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다음에는 이기붕과 아들 강석이 대통령이다"
2015-07-13 15:53 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106] 집단자살로 막 내린 이기붕 집안의 야망, 그리고 박마리아 

집단 가족자살로 오욕의 삶을 끝내기 전의 이기붕 일가 모습. 왼쪽부터 장남 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차남 강욱.


'탕~탕~탕~탕~탕!' 

1960년 4월 28일 새벽 5시 40분, 조용하던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구내 36호 관사에서 갑자기 총성소리가 들렸다. 총소리를 듣고 별실에 머물던 이무기 비서가 곧바로 경비실에 연락을 했다. 급히 경비원들이 문을 열었으나 이미 이기붕 일가 4명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방안에 피가 낭자한 가운데 정면의 긴 소파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이기붕-박마리아-강욱이 손을 잡고 앉은 상태로 머리는 모두 뒤로 젖혀져 있었다. 소파 1m 앞에는 이강석이 소파 쪽으로 다리를 뻗고 누워 있었다. 

이들이 일가족 집단자살을 결심한 후 큰아들 이강석이 부친, 모친, 동생을 차례로 쏘고 자살한 것이다. 이들이 자살하기 전 이승만 대통령이 4.19혁명에 굴복해 하야했다. 어떻게 하다 이런 비극이 벌어졌을까? 

◇ 이기붕 부부, 큰 아들 강석을 대통령에게 선물하다 

1957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83회 생일축하 케이크를 자르는 이 대통령 부부의 사진. 맨 왼쪽이 양자인 이강석이다.

1957년 3월 26일 이승만의 83세 생일에 맞춰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기붕과 그의 아내 박마리아 사이에는 장녀 이강희(이화여중 재학 중 요절), 장남 강석, 차남 강욱이 있었는데 이들 부부는 장남을 이승만에게 생일선물로 바친 것이다. 

이기붕은 누구인가? 1950년대 집권 자유당의 실력자(중앙위원회 의장), 이승만 대통령의 후계자, 민의원(국회) 의장, 이른바 '서대문 경무대'의 주인으로 이 나라 최고 권부의 정상 바로 밑까지 올라간 실권자였다. 

그는 1960년 봄 이승만 대통령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선거에 출마해,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당선됐다가 4·19혁명으로 몰락하는 인물이다. 아들을 최고 실권자의 양자로 선물하면서 만송 이기붕의 후계자 자리는 확고해졌다. 

더불어 그의 아내인 박마리아의 위상도 하늘을 찔렀다. 박마리아는 1956년 대한부인회 대표 최고위원에 올라 여성계 1인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해 이화여대 부총장으로 올라갔다. 

이승만은 왜 뜬금없이 그 나이에 양자를 들였을까? 

이승만이 군부 인사 가운데 가장 총애했던 백선엽 장군은 이렇게 해석했다. 

"내 견해로는 이 대통령이 전래의 동양적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혈통을 잇겠다는 데 집착한 나머지 이기붕의 아들을 양자로 삼고, 이기붕을 후계자로 여긴 것이 그의 자멸을 재촉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휴전 이후 다소 한숨을 돌리게 되자 자녀가 없음을 비관하는 말을 내비치곤 했었다. 일선의 군부대를 순시하는 도중 이름 없는 무덤들과 마주치면 ‘저 묘는 어떤 후손이 지켜주고 있을까?’라며 감상에 젖어드는 장면을 몇 차례 볼 수 있었다." 

이승만과 이기붕 둘다 이씨 왕조의 양녕대군 후손이다. 이승만은 17대후손, 이기붕은 18대 후손이다. 자식이 없는 이승만은 이기붕의 장남을 양자로 들여, 문자 그대로 이씨왕조를 재현할 심산이었다. 

이 야심을 부채질 한 사람은 이기붕이 아니라 그의 부인 박마리아였다. 이 집안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박마리아의 정치적 야심이 남편보다 더 강했다"고 평가했다. 

해방 직후 이승만이 귀국해 머문 돈암장에서 이기붕은 그의 비서로 일했다. 이때 이승만의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와 친해진 박마리아는 집요한 공작을 벌여 이기붕을 후계자로 만들었다. 사방팔방으로 설치고 다녔던 박마리아의 속살을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살펴보자. 

