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5161745255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31) ‘연나라 강역도’와 조선

입력 : 2008.05.16 17:45 수정 : 2008.05.16 17:45 


조선을 연나라 땅이라고 우기는 中역사서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국시대 연나라 강역도. 랴오둥은 물론 한반도 청천강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선양 | 김문석기자>


“연나라는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 5군을 두어 오랑캐를 방어하였다.”(사기 흉노열전·연소공세가)


“연나라는 전성기 때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격하여 연나라에 귀속시켜 관리를 설치하고 요새에 성을 쌓았다.”(사기 조선열전)


■ 연나라가 한반도까지?


이런 자료를 토대로 역사를 요리하는 중국을 보면 부러움 반 자괴감 반의 복잡한 기분이 절로 든다. 랴오닝성 박물관에 붙어있는 전국시대 연나라의 강역도를 보자. 그 경계가 랴오둥(遼東)은 물론 한반도 서북부까지 이른다. 화가 치밀어올라도 어쩔 수 없다. 잘못 대들었다가는 일패도지(一敗塗地)할 수밖에…. 사료를 반박할 그럴듯한 근거를 대라 하면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사료도 갖추지 못했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성을 갖고 보면 그들이 신주 모시듯 하는 사료에 숨어있는 허점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 측 자료는 어차피 중국의 역사를 쓴 것이고, 주변국의 역사는 자기 역사를 치장하기 위한 양념일 뿐이다. 따라서 소략하게 취급하거나 폄훼하거나, 왜곡하기 일쑤다. 우리는 이쯤해서 마음을 다잡고 중국 측 사료에 담겨 있는 구절을 일일이 따져보고, 그것이 품고 있는 함의에서 진실을 찾을 참이다. 하지만 책장에서만, 그것도 숨은 뜻을 찾고자 하면 그 또한 자기 위주의 해석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기에 중국학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고학적인 뒷받침, 곧 증거를 댈 참이다.


먼저 기자(箕子)조선의 강역 문제이다. 최근 지린대(吉林大) 역사교과서인 ‘동북사’는 “주나라 초기의 기자국(箕子國)은 고조선 땅에 있었는데, 지금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周初的箕子國位于古朝鮮地 也就是在今朝鮮大同江流域)”이라고 해놓았다.


차오양(朝陽)에서 확인된 춘추시대 청동단검 거푸집과 청동끌 거푸집.


즉 기자가 은(상) 주왕(紂王)의 폭정을 피해 본향, 즉 은(상)나라의 옛 고향인 랴오닝성 서부지역으로 간 뒤 곧바로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것이다.(箕子首先遷到今天的遼寧省西部地區 而後又從這里遷往朝鮮半島) 그러면서 교과서는 랴오닝성 카줘(喀佐) 등에서 나온 ‘기후(箕侯)명’ 청동기 등 각종 은(상)의 청동예기들을 그 증거로 들었다. 청동기 명문인 ‘기후(箕侯)=기자(箕子)’임을 논증한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 교과서는 여전히 ‘기자조선의 영역=대동강 유역’설을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어요. 이미 살펴보았듯 기자(箕子) 일행이 신주 모시듯 하고 가져왔던 은말 주초의 청동기들은 랴오허(遼河) 동쪽에서는 보이지 않아요.”


이 고고학적 자료들은 기자(箕子)가 랴오허를 결코 넘지 못했다는 뜻이다. 대신 기자가 정착한 다링허(大凌河) 일대에서는 BC 9세기 무렵부터 기자 일행이 기존의 고조선 세력과 함께 만든 문화, 즉 발해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동검)을 중심으로 한 난산건(南山根) 문화가 성행했다. 또 춘추전국시대 중원의 북방, 즉 중산국과 고조선 등 동이의 나라들과 국경을 맞댄 연나라의 역사를 보면 몇가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주나라 무왕이 은(상)을 멸한 뒤(BC 1046년쯤) 소공(召公) 석(奭)을 연(燕)에 봉했다.


