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100601.22022200524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7> 초원의 황금, 한국을 깨우다

동아시아 유별난 玉 사랑… 황금보급 이집트보다 1000년 이상 늦어

근동지역 金 등장 기원전 3000년 이전

中은 기원전 15세기, 한반도 도입은 기원전 1세기대

동아시아 옥 선호는 풍부한 매장량과 다양한 약효 때문

흉노 金 문화 발흥, 中거쳐 한반도 유입

금 가공하기 쉬워 초원민족 장신구로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0-05-31 20:10:12 |  본지 22면


금은 가장 값진 금속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가 금본위주의 경제를 채택하면서 금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는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금속으로 중요성이 더 커졌다. 하지만 금이 경제통화의 기준이 된 데는 이 금속이 주는 아름다움과 희귀함에 매혹된 인류의 역사가 숨겨져있다. 한국도 삼국시대에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황금문화를 꽃피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황금을 좋아했을까, 또 황금 예술은 어디에서 왔을까.


■동아시아에선 늦게 발달한 황금문화


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낙랑시대의 황금대구(버클)


전 세계적으로 황금의 사용과 숭배는 근동 지역에서 기원전 3000년 이전에 등장했다. 이집트의 파피루스에서 금이 등장한 것은 기원전 2600년께니 그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 중국에서는 상나라 시기인 기원전 15세기가 되어서야 조금씩 황금이 나오기 시작하니, 이집트 등에 비하면 그렇게 일찍부터 인기 있었던 셈은 아니다. 한국으로 오면, 기원전 1세기대에 고조선이 망하고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황금이 쓰이기 시작한다. 일본의 경우는 그보다도 더 늦어서 야요이시대에 중국이 일왕에게 하사한 '한왜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 새겨진 인장을 제외한다면, 5세기 후반인 이나리야마고분에서 출토된 금이 입혀진 철검이 최초다.


세계 문명 중에서 동아시아가 유독 황금을 늦게 도입한 이유는 바로 옥에 있었다. 한국 중국을 포함하여 바이칼에 이르는 지역은 초기 신석기시대부터 옥을 선호했다. 특히나 중국사람들의 옥에 대한 사랑은 유명하다. 랴오닝(遼寧·요녕)성의 홍산문화가 중국 문명을 대표하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바로 옥으로 만든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랴오닝성 여러 도시의 상징물이 홍산문화의 옥이며, 중국의 유력한 은행 중 하나인 화하은행(華夏銀行)의 상징마크도 옥일 정도이다. 동아시아가 이렇게 옥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옥의 매장량이 풍부했던 데다, 옥이 주는 다양한 약효 때문이었다. 지금도 장판, 매트, 찜질방 등 다양한 기능성 용품에 옥이 널리 쓰이며 사랑받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옥은 비단 동아시아뿐 아니라 초원 지역의 여러 곳으로도 전파되었다. 중국 이외의 또 다른 유명한 옥의 산지는 바이칼 호수 근처였다. 바이칼의 옥은 기원전 15세기께부터 초원의 루트를 따라 서쪽으로 널리 퍼져갔다. 우랄산맥 근처에서 발달한 세이마-투르비노 문화는 전차·청동무기·금으로 유명했는데, 이 문화권의 무덤에서도 옥으로 만든 다양한 장신구들이 발견됐다. 바로 바이칼에서 전해진 옥이다. 세이마-투르비노 문화가 발달시킨 전차와 금은 동아시아 전역으로 파급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옥이 세이마-투르비노와 동아시아의 교류에서 중요한 특산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흉노의 황금유물이 한반도에서도 빛내다


초원 유목 계열인 스키타이 문화의 금제 그릇


중국에서 처음 등장하는 황금은 대부분 베이징과 간쑤(甘肅·감숙)성 등 중원의 북방지역이다. 바로 초원민족과 접경한 곳이다. 하지만 그 황금 유물들은 대부분 귀걸이 팔찌 등 소형의 장신구류다. 게다가 이들 황금유물은 거의 초원지역 양식이다. 기원전 15세기께 상나라에 전차와 청동무기가 전해지면서 황금도 함께 중국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나팔형으로 휘어진 귀걸이는 흑해 연안에서 비롯되어 시베리아에 전해진 기원전 18~15세기 안드로노보문화에서 발견되는 것과 똑같아서, 중국의 금제 유물이 초원지역에 유입된 결정적 증거다. 안드로노보문화의 금제 귀걸이는 보통 여자들이 썼으니, 최초의 국제결혼에 대한 증거라는 농담을 할법도 하다.


또, 진시황의 진나라에서는 기원전 8세기부터 금으로 손잡이를 감싸고 날은 강한 철로 만든 검이 유명했다. 화려한 금제 장식에 터키옥으로 상감한 이 유물은 중원의 청동기와는 다른 진나라 청동기의 정수로 꼽힌다. 진나라는 초원지역의 금과 함께 강력한 기마부대와 무기를 도입했으니, 금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욱일승천하는 왕권과 군사력의 상징이었다.


