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5091739025


[코리안루트를 찾아서](30)우리 역사 빼닮은 선우·중산국

입력 : 2008.05.09 17:39 수정 : 2008.05.09 17:39 


중산왕릉 위 우뚝 선 ‘향당’은 동이족의 표식


2300년 전 왕릉 설계도(조역도)에 따라 중국 학계가 복원한 착왕(錯王)의 왕릉과 향당 모습. 왕과 왕후, 애후, 부인묘 등이 나란히 조성됐다. 작은 그림은 이형구 교수가 복원한 고구려 장군총의 향당.


1974년부터 발굴한 중산왕릉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을 하나하나 풀어보자.


먼저 무덤이 석곽으로 조성된 것이다. 무덤에 돌을 쓰는 행위는 우리가 누누이 강조했듯 발해문명권, 즉 동이문화의 대표적인 묘제이다. 또한 묘실을 중심으로 아(亞)자형 혹은 중(中)자형으로 묘도를 조영했다든지 하는 것들은 은(상)의 전통이 그대로 살아있는 예이다. 또한 리쉐친(李學勤) 등 중국 학자들이 검토해왔듯 중산국 영역에서 쏟아지는 은(상)의 유적들과, 우칭셴(武淸縣)에서 확인된 선우황비(鮮于璜碑) 등은 선우·중산국=기자(箕子)의 후예임을 증거해준다.


■ 山자형 청동기의 비밀


자, 이제 중산왕릉에서 출토된 ‘산(山)’자형 청동기를 살펴보자. 착왕(錯王)과 성왕(成王)의 무덤에서는 산(山)의 형태를 지닌 청동예기가 모두 11점(착왕릉 5점, 성왕릉 6점) 쏟아졌다. 그런데 중국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끈 것은 이 청동예기의 크기와 형태, 그리고 무게다. 삼지창 모양인데, 크기는 119~142㎝, 폭 74㎝ 내외, 무게는 52~57㎏에 달한다. 이 청동예기의 윗부분은 세개의 첨봉(尖鋒) 모양으로 되어있으며, 밑은 원통형이고 옆에는 못구멍을 뚫었는데, 그 원통(직경 13.5㎝ 내외) 안에는 목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제 아무리 힘 좋은 장사라도 이렇게 크고 무거운 것을 병기로 휘둘러 적을 제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청동기의 모양도 심상치 않다.


“청동기는 산(山)중(中)이라는 두 글자, 즉 윗부분은 산(山)자, 밑부분은 중(中)자를 표시한 듯한 모양이다. 이것은 왕은 물론 백성들까지 산을 신성시하는 이른바 숭산(崇山)신앙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전국 중산국 영수성지 발굴보고서·허베이성 문물연구소·2005년)


발굴보고서는 “이 청동기가 타이헝(태행·太行)산록에서 기반을 닦은 뒤 중원으로 나가 만승(萬乘)의 두 나라인 조나라와 연나라를 연파한 중산국의 기세를 반영한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 예로 도읍을 정할 때 도읍 한가운데에 산(山)이 있는 곳을 택했는데, 중산국 도읍인 영수성(靈壽城) 안에는 독립된 작은 산이 있다. 이 대목에서 한마디 보태자면 도읍지 중심지와 주변에 산을 두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북악산과 안산, 남산, 북한산, 관악산 등을 둔 서울이 외국인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는 까닭이다. 풍수지리의 관점에서도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중국학계는 결국 “산(山)자형 청동기는 중산국의 왕권을 상징하는 예기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봉건사회에서는 왕권과 신분을 상징하기 위해 문 앞에 예기를 걸어놓는 예가 흔했다. 당나라 때 관직제도에 대해 쓴 ‘당육전(唐六典)’은 “삼품 이상의 고관과 중소주(中小州) 계급 이상의 관아에 예기들을 걸어놓았다”고 했다. 이것은 봉건시대의 등급제도를 표시하는 것인데, 걸어놓은 예기의 숫자에 따라 관직과 신분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중산국의 이 ‘산(山)’자형 청동기는 단순히 왕권과 신분의 상징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해석은 색다르다.


■ 황(皇)과 신라금관


착왕릉에서 확인된 청동 판형으로 만든 조역도. 금은상감으로 제작된 가장 오래된 건축설계도다.


