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원과 식민주의, 일본인-조선인-동물의 위계
등록 : 2015.03.20 20:11수정 : 2015.03.21 15:46

1910년 한일병합 직전인 1909년 일반에 개방된 창경원 동물원은 조선 민중에게 양가적 감정을 주었다. 국왕이 살던 궁궐이 훼손되면서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반면 누구나 평등하게 궁궐에 들어가 신문물을 구경하는 근대적 평등의 새 세상이 열린 것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엽서에 실린 창경원 동물원의 금수사 풍경.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토요판] 생명
조선 민중은 호랑영감에게 잡아먹힐 토끼가 불쌍했다

▶ 동물원의 역사에는 식민주의가 배어 있습니다. 동물원은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포획한 동물들을 제국의 도시에서 전시하는 공간이었습니다.(때로는 원주민이 전시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자연 생태계를 식민지화한 인간의 동물지배를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했지요. 20세기 초반 일본은 수도 도쿄의 우에노동물원을 비롯해 서울, 타이베이 등 아시아에 수십개의 동물원을 경영했습니다. 서울 한복판에 덜컥 들어선 신문물을 본 조선 민중들의 심경은 복잡했습니다.

매년 1월1일, 12간지 동물을 특집기사로 쓰는 것은 지금이나 100년 전이나 마찬가지였다. 1927년 정묘년, <동아일보>는 1월1일부터 ‘토끼 타령’을 내보내고 있었다. 1월2일에는 ‘창경원 토끼’가 화자로 나섰다.

“나는 창경원 토끼입니다. 세상에서는 우리 토끼 족속들이나 동물계에서뿐이 아니라 인간들까지라도 내가 사는 곳이 창경원이라 토끼 중에는 문벌 좋은 양반 토끼로 알며 팔자도 좋은 줄로 짐작합니다… 실상 우리들은 이 집에 있는 다른 짐승들과 같이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집 대문 안에 들어오면 털오라기나 썩은 대장 외에는 이 집 문밖을 다시 나가볼 수가 없습니다… 애당초에 우리가 이 집에 오기를 사자나 호랑 영감 같은 맹수들의 일주일에 한두번씩 먹는 별식감으로 팔려온 것이니까….”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토끼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도 전에 일본인 학자들은 한반도의 지리·지질 조사를 완수했다. 근대적 지리조사를 일본이 수행했기 때문에 일본인의 관점, 편견이 담길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 지리학자 야즈 쇼에이가 1902년 <지리학소품>에서 한반도를 토끼 모양으로 묘사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최남선은 1908년 <소년> 창간호에서 두 다리를 뻗고 대륙으로 웅비하는 호랑이 모양으로 한반도를 형상화하면서 이런 인식에 반기를 든다. 최남선에게 토끼는 조선인의 나약하고 순종적인 태도를 뜻했고, 이는 일본의 식민정책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최남선 연구자인 류시현 광주교대 교수는 19일 “최남선이 직접적으로 일본인 학자를 거론하진 않았지만, <소년> 창간호에 각각 토끼와 호랑이 모양의 한반도를 함께 보여주며, 한반도는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토끼가 일본 식민주의가 본 조선을 상징했다면, 호랑이는 조선 민족주의가 상징적으로 내놓은 토템이었다.

유럽, 일본 그리고 조선의 동물원

근대 동물원은 ‘서구의 발명품’이다. 18~19세기 유럽 열강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로 영토를 넓히는 만큼 주요 도시마다 동물원이 생겼다. 호랑이, 사자, 코끼리 등 이국적이고 진귀한 동물이 포획됐고 동물거래 시장이 형성됐다. 서구의 동물원은 △제국주의의 확장 △과학지식의 축적 △근대적 시민공간 제공 등의 역사적 지층 속에 존재한다.

