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7251649515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6) 1만년전의 세계 제주 고산리(下)

제주 고산리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입력 : 2008.07.25 16:49 


1만년전 땅을 밟고 내려와 온난화의 바다에 갇히다

박용안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린 최종 빙하기의 해안선과 강줄기. 중국 대륙과 한반도가 육지로 연결되었음을 보여준다.


1만1000~1만년 전 제주로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후기 구석기 최말기(세형돌날문화)~신석기 여명기(고토기문화)를 산 경계인들이었다. 출발지는? 고산리 신석기 유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강창화(제주문화예술재단)는 지금의 아무르 강 유역이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식물성 고토기의 모양이 아무르강 유역의 그것과 매우 흡사한 점을 꼽는다. 그들은 어떻게 이 머나먼 제주 땅까지 왔을까.


■ 육지였던 황해


“일단은 1만년 전의 기후나 지형을 한 번 살펴봐야겠지.”(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예, 그런 의미에서 당대의 기후와 해수면의 변화를 연구해봤습니다.”(강창화)


결론적으로 말해 1만년 전 이전엔 황해는 바다가 아니라 표고 20~30m 정도 되는 완만한 평원지대였으며, 랴오둥(遼東) 반도에서 흘러오는 여러 개의 강줄기가 주변 대지를 아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이 평원이나 혹은 강줄기를 따라 남으로 향해 제주도에 닿아 정착했다는 게 강창화의 결론이다.


“지금으로부터 2만~1만8000년 전이 마지막 빙하기의 최전성기였습니다. 서해안의 해수면은 지금보다 150m 아래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즉 지금의 중국 동부해안과 서해안이 하나의 육지, 즉 황토층이었다는 것입니다.”(강창화)


“어디 황해뿐인가. 베링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시베리아 최동단 추코카(Chukotka) 반도와 알래스카의 최서단 스워드 반도가 서로 연육되었다잖아. 인류가 아메리카로 건너간 이곳을 베링육교라 하지.”(조 관장)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해수면은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한다.


“고산리에 정착한 사람들은 육지였던 황해가 해수면 상승으로 물이 급속도로 불어나는 과정에서 막차를 탄 셈입니다.”(강창화)


“1만1000~1만년 전 사이, 즉 1000년 동안 해수면이 급속도로 상승했다는데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었을까요?”(기자)


“수렵채집생활을 했던 구석기인들은 사냥감을 찾아 하루에 최고 50㎞씩 이동했다는 분석도 있기는 해요.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는 얘기죠.”(조 관장)


“급속도로 해수면이 증가했다지만 1000년이라는 세월이잖아요. 하루 아침에 물이 불어나고 그러는 것은 아니니까,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물이 서서히 불어났을 겁니다.”(강창화)


■ 지구온난화가 낳은 승자와 패자


제주 고산리에서 확인된 식물성 고토기(사진 오른쪽). 아무르강 유역의 고토기(왼쪽)와 유사하다. 오른쪽 지도는 박용안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린 최종 빙하기의 해안선과 강줄기. 중국 대륙과 한반도가 육지로 연결되었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꿈과 희망을 찾아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화산이 빚어낸 빼어난 절경의 제주 땅 고산리에 둥지를 튼다. 식물성 섬유질 토기와 세석기 같은 당시로서는 첨단도구를 사용하면서….


그러나 지구 온난화와, 그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제주땅은 외딴 섬으로 고립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환경변화로 인해 고산리 사람들의 삶도 정체되고 만다. 이윽고 2000여년이 지난 BC 6000년 쯤부터 섬이 된 제주도에는 혁명적인 변화가 생긴다.


한반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땅을 밟기 시작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융기문 토기(덧띠무늬)와 지(之)자문 토기를 쓰는 사람들이며, 발해연안을 중심으로 문명을 일구기 시작한 동이족의 후예였다.