“중산왕릉 출토 청동 방호(方壺·사각형 항아리 형태의 청동예기)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고전체로 ‘황조문무환조성고(皇祖文武桓祖成考)’라고 새겨진 부분이 있지. 이는 고조 할아버지(皇祖) 문공과 증조 할아버지 무공, 할아버지 환공, 그리고 아버지인 성왕을 뜻하는 것인데요. 자, 주목해서 ‘황(皇)’자를 보세요.”


이 교수에 따르면 고전체(古篆體)인 이 ‘황(皇)’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맨 위에 깃털이 천(川)자 모양으로, 밑에는 일(日), 즉 태양이 새겨져 있으며, 그 밑에는 왕(王)이나 토(土), 혹은 받침대(杆)와 같은 모양으로 돼있다.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을 보면 유우씨(有虞氏), 즉 순(舜)임금은 황(皇)으로 제사를 지냈다(有虞氏 皇而祭)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에 보면 이렇게 설명했어요. 즉 ‘황(皇)이라는 것은 순(舜)임금 때는 종묘 제사를 지낼 때의 관(冠)을 뜻하는데, 하(夏)나라 때는 수(收)라고 했고, 은나라 때는 우(旴)라 했으며, 주(周)나라 때는 면(冕)이다’라고….”


수나 우·면 모두 관을 뜻한다. 또한 왕롱바오(汪榮寶)는 “황(皇)에서 보는 일(日)의 형상은 관(冠)의 테를 뜻하고, 천(川)의 형상은 관의 장식을 뜻하며, 토(土)의 형상은 그것을 세운다(皇, 日象冠卷 川象冠飾 土象其架)는 뜻”이라고 했다. 근세의 유명한 학자 궈모뤄(郭沫若)도 “황(皇)은 관(冠)이라 하는데 깃털(川의 형상)은 그것을 장식하는 것(皇亦謂冠 羽毛飾之)”이라 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황(皇)은 즉 관(冠)을 뜻한다는 기록이다. 이 교수는 “모든 것을 종합할 때 ‘황(皇)’자는 임금이 왕관을 쓴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라고 해석한다.


이쯤해서 산(山)자형 청동예기를 다시 보자.


착왕릉 출토 방호(사각형 청동예기)의 명문 내용. 명문에 나오는 황(皇)자는 왕이 관(冠)을 쓴 모양이라는 해석이 있다.


“청동예기를 나무에 꽂아 세워놨다고 치면 마치 고전체의 ‘황(皇)’자를 연상시키지요. 제가 보기엔 중산국의 상징으로 썼던 이 청동예기는 황, 즉 왕이 썼던 관(冠)과 같이 왕의 권위를 상징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고보니 이 ‘산(山)’형 청동기가 꼭 신라금관의 세움장식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 신라금관과 흡사하지. 아닌 게 아니라 신라금관의 모티브가 됐을 수도 있어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면 “(BC 210~BC 206년 무렵) 진시황이 죽고 진섭(陳涉)과 항우(項羽)가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제, 조나라 백성들이 대거 기자(箕子)의 후예인 준(準)왕에게 망명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자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한국전쟁 때의 피란민 대열에서 보듯 천하가 어지러워질 때는 보다 안전한 곳이나 연고지로 인구의 대이동이 일어나잖아요. 조나라에 망했던(BC 296년) 중산국의 유민(遺民)들이 진(秦)말의 혼란기를 틈타 조선 땅으로 대거 유입되었고, 이들의 후예가 부여, 고구려를 거처 관(冠)의 모티브를 전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잖아요.”


물론 신라금관의 출자(出自)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며, 이 교수의 해석 역시 숱한 설(說)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향후 연구과제로서 충분한 질문거리를 던졌다고 봐야 한다.


■ 가장 오래된 설계도


중산왕릉 발굴이 던져준 또 하나의 착안점은 왕릉의 설계와 구조이다. 중산국의 최전성기인 BC 310년 무렵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착왕(錯王)의 능에서는 무덤의 기획설계도, 즉 청동판형으로 만든 조역도(兆域圖·길이 94㎝ 폭48㎝ 두께 1㎝)가 고스란히 발굴되었다. 금은상감의 완벽한 상태로 확인된 조역도는 궁전의 명칭과 크기, 위치까지 그려져 있었다. 최고(最古)의 설계도 발견에 건축사학계는 자지러졌다. 조역도엔 “재상 사마주에게 명하노니 능묘건축 때 규정된 촌법을 따르지 않는 자는 엄벌에 처하라. 그 자손까지 죄가 이어지게 하라~”는 국왕 조서까지 새겨져 있었다.