차오양 십이대영자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그런데 소공이 연나라 땅에 분봉을 받았음에도 주나라의 도읍지 풍(豊·지금의 펑이:豊邑) 주변을 맴돌며, 결국은 섬(陝·지금의 허난성 산셴:陝縣)의 서쪽 지방을 관할하는 지위에 오른다는 것이 두고두고 이상한 일이다.


즉 “주나라 2대왕 성왕(成王·BC 1042~BC 1021년)이 소공에게 뤄이(洛邑·뤄양)를 건설하게 했고, 나중에는 섬(陝)의 서쪽 지방을 관장하게 하였다”(사기 주본기·사기 연소공세가)는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더욱이 주나라 초에는 은(상) 유민들의 반발이 워낙 거셌다. 주 무왕의 동생들인 관숙과 채숙이 은나라 유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성왕이 즉위한 뒤에야 겨우 산둥성(山東省)에 살던 동이족들을 정벌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동이족 계열인 은(상)의 반발이 거셌다는 얘기다.


“이는 무왕이 소공을 연에 봉했을 때는 주나라의 세력이 아직은 크지 않았다는 뜻이지. 성왕 초기에도 동쪽인 산둥성에서 헤매고 있었거든…. 은(상)의 항거가 워낙 거셌던 탓에….” (이형구 교수)


■ 연나라의 유적·유물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무왕이 소공에게 분봉했다는 연(燕)은 어디일까.


“처음엔 지금의 허난성 옌스(河南省 偃師)일 가능성이 많아요. 언(偃)은 연(燕)자와 같거든. 그리고 성왕 이후에 지금의 베이징 서남쪽인 팡산셴(房山縣) 부근으로 둥지를 옮겼을 겁니다. 역사서에는 연의 도읍지를 지셴(계縣·上都)과 이셴(易縣·下都)이라고 했거든. 어쨌던 류리허(琉璃河)에서 확인된 연나라 왕의 무덤이 그 단서가 될 것 같아요. 류리허에서 서주 초에 축조된 연나라 성터와 왕의 무덤이 발굴되었거든.”


그런데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 류리허 유적의 북쪽, 즉 옌산(燕山) 이북에서는 전형적인 춘추시대 연나라 유적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전형적’이라 하면 하나의 세트, 하나의 패턴을 갖춘 유적과 유물의 조합을 뜻한다.


“유적이나 유물들이 ‘하나의 문화’, 혹은 ‘하나의 영역’으로 규정되려면 유적·유물이 하나의 정연한 세트를 이뤄 일정한 패턴으로 확인돼야 합니다. 그냥 한 두 점씩 여기저기 흩어져 나온다면 유의미한 문화라 할 수 없어요.”(이 교수)


만약 춘추시대 연나라가 옌산을 넘어 다링허 유역은 물론 랴오둥 반도까지 영역을 넓혔다면 류리허 같은,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유적들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누누이 강조하지만 옌산 이북부터는 발해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단검) 문화로 대표되는 고조선(기자조선)의 문화가 보일 뿐이다.


■ 천하의 유세가 소진(蘇秦)이 남긴 한마디


또 하나 중요한 단서가 ‘전국책’ 연책(燕策)과 ‘사기’ 소진열전 등 사료에 숨어 있다.


전국시대를 혀(舌) 하나로 누빈 합종(合從)의 유세가로 6국의 재상을 겸한 소진(蘇秦)의 유세를 보자. BC 334년 소진은 합종을 위해 연나라로 가서 “연·제·위·한·조·초 등 6국이 합종하지 않으면 강대한 진(秦)나라를 이길 수 없다”고 설파한다. 그러면서 앞세운 말.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에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와 누번이 있습니다.(燕東有朝鮮遼東~)”


혀로 천하를 호령한 소진 같은 유세가가 연나라를 중심으로 말을 꺼낸다면 있는 순서대로, 즉 조선→요동 순으로 차례차례 말했다고 보는 게 상식이 아닐까. 그러니까 조선은 요동(랴오둥)의 서쪽, 즉 랴오시(遼西)에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 또 하나 소진의 말에서 또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면 이 시기, 즉 BC 334년에는 최소한 조선과 랴오둥은 연나라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연나라의 전성기


그렇다면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중국 사료, 즉 연의 강역이 동으로 랴오둥을 넘어 한반도까지 이른다는 기록은 어찌된 것인가.