오른쪽부터 시계 반대방향. 무초 주한 미국대사,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 여사, 콜트 미8군 부사령관. 이들을 초대한 박마리아 여사는 자신의 출신 학교이자 교수로 있던 이화여대 여학생들을 불러 미국팝송을 부르게 했다.

1951년 6월 국방부장관에 취임한 이기붕은 미국 관계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오른쪽부터 무초 주한 미국대사,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 콜트 미8군 부사령관이 앉아 있다. 사진 왼쪽 아래로 보이는 손의 주인공이 이 자리의 호스트인 이기붕이다. 그러면 툇마루에 서있는 여학생들은 누구인가? 

바로 한국 최고의 엘리트인 이화여대 학생들이다. 자기 제자들을 불러 귀한 손님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양말 차림으로 팝송을 부르게 한 것이다. 정말 무서운 여자다. 

◇ 기고만장한 이강석을 모방한 ‘가짜 이강석’이 나타나다 

이강석을 사칭하고 다니다 체포된 강성병.

대통령의 양자가 된 이강석은 거칠 것이 없었다. 대낮에 정복 차림의 헌병을 구타하고 파출소의 기물을 부셔도 누구 하나 그를 문제삼는 사람이 없었다. 양자가 된 직후 어거지로 서울대 법대에 편입하려다 법대생들이 동맹휴학에 돌입하는 바람에 무산되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이때 희한한 인물이 나타난다. 

1957년 8월 21일 아침 6시부터 몰아친 태풍 아그네스가 경북 동해안 일대를 강타해 막대한 수재가 발생했다. 이런 와중에 대학입학시험에 떨어져 거리를 전전하던 22살의 강성병이란 청년이 경상북도에 나타났다. 

그는 경주의 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나 이강석인데~ 아버지의 명을 받고 경주 지방의 수해 상황을 살펴보러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깜짝 놀란 서장은 "귀하신 몸이 어떻게 여기까지..."라고 말하며 즉각 달려가 경주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모셨다. 

다음 날에는 경주 일대의 유적지 관광을 시켜주면서 많은 선물을 안겼다. 그것도 모자라 인증샷이라고 둘이서 기념촬영까지 한 뒤 다음 행선지까지 자기 차도 빌려주고 운전기사까지 딸려보냈다. 

자신감을 가진 '가짜 이강석'은 그 차를 타고 영천까지 가서 미리 연락을 받은 경찰서장의 환대를 받았다. 이어 영천경찰서 경무과장의 경호를 받으면서 안동으로 갔다. 안동에서는 지역 유지들을 모아놓고 으름장을 놨다. 

"나는 이강석인데, 하계휴가차 진해에 계시는 아버님의 밀명으로 풍수해 상황을 시찰하고 공무원의 비리를 내사하러 왔다", "암행시찰이니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된다", "아버님께서 누설자는 엄중히 다스린다고 말씀하셨다", "수재민에게 나눠줄 쌀이 필요한데..." 

겁을 먹은 유지들은 서둘러 46만 5천 환이란 거액을 모아 가짜 이강석에게 전달했다. 어느 경찰서장은 고급 요정이나 관사에서 식사를 대접하면서 공석 중인 치안국 통신과장 자리를 청탁하기도 하고, 어느 서장은 야당 탄압과 여당 지원 사실을 보고하면서 "명년에 있는 민의원 선거에 반드시 자유당 후보를 당선시키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대구에 가는 길에는 육군 모 사단장이 지프차를 타고 달려와 노상에서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하고 소매를 잡아당기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대구에서 도지사 관사에 묵었던 '가짜 이강석'은 결국 들통이 났다. 도지사가 진짜 이강석의 친구인 자기 아들을 내세워 얼굴을 확인한 뒤 경찰에 연락해 체포한 것이다. 

'가짜 이강석' 재판정에는 대구법원이 생긴 후 최대 인파인 1천여 명의 방청객이 몰려왔다. 판사 전용 출입문까지 밀려든 인파 때문에 법정에 들어가던 판사의 법복이 찢어지고 법정 안의 의자 절반이 부서질 정도였다. 

득의만만한 '가짜 이강석' 강성병은 방청객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열변을 토했다. 