중산왕릉에서 출토된 거대한 산(山)자형 청동예기(왼쪽 사진). 신라금관의 세움장식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왕릉 위의 향당(享堂)의 존재였다. 향당은 선왕을 제사지내려고 능묘상에 세운 종교적인 목조건축물이다.


“중산왕릉에서 향당이 존재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어요. 향당은 동이족의 전형적인 묘지이거든.”


이미 은나라 무정(武丁·BC 1250~BC 1192년)의 왕비이자 여장군인 부호(婦好)의 능(인쉬·殷墟)에서 향당의 흔적이 확인된 바 있다. 중산국의 착왕릉를 보면 지하에 왕당(王堂·착왕), 왕후당(王后堂), 애후당(哀后堂), 부인당(夫人堂), 口口당 등 5기의 석곽묘에 시신을 묻은 뒤 각 능묘 위에 5채의 향당이 조성되었다.


“형식을 보면 지하에 묘를 두고, 지표면은 높이 15m의 흙을 판축기법으로 쌓아올린 뒤 대사식고대(台사式高台·높은 누각을 조성한 건물) 3층단의 상부에 조성했어요. 3층 건물의 높은 향당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그렇게 장대하게 조성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향당은 고구려와 발해, 백제 등에서도 흔히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이형구 교수의 설명이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輯安)의 고구려 수도 국내성에 조성된 장군총이 대표적이다. 이미 1910년대에 장군총을 조사한 바 있는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장군총의) 정상에 기둥을 끼운 흔적들이 있는데, 이것은 난간을 둘러 무덤의 외관을 장엄하게 보이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해석했다.


세키노 다다시는 이때 장군총 정상에서 연화문 수막새 같은 기와편들을 다수 확인했다. 그는 “이런 기와편들은 빗물이 능침 안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각 단과 단 사이에 덮은 흔적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장군총뿐 아니라 태왕릉, 천추총, 임강총, 서대총, 중대총 등 고구려 시대 적석총의 정상부에는 어김없이 기와편들이 집중 수습되었다.


■ 고구려에서 확인된 중산의 향당


하지만 이형구 교수는 “바로 고구려 적석총 정상부의 난간 기둥 흔적과 기와편, 전돌, 초석 등은 바로 이곳에 능묘상 건축인 향당이 존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본다.


“(장군총의 경우) 한 변의 길이가 31m, 높이 13m 되는 피라미드 위에 장엄하게 보이려고 난간만을 세웠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요. 또한 숱하게 확인된 전돌과 기와편들이 단지 빗물방지용으로 덮은 흔적이라고 하는 것도 어색합니다. 또한 기와편을 보면 상이(上二), 상(上), 십(十) 같은 숫자와 기호들이 적혀 있는데 단지 난간만 둘렀다는 것은 이상하지.”


이 교수는 우메하라 스에지(梅源末治)의 실측도와 평남 순천군 용봉리에 있는 랴오둥성 총벽화, 평남 강서면 약수리 고분벽화에 나온 성곽도 등 각종 자료를 분석, 장군총 향당의 복원도를 만들었다. 이런 향당은 백제 석촌동 고분과 가락동 고분, 발해의 도읍 상경용천부가 있는 산링둔(三靈屯)고분에서도 그 흔적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우·중산국(?~BC 296년)은 은(상)(BC 1600~BC 1046년)으로부터 물려받은 향당제도를 고구려(BC 37~AD 668)·백제(BC 18~AD 660년)→발해(AD 698~926년)로 이어준 발해문명의 전달자 몫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선우·중산국은 이처럼 북방 오랑캐인 백적(白狄)의 나라가 아니라 성씨가 바뀌고 식민지가 되는 등 끈질긴 강대국들의 침략 속에서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작지만 강한 동이(東夷)의 나라였다. 어떤가. 그 역사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온 오늘의 우리를 쏙 빼닮지 않았는가.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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