여기에는 한가지 오해가 있다. 우선 춘추시대 연나라의 강역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지금 ‘사기’ 연소공세가와 조선열전, 흉노열전 등에 나오는 연나라의 강역은 전국시대 중기~말기, 즉 연나라 전성기의 기록이다.


“연나라는 밖으로 만맥(蠻貊·북동쪽 동이족을 멸시한 명칭일 것) 등 여러 종족과 대항하고, 안으로는 제(齊)와 진(晉)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느라 국력이 가장 약했고, 망할 뻔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800~900년간 사직을 보존했으며~.”


사마천의 논평(연소공세가)은 전국 7웅이지만 국력이 가장 약한 연나라에 대한 연민을 표현한 것이다. 하기야 그랬을 것이다.


BC 316년, 연왕 쾌(쾌)가 재상인 자지(子之)에게 왕권을 넘겨주자 연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는데, 이 때를 틈타 제나라와 중산국이 손을 잡고 연나라를 쳤다.(경향신문 4월26일자 참조) 이때 중산국에 땅 500리와 성 10곳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고(314년), 나라는 거의 망국에 이른다. 이 때 등장한 이가 바로 연나라의 중흥군주 소왕(昭王·재위 BC 311~BC 279년)이다.


소왕은 인재를 널리 구하는 데 힘썼다. 군사전략가인 악의(樂毅·BC 406년 중산국을 멸한 위나라 악양의 후손)가 위(魏)에서, 음양오행에 해박한 추연(趨衍)이 제나라에서, 힘이 장사인 극신(劇辛)이 조나라에서 일제히 달려왔다.


소왕은 BC 283년 무렵 진(秦), 초, 한, 조, 위 등과 함께 제나라에 대한 복수를 감행했다. 다섯 나라 중 유일하게 연나라 군사만이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까지 진입, 제나라의 궁묘와 종묘를 불살라 버렸다. 제나라 성 가운데는 즉묵(卽墨·산동성 핑두셴:平度縣) 등 3성만이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연나라에 속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제나라가 6년간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린 것이다.


■ 진개의 침략


그런데 이 글의 맨 처음에 인용한 ‘사기’ 흉노열전을 보면 재미있는 기록이 나온다.


“연나라 명장 진개(秦開)가 흉노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뢰를 받은 후 돌아와 군대를 이끌고 동호(東胡)를 습격, 패주시켰다. 동호는 1000여리나 후퇴했다. 진개는 훗날 자객인 형가(荊軻)를 수행해서, 진왕(秦王·훗날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秦舞陽)의 할아버지이다. 연나라는 조양,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이제 이 문제의 인물인 ‘진개’가 등장한다. 진개는 언제 적 사람인가.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유명한 ‘형가의 진시황 암살미수 사건’에서 추론할 수 있다. 형가 사건이 일어난 것이 BC 227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형가를 수행한 진무양의 할아버지인 진개는 연 소왕의 전성기, 즉 BC 283~BC 279년 사이에 활약했던 장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 진개란 인물이 또 한 번 등장하는, 그 유명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조를 보자.


“조선후(朝鮮侯) 준(準)이 감히 왕(王)을 칭하였다. 연나라 망명인인 위만(衛滿)이 공격하여 (기자조선을) 빼앗았다.”


그런데 이 단 한 줄에 불과한 이 기록에 덧붙여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AD 233~297년)는 ‘위략(魏略)’이라는 역사서를 장황하게 인용한다. 전체적인 내용과 풀이는 다음 회로 넘기기로 하고 연나라의 강역 부분만 인용해보면….


“위략에 따르면 조선왕이 왕을 칭하는 등 점점 교만해지자 연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이천리를 취하였다.”(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서 진수가 인용한 ‘위략’ 에서 부분 발췌)


그러니까 ‘사기’ 흉노열전과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 사서를 종합하면 연나라가 소왕 때, 즉 BC 300~BC 280년 사이 북방으로는 1000리, 동쪽으로는 2000리를 공격, 강토를 넓혔다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다시 증거물, 즉 고고학적 자료와 역사서가 품고 있는 숨은 뜻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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