아시아의 유일한 제국이었던 일본의 동물원은 좀 다른 탄생 배경을 지녔다. 1862년 후쿠자와 유키치가 유럽을 둘러보고 쓴 <서양사정>에 동물원이 소개된 뒤, 일본은 국가적인 노력으로 1882년 도쿄 우에노 동물원을 설립한다. 서구 동물원이 민간 중심의 자연발생적인 태생을 가졌다면, 일본 동물원은 서구를 모방하고 따라잡기 위해 창조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동물원 창경원은 또 일본과 다르다(최초의 동물원은 유한성이 세운 사립동물원으로 여겨진다). 조선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세워졌다. 국가의 필요나 시민의 요구 등 근대적 열정에서 나타났기보다는 일본에서 ‘직수입’됐다. 오히려 동물원을 사치로 여기는 게 당시 조선인의 일반적 정서였다고 창경원 동물원 연구자인 서태정(서강대 사학과 박사과정)씨는 말한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친일 개화파를 체포하러 일본에 간 박대양이 일본 동물원을 방문한다. 그는 여행기 <동사만록>에서 민생을 걱정한다.

“(일본이) 근래에 개화한 뒤로 영조(營造·건물을 짓거나 만듦)에 급급하여 먼 곳 가까운 곳의 공작물들을 모아 왔으니, 그 비용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사물에 대하여 박식한 사람으로 하여금 보게 한다면, 혹은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오늘날의 천하에서 나라를 위한 급선무는 아닌 것이다. 임금의 마음은 점점 호탕해지고, 민생은 더욱 곤궁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서태정, ‘대한제국기 일제의 동물원 설립과 그 성격’에서 재인용)

창경원과 동물들을 바라보는 식민지 조선인의 심경은 복잡했다. 창경원 동물원은 애초 1908년 궁내부 차관 고미야 미호마쓰가 왕실의 위락시설로 설립을 제안했고 순종이 허락함으로써 공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1909년 일반에 개방되기까지 공사 계획과 결정, 운영의 헤게모니는 ‘차관 정치’로 조선의 내정을 쥐락펴락하던 일본이 쥐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창경원 동물원은 전제적 왕권의 공간을 시민에게 내준 근대성의 상징인 동시에 왕실의 존엄을 훼손한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기도 했다. 창경원 토끼 타령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당시 신문을 살펴보면, 동물원이 서울 한복판 궁궐에 덜컥 들어서자 사람들은 당혹해했다. 왕실 건물 20여채가 헐렸다. 창경궁 명정전 앞뒤로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이 들어섰다. 이로써 조선의 ‘전근대적 왕실’ 공간은 일본의 ‘근대적 동물·식물원’ 등에 포위됐다. 그러나 일반 시민에게는 종람표(입장권)를 살 수만 있다면 - 순종이 관람하는 월·목요일을 제외하곤 - 궁궐에 들어갈 수 있는 새 세상이 열린 것이기도 했다. 일본 제국은 500년 이상 이어진 봉건적 왕권질서를 공간적으로 해체하고 있었다. 조선의 시민들은 궁궐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근대 시민으로서의 자부심, 진기한 동물을 본다는 호기심에 매료돼 창경원에 갔다. 1909년 동물원 개방 때 73종 358마리가 전시됐다. 코끼리를 구입하러 인도에 가고 춘천 등지에서 호랑이를 잡는 등 대한제국은 국가적인 동물수집 체제에 나섰다. 시베리아호랑이, 반달곰, 제주말, 쌍봉낙타, 일본원숭이, 캥거루, 타조는 물론 요즈음에도 진귀한 오랑우탄도 있었다.

한국 최초 공립동물원 창경원은 사회·경제적 수요 없이 순종의 위락시설 명목으로 일본에서 ‘직수입’ 설치됐다. 일본인, 조선인 중산층이 주이용자.
궁궐 건물 20여채 헐려나가고 마귀가 설립, 사람 머리를 한 개… 기괴한 동물괴담 떠돌고 실내에선 ‘조리’ 신으라는 규율, 민중들은 무서웠고 불편했다

동물원 개방 직후부터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당시에는 들개들이 사람을 무는 사고가 빈발해 ‘사견취체규칙’(飼犬取締規則)을 제정해 목줄이 없는 개를 경찰이 포획해 죽이곤 했는데-이를 야견박살(野犬撲殺)이라고 했다-, 이런 개들을 “동물원 짐승에게 먹이고, 인두구신(人頭狗身)의 개를 구입한다는 괴소문이 나돌았”다. 동물원을 “마귀가 설립”했다거나 동물들이 “염라귀졸들의 박람물품”이라는 비아냥도 신문에 버젓이 실렸다.(대한제국기 일제의 동물원 설립과 그 성격)

