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2p1vk8e



창조리

삼국사기 인물열전


창조리는 4세기 고구려의 명재상으로 봉상왕이 백성들에 폭압을 가하자 봉상왕을 폐위시키고 미천왕을 즉위시키는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다.



주요정보

대표관직 : 남부 대사자(南部大使者), 국상(國相), 대주부(大主簿)


고구려의 국상


봉상왕의 폐위를 도모하고 을불(乙弗 : 美川王)을 왕으로 세웠다


[생애 및 활동상] 294년(봉상왕 3) 남부 대사자(南部大使者)로 있다가 국상 상루(尙婁)가 죽자 뒤를 이어 국상이 되고, 이어 대주부(大主簿)에 올랐다. 296년 전연(前燕)의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하자 왕에게 북부(北部)의 대형(大兄) 고노자(高奴子)를 신성 태수(新城太守)를로 추천하여 격퇴케 하였다. 300년(봉상왕 9) 흉년이 들었는데 봉상왕은 장정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였으며, 숙부 달가(達賈)와 아우 돌고(咄固)를 죽여 왕족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봉상왕을 폐위시키고 을불(乙弗 : 美川王)을 왕으로 세웠다.



열전내용


창조리(倉助利)는 고구려 사람인데, 봉상왕(烽上王) 때 국상(國相)이 되었다. 당시에 모용외(慕容廆)가 고구려 변경의 우환거리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였다.

“모용씨의 군사가 강성하여 자주 우리 영토를 침범하니 어찌 해야겠는가?”


창조리가 대답하였다.

“북부(北部)의 대형(大兄) 고노자(高奴子)가 어질고도 용맹하니, 대왕께서 모용씨의 침구해오는 것을 막고 백성을 평안히 하고자 하신다면 이 고노자가 아니고서는 쓸만한 이가 없을 것입니다.”


왕이 고노자를 신성태수(新城太守)로 삼자 모용외가 다시 오지 않았다.


9년(300) 가을 8월에 왕이 나라 안의 15세 이상 되는 장정들을 징발해 궁실을 수리하였다.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는데다 부역에 시달리게 되니, 이로 말미암아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창조리가 왕에게 간하여 말하였다.


“하늘의 재앙이 거듭되고 올해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백성들이 어찌 할 바를 몰라 젊은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떠돌고 늙은이와 어린이들은 구덩이와 도랑에 뒹굴고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염려하여 몹시 조심하고 스스로 몸가짐을 살펴 반성해야 할 때이거늘, 대왕께서는 일찍이 한 번도 이를 생각지 않으시고 굶주린 백성들을 내몰아 토목공사의 부역에 시달리게 하시니, 백성의 부모가 되신 본 뜻에 크게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가까운 이웃에 억센 적이 있는 터에, 그들이 만약 우리가 피폐한 틈을 타서 쳐들어온다면 사직과 백성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이 점을 깊이 헤아려 주소서.”


왕이 듣고 노여움을 품어 말하였다.

“임금이란 백성이 우러러보는 바이므로 궁실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지 않으면 위엄과 무게를 나타내 보일 방법이 없는 것이다. 지금 국상은 아마 과인을 비방해 백성들의 칭송을 구하려는 것이로다!”


“임금이 백성을 보살피지 않으면 어질지 못한 것이고, 그런데도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는다면 충성이 아닙니다. 제가 이미 분에 넘치는 국상의 자리를 채우고 있는 이상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어서이지, 어찌 감히 칭송을 구해서이겠나이까?


왕이 웃으며 말하였다.

“국상은 백성을 위해 죽고 싶은가? 뒤에 다시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창조리는 왕이 허물을 고치지 않을 것을 알고 물러나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왕을 폐위시켰다. 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 원천자료 : 삼국사기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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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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