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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대통령’ 장준하…의문의 죽음 40년
뉴스K  |  kukmin2013@gmail.com  승인 2015.08.17  21:44:46  수정 2015.08.18  07:50:44


오늘이 장준하 선생이 돌아가신 지 4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독립운동가에서 언론인, 정치인, 그리고 민주화 운동가로서의 삶을 살며, '재야대통령'으로 추앙받던 고 장준하 선생.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을 장부경 피디가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191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고 장준하 선생.

그의 삶의 궤적을 사진을 통해 보겠습니다.

 
광복군 시절의 장준하 선생입니다.

일제하에 광복군 장교로 활약한 장준하 선생은 광복이 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비서로, 조국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의 곁을 떠나, 이범석과 함께 합니다.

하지만 이범석은 이승만 측 인물로 정치적 입장이 달라, 결국 이에 환멸을 느껴 그의 곁을 떠납니다.

이후 그는, 언론인의 삶을 택합니다.

그리고 이 월간 <사상계>를 창간합니다.

 
<사상계>는 1953년 4월 1일 창간돼, 1970년 5월 1일 205호를 끝으로 폐간된 월간지입니다.

당시 <사상계>는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데 앞장섰던 최고의 잡지였습니다.

또한, 이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돼 추진했던 대일외교, 월남파병 등의 정책을 비판하는데도 앞장 섰습니다.

당시, <사상계> 대표시절의 모습입니다.

1965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언론탄압의 전형적인 모습인 '재갈물리기'로 압박을 당하고 이후 1970년 5월,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실었다가 결국 폐간됩니다.

'재야 대통령'이라고 불린 장준하 선생은 반정부 투쟁의 대표적 인사로, 민주화 운동가였습니다.

1973년 10월 유신헌법이 공포되자 같은 해 12월 24일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합니다.

 
이로 인해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 악화로 가석방됩니다.

1년 후 1975년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합니다.

대통령이 개헌을 발의해 민주헌법을 만들어 따르고, 긴급조치로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생을 무조건 즉시 석방하고 자유언론을 보장하라고 주장합니다.

1975년 8월 17일, 경기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습니다.

당시 사인은 실족사였지만 여러 정황상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됩니다.

이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과 2004년 두 차례, '진상규명 불능'이라고 판정합니다.

2012년 8월 17일, 장준하 추모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이장이 진행됩니다.

이 때 발견된 의문의 두개골 골절 모습입니다.

 
추락사가 아닌 때린 것에 의한 타살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리고 2013년 12월, 의문사 진상을 밝히기 위한 '장준하 특별법'이 발의된 상태로, 당시 정권에 의한 타살이 아니냐는 의혹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끝으로, 고 장준하 선생의 이 말을 전합니다.

 
국민TV 뉴스, 장부경입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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