개원 당시 창경원에 들어가는 종람표는 10전이었다. 당시 역부의 하루 일당이 45~110전이었니 적지 않은 가격이다. 창경궁 종람규정을 보면, “추루한 의복”을 입거나 “광질”(정신병)인 자는 입장할 수 없었다. 창경원 박물관에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거나 일본 실내화 ‘조리’를 신어야 했다. <동아일보> 1920년 5월6일 휴지통은 조선인이 주인 행세를 못하는 사정을 힐난한다.

“창경원 구경을 좀 가랴 하야도 비위가 상하는 일이 하도 만하서 못 가겠서. 박물관에를 좀 들어가랴면 신발을 버스라고 패를 써붓치엇스나 다시 신고 들어갈 것이 잇서야지. 쪽발에나 신고 단일 신인지 막걸닌지 그것만 몃개를 노왓스닛가. 우리 조선 사람은 평생에 그 따의를 신을 수가 잇스며 또한 그것을 발에다가 뀌고야 형세를 알 수가 있나… 어서 좀 그 안이꼽고 구역질나는 소리인지 조리인지를 치워바리엇스면 먹는 밥이 살로 갈 터이야.”

1930년 취미잡지 <별건곤> 28호에 실린 한 소설에는 창경원 관람객의 절반이 일본인이고 나머지의 절반이 조선인과 양인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서태정씨는 19일 “창경원 동물원은 애초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해 지어졌다. 주된 이용객도 일본인과 조선인 상류층이었다”고 말했다.

맹수의 잇단 죽음과 동물실험

물론 지배와 차별의 콘텍스트만 발견되는 건 아니다. 1924년에는 벚꽃놀이를 위해 야간개장이 이뤄지면서 창경원 방문 인파는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창경원 방문객은 1909년 1만5851명에서 1920년 28만1689명, 1940년에는 139만8540명으로 치솟는다. 창경원은 ‘귀족 공원’에서 ‘시민 공원’으로 점차 문턱이 낮아진다.

런던동물원 등 유럽 동물원이 과학연구와 관련을 맺었던 것처럼 제3세계 변방의 동물원인 창경원도 과학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1934~35년 호랑이, 표범 등 세 마리, 사자 네 마리 등 아홉 마리가 연쇄적으로 폐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들의 사인을 두고 “총독부 세균시험실, 성대(경성제대)의학부, 경성부 위생실험실 셋이 각각 자기들의 주장을 고집하야 보기 드문 의학계의 논쟁”(<동아일보> 1935년 2월6일)이 벌어진다. 인수공통 전염병인 마비저로 사인이 추정되면서, 말고기 사료 급여가 중단된다. 마비저는 말, 당나귀와 그 마부에게 발생하는 인수공통 전염병이다. 경성제대 의학부는 병에 걸린 맹수의 장기를 주사한 실험쥐가 마비저 특유의 증상을 보인다며, “세균학적으로나 면역학적으로나 또는 동물실험의 견지로부터 보드라도 물론 마비저”(˝ 2월19일)라고 결론내린다.

동물원은 식민주의의 공간이다. 인간(문화)이 동물(자연)을 지배하는 곳이자, 문명이 야만을 전시하면서 지배하는 공간이다. 서구의 근대 동물원·박물관은 동물뿐 아니라 아프리카, 북극 등의 원주민을 전시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2등국민’이었다. ‘일본인-조선인-동물’로 이어지는 존재의 위계가 창경원 동물원 속에 흐르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창경원은 문명인(일본인)이 야만인(조선인)에게 제국이 선취한 근대성을 보여주며 야만 상태의 2등국민을 계몽하는 이중의 식민주의의 공간이기도 했다. 동물원에서 제일 약자는 동물, 그중에서도 맹수의 먹이로 바쳐진 토끼나 야견박살로 끌려왔을지 모르는 개들이었다. 조선인이 맨 처음 동물원의 등장에 공포를 느끼고 나중에는 동물원에 갇힌 토끼에게 연민을 느낀 것도 식민주의가 관통하는 약자와 약자 사이의 유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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