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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靺鞨)

2000년 한규철


6∼7세기경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북부 지역에 거주했던 종족.



개설


대체로 흑수말갈(黑水靺鞨)로 불리는 헤이룽강(黑龍江) 중·하류에 사는 주민들이 그 대표적인 종족이다. 그러나 말갈이란 중국 동북방의 몇 개 이민족에 대한 총칭이자, 고구려의 변방주민들에 대한 낮춤말〔卑稱〕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따라서 말갈 안에는 예맥계(濊貊系) 내지 부여·고구려·옥저계의 속말말갈(粟末靺鞨)과 백산말갈(白山靺鞨) 등도 포함된다. 말갈의 조상으로 알려진 종족은 진(秦) 이전의 숙신(肅愼)과 한대(漢代)의 읍루(挹婁), 그리고 후위대(後魏代)의 물길(勿吉)로 불리는 주민들이다.



내용


1. 범위와 영역


『수서(隋書)』에는 백산부(白山部)·속말부(粟末部)·백돌부(伯咄部)·안거골부(安車骨部)·불녈부(拂涅部)·호실부(號室部)·흑수부(黑水部)라는 7부의 말갈이 있었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라 그들의 주거 범위를 짐작해 보면, 속말부는 쑹화강(松花江) 상류지역, 백돌부는 지린성(吉林省)부여현(扶餘縣) 일대, 안거골부는 아십하(阿什河) 유역, 불녈부는 무단강(牡丹江) 유역과 닝안현(寧安縣) 일대, 호실부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이란현(依蘭縣)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백산부는 쑹화강 발원처인 백두산 근방과 간도(間島)로 불리는 옌지(延吉)·훈춘(琿春)을 중심으로 한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의 광대한 지역, 흑수부는 쑹화강과 헤이룽강의 합류 지점과 헤이룽강 중하류의 광대한 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2. 고구려·발해와의 관계


수·당대 이후에는 7말갈 이외에 월희(越喜)나 철리(鐵利)와 같은 말갈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말갈 부락 간에 일단의 세력개편이 이루어지면서 나타난 결과물로 짐작된다.


고구려 당시 이들은 대부분 고구려에 복속되어 신라를 공격하거나 당과의 전쟁에도 동원되었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는 고구려부흥운동에 참가했으며, 신라의 9서당(九誓幢)에서는 고구려인의 황금서당(黃金誓幢)과 함께 흑금서당(黑衿誓幢)의 한 구성원이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말갈을 고구려의 피지배 주민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당나라를 도운 적도 있어, 고구려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다기보다는 간접 지배를 받았다고 이해되고 있다.


말갈은 발해국에서까지 그 존재가 논란이 되고 있다. 즉, 말갈은 발해 지배층인 고구려유민과 대비되어 다수의 피지배 주민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가 하면, 건국자 대조영이 속말말갈인으로 간주되어 발해국이 말갈족에 의해 건국된 중세왕조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대조영은 쑹화강〔粟末水〕 출신의 고구려 장수였으며, 흑수말갈 지역을 제외한 다수의 주민들은 고구려유민이었다. 당나라는 한때 발해를 ‘(발해)말갈’이라 낮추다가, 양국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발해’라고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이렇듯 말갈은 당나라와 신라 등에서 동북방 및 북방의 미개 부락에 대한 통칭이기도 하였다. 발해 멸망 후는 발해유민과 흑수말갈을 통칭해 ‘여진(女眞)’이라 하였다. 말갈의 실상은 아직껏 명확하지 않다. 그들의 종족계통 문제라든가, 고구려·발해 왕실과의 관련성들이 쟁점으로 남아 있다.



3.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말갈의 실체


말갈의 등장은 『북제서(北齊書)』 무성제(武成帝) 하청(河淸) 2년(563)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 원년(서기전 37)부터 말갈을 기록하고 있어 『북제서』와는 차이가 있다. 이는 신라에서 보는 말갈에 대한 인식이 중국과는 달랐다는 증거다.


『삼국사기』의 말갈 기록이 갖는 특징은 북쪽에 위치한 발해를 말갈의 국가로 인식한 신라인의 관념이 반영되었다는 것과, 단순히 중국 정사의 말갈 호칭을 차용했다는 점이다.


말갈 기록이 갖는 이러한 문제로 인해, 조선 후기 정약용(丁若鏞)은 말갈 중에는 거짓말갈〔僞靺鞨〕이 있었다고 이해하고, 6세기 이전에 나오는 말갈은 불내예(不耐濊)의 잘못이라고 주장하였다.


말갈에 대한 다른 견해는 낙랑과 관련된 말갈을 예라 하기도 하며, 예맥(동예)을 잘못 지칭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혹은 정약용의 견해를 보강하여 위말갈이란 예로부터 한반도 동해안 일대에 위치하고 있던 동예의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전제하고, 이를 통해 동예사에 대한 복원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말갈의 활동지역이 보이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마한 동쪽에서 백제에 밀려나 남하하는 도중에 신라와 접촉한 사실의 기록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이 밖에도 말갈과 신라가 주로 충돌하던 니하(泥河) 등의 지명 분석을 참고하여 진흥왕의 한강유역 10군 점령사건 이후 북방의 돌궐과 대치하고 있었던 고구려의 말갈동원 사실을 소급하여 정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초기기록에 나오는 말갈관계 기사들은 과거 북쪽의 ‘적대세력=동예=말갈’로 인식하여 원사료에 ‘예맥’으로 쓰여 있던 것을 통일신라시대의 관념에 맞추어 말갈로 전면 개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는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보이는 말갈을 맥계말갈(貊系靺鞨), 신라본기에 보이는 말갈을 예계말갈(濊系靺鞨), 그리고 이들의 문화기반이 해체된 이후 새롭게 고구려에 의해 이주된 아말갈(亞靺鞨)로 보는 견해도 있다.




참고문헌


북제서(北齊書)

위서(魏書)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삼국사기(三國史記)

해동역사속(海東繹史續)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한국고대사와 말갈 (문안식, 혜안, 2003)

「발해국(渤海國)의 주민구성(住民構成)」(한규철,『한국사학보(韓國史學報)』창간호,1996)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상대(上代) 백제관계기사(百濟關係記事)의 검토(檢討)와 그 기년(紀年)」(선석열,『신라말(新羅末) 고려초(高麗初)의 정치(政治)·사회(社會) 변동(變動)』,신서원,1996)

『삼국사기(三國史記)』초기기록(初期記錄)에 보이는 “낙랑(樂浪)”의 실체·진한연맹체의 공간적 범위와 관련하여·」(강종훈,『삼한(三韓)의 사회(社會)와 문화(文化)』,신서원,1995)

「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의 말갈(靺鞨) 연구(硏究)」(한규철,『부산사학(釜山史學)』14·15합,1988)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이는 말갈(靺鞨)의 군사활동」(이강래,『영토문제연구(領土問題硏究』2,1985)

「말갈(靺鞨)의 종족계통(種族系統)에 관한 시론(試論)」(권오중,『진단학보(震檀學報)』49,1980)

「삼국사기위말갈고(三國史記僞靺鞨考)」(유원재,『사학연구(史學硏究)』29,1979)

渤海國民の前身 (鳥山喜一, 原書房, 1975)

「靺鞨史硏究に關する諸問題」(小川裕人,『東洋史硏究』2·5,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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