후지 간타로(藤井寬太郞)가 설립한 농업 회사였다. 후지 간타로는 무역업과 고리대금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후 사와무라 규헤이(澤村九平) 등과 1914년 자본금 100만원의 불이흥업㈜을 설립했다. 군산에 본점을 두고 전북은 물론 전국 각지에 분점, 즉 농장을 설립했는데 평북 용천까지 진출해 1920년대 초반에는 자본금을 500만원까지 늘렸다.

불이농장의 성장사는 이 시기 일본인들의 식민지 수탈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먼저 불이농장은 총독부로부터 황무지나 도서 연안의 개간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한국인 농민들을 모아 개간시키고 소작권을 주고 소작료를 받는 것이었다. 불이농장은 농민들을 모을 때는 개간 후 소작권은 물론 개간비용도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개간비를 주지 않았다. 노동력을 강탈당한 농민들이 항의하면 소작권도 빼앗겠다고 위협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1925년부터 1932년까지 평북 용천의 ‘불이농장 소작쟁의 사건’이 여러 번 발생했다. 불이농장이 총독부로부터 평북 용천군 일대의 황무지를 불하받아 조선 농민들을 이용해 개간한 농지는 용천군 용천면· 부라면·외상면·외하면의 4개 면, 5000여 정보였다. 불이농장은 그 결과 1500여 소작농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농민들이 개간비 지급을 요구하자 소작권을 강탈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소작쟁의가 발생했다. 불이농장의 행위가 워낙 파렴치했기에 한때는 총독부 관료들도 소작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농장 편을 들어 1931년에는 일경(日警)이 소작인 200여 명을 검거하고 20여 명을 재판에 회부해 용천소작조합이 해산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일본인 농장들의 확산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소작농뿐만이 아니었다. 삼천리 1932년 2월호는 ‘천석꾼은 몇 명이나 되나?’라는 기사를 통해 3·1운동이 일어났던 기미년(己未年: 1919년)에 경무국에서 연 1000석 이상을 추수하는 부농(富農)을 조사했더니 864인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1000석을 수확하려면 토지가 10만원어치는 있어야 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가 호경기였다. 앞의 삼천리는 “경기가 한창 좋았던 기미년에 800여 명밖에 안 되었으니 불경기가 심한 지금쯤(1932년)은 아마 바짝 줄었을 것”이라면서 “경무국에서는 해마다 조사하는 모양이나 외간(外間)에 발표를 하지 않아 잘 알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조선 농촌의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었기 때문에 조사는 해놓고도 발표 자체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삼천리는 “동척(東拓: 동양척식회사), 식은(殖銀: 동양척식은행)에 아니 넣고 그냥 천석들이 전지(田地)를 가지고 있는 대지주는 손가락으로 꼽을 만치나 남았을까 하는 것이 아마 정당한 관측”이라고 추정했다. 일제 식민지배 20년간 조선인의 생활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피폐해졌다는 이야기다.

사회주의자 김명식(金明植)은 동광 1931년 7월호에 “20년 이래 조선의 부(富)는 상대량(相對量: 인구 증가에 비한 것)이 준 것은 물론이요 절대량(絶對量: 식민지 이전과 비교한 부)도 늘지 못했다. 외래자본에 예속된 자의 부(富)는 늘었지만 그렇지 못한 자의 부는 줄었다”고 분석했다. 소수 친일파들의 부만 늘었다는 이야기다.

1940년 9월 연간 소득이 가장 많은 한국인은 광산재벌 최창학으로 24만원이고,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이 23만원으로 그 뒤를 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인 광산업자 고바야시(小林采男)는 120만원, 주조(酒造)업자인 남대문(南大門) 금천대회관(金千代會<8218>)의 사이토(齋藤)는 80만원으로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다.

윤치호 ‘계명구락부’가 대표적 상류모임

『삼천리』 1932년 4월호는 ‘벽신문(壁新聞)’이란 기사에서 “제국흥신소(帝國興信所)가 부호 숫자를 조사해 결과를 게재했는데, 1000만원 이상 재산가가 2인, 500만원 이상 2인, 400만원 이상 1인, 170만원 이상 2인, 100만원 이상 3인, 80만원 이상 2인, 70만원 이상이 4인”이라고 전했다. 이 숫자에 “10만원 이상은 약 100명이 된다”고 덧붙이고는 “주의할 것은 이 모든 부자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요 조선인은 몇 명 안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삼천리』 1934년 5월호는 “재계(財界)의 권위인 유력한 모 흥신소(某興信所)의 조사”라면서 한국인 부호를 열거했는데, 최대 300만원(1명)부터 70만원(4명)까지 재산을 가진 한국인 부호가 20명이라면서 ‘70만원 이상의 부호가 2000만 명 중 20명이니 실로 100만분의 1’이라면서 “가위(可謂) 창해(蒼海: 바다)의 1속(粟: 좁쌀)”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34년 쌀 1석(160㎏) 가격 22원 30전을 현재의 10㎏당 2만5000원 정도로 환산하면 이때의 100만원은 130억여원 정도 된다. 물론 부동산으로 환산하면 더 커지겠지만 쌀값으로 환산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 통계학 이론이다. 1930년대 중반에도 100억원 정도 소유한 한국인 부호가 20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다. 최창학, 방응모, 김태원 같은 금광 부호나 김기덕, 홍종화 같은 부동산 부호가 없었다면 이 숫자도 훨씬 적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민지에도 상류사회는 존재했다. 상류사회의 징표는 몇몇 명사 구락부들과 골프·승마구락부 또는 귀족회관에 가입한 회원들이었다. 이완용의 조카인 친일파 한상룡(韓相龍)이 주도하는 조선실업구락부(朝鮮實業俱樂部), 105인 사건의 주모자였다가 친일파로 전락한 윤치호(尹致昊)가 주도하는 계명구락부가 상류 모임으로 꼽혔다.

『삼천리』 1938년 1월호는 ‘서울의 상류사회, 입회금(入會金)만 300원 드는 골프장’이란 기사에서 1930년대 후반 식민지 한국 상류사회의 징표로 경성골프구락부를 들었다.

경성골프구락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다가 순종 사후 이왕(李王)직을 세습한 영왕(英王: 영친왕)이 명예총재였다. 『삼천리』는 경성골프구락부에 ‘이왕 전하 이하 조선총독부 고관은 물론 서울 안에 있는 일류 명사와 지방에 있는 대재벌과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영미(英米)인은 거의 멤버로 되어 있다. 뚝섬골프장에 있는 경성골프운동장에는 조선 일류 명사들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나라를 빼앗긴 왕족이 총독부 고관 및 친일파들과 어울려 골프를 치는 것이 식민지 한국의 상류사회 모습이었다. 경성골프구락부 멤버가 되려면 회원 2명 이상의 추천에 입회비 200원과 연회비 60원에 매월 20~30원의 비용이 들어야 했다. 1934년 한국 내 가장 엘리트 직업이었던 동아·조선일보 신문기자의 봉급이 40~90원 정도일 때의 일이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