동아시아의 황금문화는 흉노가 발흥하면서 또 한번 변화를 겪는다. 상나라 때 금제 유물은 중국북방에서만 유행했지만, 흉노의 화려한 황금은 전 중국으로 확산되었으며 한반도로도 유입됐다. 흉노에게 엄청난 조공을 바쳤던 한나라에는 흉노에 바칠 황금을 만드는 공방이 있었다. 이와 함께 점차 중국 내 귀족들 사이에서 초원풍의 허리띠, 동물장식이 널리 유행했다.


그러는 와중에서 한반도에도 흉노풍의 황금유물이 유입되었다. 낙랑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평양 석암리 9호분의 용무늬 황금대구(버클)가 대표적인 예다. 1㎜도 안 되는 자잘한 알갱이를 누금해서 9마리의 용을 묘사한 이 유물은 한반도에 황금문화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재미있는 사실은 낙랑시대의 평양 석암리 출토 황금대구와 거의 똑같은 황금대구가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실크로드 도시국가와 랴오둥(遼東·요동)반도 다롄시의 같은 시기 무덤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중국 양쯔강 유역 초나라 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황금대구가 멀리 우랄산맥 근처 스키타이 고분에서 발견된 적도 있다. 초원풍격의 황금유물이 수천㎞ 이상 떨어진 지역에서 다수 발견된 점은 초원지역 황금이 비단 북방지역뿐 아니라 사방에 널리 유행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들은 왜 황금을 선택했을까


금을 입힌 낙랑의 유물.


한반도의 옛 사람들도 이때 초원의 황금에 반했고, 신라에 이르러 황금문화의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초원민족들 사이에서는 나무나 청동장식에 금박을 씌우는 등 비교적 소량의 금을 이용한 황금예술이 발달했다. 하지만 신라는 소규모 장식에 그치지 않고 왕관과 같이 대형의 금제품을 만들어 냈다. 중국 북방의 초원민족들도 금제 왕관을 썼지만, 그 예는 그렇게 많지 않다. 게다가 신라의 금관은 초원의 금관과 형태도 많이 다르고 묵직한 것이어서 그 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동하는 유목민족과 달리 신라는 정착국가를 이루었기 때문에 초원민족의 황금예술을 이어받아 자신들의 황금문화로 꽃피울 수 있었다.


금은 보기에 찬란할 뿐 아니라 가공하기에 매우 쉽다. 연성과 전성이 매우 강한 탓에 적은 양으로도 실처럼 길게 뽑거나 넓게 펼 수 있다. 물론 구하기 어려운 금속이지만, 적은 양으로도 화려한 장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사방을 이동하는 초원민족에게 금은 적은 양으로 여러 장식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귀금속으로 적당했다. 게다가 금은 상대적으로 가공하는 데 많은 시설이 필요하지 않다. 청동기나 철기 등의 금속을 주조하려면 용광로 거푸집 등의 시설과 인력, 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금은 소량을 망치로 두드리기만 하면 되니 사방을 이동하는 유목민족들도 쉽게 가공할 수 있었다. 초원민족들은 나무나 청동으로 만든 장식이나 마구에 얇은 금박을 입히는 방법으로 찬란한 황금문화를 꽃피웠다.


초원의 민족들은 어디에서 금을 얻었을까. 현재까지 그들이 채굴했던 금광은 발견된 적이 없다. 게다가 수십 m씩 파고 들어가야 하는 금광은 당시 사회 수준으로 볼 때 그렇게 효율적인 원료 구입방법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신 비교적 채취가 쉬운 사금으로 금을 얻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황금문화 중심지인 알타이를 답사하면서 최근까지도 사금을 채취한 흔적을 군데군데 찾아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는 특징


금은 시간이 지나도 거의 변하지 않기 때문에 고대 왕들은 종종 황금으로 자신을 감싸면 영생할 것으로 기대한 모양이다. 초원문화인 사키문화에 속하는 카자흐스탄 이식고분에서는 몸 전체를 황금으로 만든 옷으로 감싼 황금인간이 발견된 적이 있다. 또 허베이(河北)성 만성에서 출토된 한나라 유승(劉勝)과 부인의 무덤에서는 몸 전체를 금실로 꿰맨 옥으로 감싼 금루옥의(金縷玉衣)가 발견됐다.


불멸을 상징하는 옥과 금으로 수의를 만드는 이 방법은 당시에 영생하는 비결로 생각됐다. 유승은 수백명 장인을 동원해서 엄청난 돈을 들여 수의를 만들고 영생을 기대하며 눈을 감았을 것이다. 부질없는 기대 덕에 한나라 귀족들의 무덤은 도굴꾼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유승의 묘는 운좋게 도굴을 피했지만 발굴 당시에 인골은 간데없이 수의만 남아있었고, 문화혁명 때는 미신에 사로잡혀 민중을 착취한 고대의 어리석은 귀족의 예로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미국 서부의 골드러시, 유럽 중세의 연금술, 잉카의 멸망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금은 영생과 부의 상징이자 세계사 변동과 교류의 중심이 되었던 금속이다. 그리고 금은 고대 초원과 한반도를 이어준 가교였다.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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