“토기에 융기문, 빗살무늬 문양을 넣을 줄 안다는 것은 문화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죠. 토기의 표면을 화폭 삼아 다양한 무늬를 덧대거나 새기거나 그리지요.”(조 관장)


새로운 이주자가 도착하자 고산리 문화는 사라지고 만다. 이른바 고산리식 토기와 석기가 자취를 감추어 버리는 것이다. 기자가 보기엔 지구온난화의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그렇죠. 지구온난화의 산물이라 해석해도 되겠죠. 아직도 남는 수수께끼는 있어요. 고산리 사람들과 융기문 토기를 쓴 사람들은 과연 같은 조상을 둔 사람들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종족인지….”(강창화)


여하튼 절해고도가 된 제주땅을 차지한 융기문 토기인들은 왕성한 생명력과 활동력으로 제주땅을 풍미한다.


“그때부터 제주도는 한반도 출신 사람들의 문화가 이어집니다. 중산간지역에 폭넓게 발견되는 융기문 토기문화가 그 예입니다.”(강창화)


이후 한반도로부터 다양한 문화가 파상적으로 밀려들어온다.


지난 6월 말이었다. 조유전 관장과 기자는 제주 삼양동 유적(사적 416호)을 찾았다. 230여기 집자리가 확인됐고, 이른바 송국리형 주거지, 즉 뭍의 문화가 성행했음을 증거하는 마을유적이다. 부여 송국리에서 처음 확인되어 그 이름을 얻은 송국리형 주거지는 원형집자리 내부 중앙에 타원형의 구멍을 파고 기둥 두 개를 세우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주거형태이다. 강창화가 들려주는 여담 하나.


제주 무릉리에 복원된 송국리형 집자리. 제주의 거센 비바람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하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제공>


“원형 집자리가 얼마나 튼튼한지 예를 하나 들까요. 제주의 비바람은 유명하잖아요. 몇년 전 서귀포 월드컵경기장 지붕까지 날릴 정도였는데…. 저희 재단(제주문화예술재단)이 무릉리 폐교 운동장에다 송국리형 집자리를 복원했는데, 월드컵경기장 지붕을 날린 비바람이 불어닥쳤을 때도 이 복원된 집자리는 끄떡없었습니다.”


2000년 전 기법대로 축조한 집자리는 끄떡없고 21세기 최첨단 시설물은 바람에 날아가고….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각설하고 제주의 송국리형 주거지는 BC 3세기를 상한으로 해서 기원전후를 중심연대로 갖고 있다. 그런데 삼양동 대형집자리에서는 옥환(玉環), 청동칼 조각, 유리환옥 등 중국 및 한반도산의 흔적이 보인다. 옥은 두말할 것 없는 발해연안 등에서 확인되는 동이문화의 원형이다. 또한 화폐도 엿보인다. 제주 산지항과 금성리 패총유적의 예를 보면 오수전(五銖錢·BC 118년부터 주조된 중국돈)과 화천(貨泉)·화포(貨布·기원 직후에 주조된 중국 돈) 등이 확인되었다.


이제 역사로 되돌아 가보자.


■ 탐라시대의 개막


“그럼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등장하는 ‘주호(州胡)’시대와 연결될 수 있을까요?”


삼양동 유적과 관련, 이청규 영남대 교수에게 물었다.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진수(陳壽·233~297년)가 삼국지를 쓴 것이 AD 3세기잖아요. 삼국지에 쓰여진 내용은 저자인 진수보다 앞선 시기의 것일 가능성이 많으니까 삼양동 유적이 주호시대와 얼추 맞을 수도 있겠네요.”(이청규 교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자.


“ ‘주호’가 있는데, ‘마한’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이다.(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중(韓中)’과 교역한다.”