그는 먼저 사기극의 동기에 대해 "언젠가 신문을 보니 서울 명동경찰서에서 이강석이 헌병의 뺨을 때리고 행패를 부려도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강석이라면 무엇이든 통하는 세상이라고 믿었다"고 진술했다. 이어 다양한 주장을 펼쳤다. 

"자유당 정권의 부패상을 시험해보는 것도 동기의 하나였다", "돈만 있으면 언제라도 (사바사바)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세태가 아니냐?", "이번 체험을 통해 권력의 힘이 위대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내가 시국적 악질범이라면 나에게 아첨한 서장이니 군수 등은 시국적 간신도배이다", "할리우드 같으면 60만 달러의 연기료를 받을 수 있는데 나는 연기료 대신에 벌을 받게 되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방청객은 물론 뉴스를 접한 전 국민이 환호했다. 그만큼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심이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가짜 이강석' 사건은 엉뚱하게 언론계로 불똥이 튀었다. 1958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에 <고바우 영감>의 '경무대 똥지게꾼' 만화가 실렸다. 김성환 화백은 이 사건을 빗대어 '경무대는 똥지게꾼도 권력이 세다'고 야유했다. 덕분에 경찰서에 끌려가 벌금형을 받는 고초를 겪었다. 

◇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4.19혁명 발발...쫒기는 이기붕 일가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이기붕의 집에서 들고 나온 가구들을 불태우고 있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사상 최대·최악의 부정선거로 치러졌다. 분노한 국민들의 시위가 4월 말까지 전국을 휩쓸었다. 바로 4.19혁명이다. 시위군중들의 목표 중 하나가 이기붕 일가였다. 

4월 19일 오후 2시경 광화문에 모인 군중들이 "서대문 이기붕 집으로 가자"며 몰려갔다. 이기붕 가족들은 서둘러 의정부 북쪽에 있는 육군 제6군단 본부로 피신했다. 

여기서 이틀을 보내고 다시 서대문 집으로 돌아왔으나 25일 오후 교수단 시위가 벌어지면서 다시 군중들이 몰려오자 2차 피난을 떠났다. 이기붕 일가는 옷과 신발도 제대로 못 갖춘 채 지프차를 타고 다시 6군단으로 도망갔다.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경무대의 박찬일 비서가 전화를 했다. 이승만이 허정, 변영태, 이범석, 윤치영 등 4명을 다음날 오전 10시에 경무대로 불렀다는 보고였다. 이승만이 오랜 측근 원로들을 불러 시국 수습 방안을 논의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박마리아는 "이들 중에 허정, 변영태에게만 연락하라"고 지시했다. 도망다니는 와중에서도 비서실을 원격 조종하는 '서대문 권력'의 막강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결국 경무대에는 박마리아 지시대로 두 사람만 들어와 이중 허정이 이승만 하야 후 과도정부 수반으로 새 정권을 창출한다. 

4월 26일 경무대 경찰관이 6군단에 와서 이기붕 일가를 경무대로 데려갔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이기붕 일가가 집단자살한 것이다. 

조선일보 4월 28일자를 보면 마치 기자가 옆에서 본 것처럼 이기붕 일가의 최후를 그렸다. 

"28일 새벽 5시 40분, 다섯 발의 권총 탄환은 이기붕씨 일가 4명을 영영 이 세상에서 하직케 했다. 멀리 바리케이트가 처져있는 경무대앞 세종로 1번지의 경무대 여비서 이무기씨 집의 조그마한 방에서 일가 4명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장남 강석(육군 소위. 24세)군은 미리 준비했던 4.5구경으로 말쑥하게 단장하고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는 아버지 이기붕씨에게 우선 한 발을 쏘고 어머니 박마리아 여사에게 2발을 쏜 다음 동생 강욱(연세대 2년생)에게 제3탄을 쏘아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자신에게 연속 2발을 쏘아 자살했다."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이화장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권력 2인자의 죽음은 너무나 허망했다. 조사도 읽지 않은 채 15분도 안돼 영결식이 끝났다. 값싼 목관에 허술한 수의를 입힌 채 망우리로 갔다. 

이기붕 일가가 자살한 4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화장으로 집을 옮겼다. 한달 후 미국대사관의 알선으로 하와이로 망명했다. 두 번째 망명이다. 비행기를 타고 조국을 떠날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못다 이룬 이씨 왕조의 재건이 제일 아쉽지 않았을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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