제주도에는 BC 200~AD 200년 사이에 한반도 남부, 즉 해남 군곡리와 사천 늑도에서 확인되는 덧띠무늬와 마한계 토기들이 엿보인다. 이는 마한과의 교역상을 입증해주는 자료이다. 삼국사기에는 AD 5세기 말에 탐라국(耽羅國)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문주왕 2년(476년) 탐라국이 방물을 바쳤다. 왕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恩率)로 임명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조)


탐라 사신이 받은 은솔 관직은 백제 16관등의 하나이며, 좌평(佐平)·달솔(達率)에 이어 세번째인 고위직이다.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지요. 백제의 위세가 당대 대단했으니 탐라가 백제의 조공국을 자청했다는 뜻도 되고…. 또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탐라가 조공을 자청하니 백제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었겠지요. 제3품 고위직을 내줄 정도로….”(조 관장)


백제와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보이는 사료는 동성왕 20년(498년)의 삼국사기 기록이다.


“(동성)왕이 탐라가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자 친히 치고자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니 탐라가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하였다.”(백제본기 동성왕조)


동성왕이 군사를 이끌고 도착했다는 무진주는 오늘날의 광주 일대다. 이 또한 의미심장한 뜻을 안고 있는 기록이다. 즉 백제왕이 군사를 이끌고 광주에 이르렀다는 것은 백제의 영역이 확고하게 광주, 아니 전라도 남부까지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동시에 탐라가 문주왕 이래로 시세에 따라 조공을 잇고 끊고를 거듭하는, 이른바 밀고당기는 외교를 펼쳤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국(백제)과 소국(탐라)의 관계였던 셈이죠.”(이청규 교수)


“탐라가 백제의 속국은 아니었던가요?”(기자)


“삼국사기 어디에도 탐라가 백제의 속국이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아요.”(이 교수)


“그렇지요. 탐라국이 동성왕에 사죄했다는 것이 바로 속국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지요. 독립국의 위상을 갖고 있으면서 조공을 바치는 사이, 뭐 그런 정도가 아니었을까요?”(조관장)


이는 백제의 멸망(660년) 직후를 기록한 당나라 역사서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 소국의 생존전략


“백제 멸망 후 (당나라 장수) 유인궤는 신라·백제·탐라·왜 등 4개국 사신을 거느리고 당으로 건너가~제사를 지냈다.”(당회요·唐會要)



이근우 부경대 교수는 이런 사료를 토대로 “당나라는 탐라의 사신을 초청할 정도로 독립된 정치체로 간주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 탐라는 백제멸망 후 2년 만인 신라 문무왕 2년(662년) 신라에 복속된다.


“탐라 국주(國主)인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항복했다. 탐라는 무덕(武德) 연간 이래 백제에 신속(臣屬)되었기에 좌평(佐平)의 이름을 삼았는데, 이제 우리(신라)의 속국이 되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무슨 말인고 하면 탐라는 무덕(당나라 고종의 연호) 연간(618~626년) 사이에 비로소 백제의 속국이 되었고, 탐라왕의 벼슬도 백제의 최고관등인 좌평을 받았는데, 백제멸망 후 2년 만에 신라에 항복했다는 소리다. 하지만 문무왕 19년(679년) 사신을 보내 탐라를 위무했으며, 애장왕 2년(801년) 탐라의 사신이 조공을 보냈다는 삼국사기 기사를 토대로 보자. 이것은 속국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기보다는 종주국과 조공국의 사이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를 보면 탐라는 이후 고려중기까지도 독립국의 위상을 유지하다가 숙종 10년(1105년) 고려의 군으로 편입됩니다. 1만년 전부터 시작된 제주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셈입니다.”(강창화)


“고산리 유적이 담고 있는 함의는 크네요. 제주역사가 한낱 변방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 제주는 화산이 낳은 자연유산으로만 알려질 수 없다는 것…. 또 하나 무엇보다 지구 온난화라는 극적인 환경변화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네요.”(조 관장)


조 관장의 말마따나 요즘의 지구온난화에 대비하려면 1만년 전 제주 고산리를 연구해보면 어떨까. 다만 1만년 전의 지구온난화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흐름이었다면, 요즘의 지구온난화는 사람이 뿌린 불행의 씨앗이라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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