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91124.22020200746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0> 탈레반도 못 훔친 아프가니스탄 금관, 그리고 신라

초원 황금문화, 西로는 아프간 東에선 신라가 꽃피워

흉노에 쫓겨 남하한 초원민족들 곳곳에 남긴 초원계 유물 영향

박트리아계와 접목돼 틸랴 테페 유물…신라와 아프간의 금관 기원 일맥상통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09-11-23 20:19:38 |  본지 20면


아프가니스탄은 실크로드의 중간 경유지이며 불교가 아시아로 전해지는 중간루트이기도 했다. 그래서 19세기부터 전세계 많은 학자들은 동서교차로인 아프가니스탄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그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해 19세기 이후 영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의 간섭과 내전까지 겹친 이 나라는 시대의 화약고가 되었고 비극을 잉태했다. 지금은 전쟁과 가난의 상징으로 익숙한 이 나라에서 약 30년 전 신라 금관과 너무나도 유사한 금관이 발견돼 세계 고고학계를 경탄에 빠뜨린 적이 있다. 과연 그 금관은 누가 만들었으며, 어떻게 신라의 금관으로 이어질까?


■황금의 언덕, 틸랴 테페


틸랴 테페의 황금관(위)과 황금관을 펼쳐놓은 모습. 국내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신라 유적과 매우 닮았다.


외지 사람들은 부산역에 내리면 산자락을 따라 올라가는 집들에 감탄하곤 한다. 그 모습은 마치 중앙아시아의 테페와 닮았다. 중앙아시아의 건조지대에는 주변에 나무조차 많지 않아 집이건 무덤이건 모두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서 올린다. 세월이 지나 흙벽돌집이 무너지고 다시 쌓기를 수천 년 반복하다보면 테페라고 하는 거대한 언덕이 된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 트로이 유적, 여리고 등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근동지역 유적은 테페로 이루어진 것이다. 2000년 전의 금관도 황금의 언덕이라는 뜻인 틸랴 테페에서 발굴됐다.


1978년 11월 그리스 출신 러시아 고고학자 빅토르 사리아니디는 아프가니스탄의 북쪽 조그마한 언덕인 틸랴 테페를 발굴 중이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내전이 터져 사방이 시끄러웠지만 개의치 않고 발굴에만 집중했다. 점점 날씨가 추워져 발굴을 마무리지을 무렵 성터의 서쪽에서 황금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했다. 마을유적 이전에 만들어진 무덤이었다. 7개의 무덤 중에 6개가 발굴되었고, 모든 무덤은 황금으로 가득했다. 가운데의 남성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에 여성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6호분에서는 신라의 왕관과 너무나 흡사한 금관이 출토됐다. 추위로 곱은 손가락을 간신히 펴며 유물들을 차근차근히 수습한 노력으로 2000년 전의 찬란한 황금문화는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전쟁의 포화 속에 사라진 금관들


요녕성에서 발굴된 모용선비의 소요 장식. 신라의 금제 장식과 어딘지 비슷하다.


틸랴 테페가 발굴될 즈음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갔고, 소련 붕괴후 1992~1995년의 내전 끝에 탈레반이 통치하게 되었다. 회교 원리주의를 철저히 지킨 탈레반은 배미얀 석굴 등 불교 관련 유적들을 파괴했고, 박물관은 폐쇄시키는 등 20세기 최악의 문화재 파괴 사태를 일으켰다. 거기에 미군의 폭격과 현지인의 절도가 더해져 박물관의 유물은 제대로 된 통계도 없이 심각하게 파손됐다. 가장 값이 나가는 틸랴 테페의 황금유물들도 그 와중에 사라졌다. 황금으로 녹여져 군비로 충당됐다는 설, 폭격으로 사라졌다는 설 등이 횡행했다. 카불에 있는 아프가니스탄 박물관도 공식적으로 이 유물은 분실됐다고 밝혔다.


다행히도 2000년에 틸랴 테페의 유물은 무사하다는 소문이 카불박물관 측에서 흘러나왔다. 이 황금유물을 극비로 은행의 수장고에 숨겨놓고는 분실했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 하지만 2001년부터 대대적인 문화재 파괴를 자행한 탈레반은 박물관의 유물상자들을 다 파헤쳐서 유물과 유물카드를 뒤섞어 놓았다. 결국 몇 장의 사진만 남긴 채 틸랴 테페의 유물은 세상에서 소멸되는 듯했다.


그러던 2003년, 카불중앙은행 창고에서 숨겨졌던 몇 개의 유물상자가 개봉됐다. 어떤 유물인지는 아무도 몰랐고, 유물카드조차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프가니스탄 문화청과 유네스코 관계자들은 25년 전 틸랴 테페와 여러 유적을 조사했던 사리아니디를 불렀다.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년의 고고학자는 개봉된 유물을 한참 보더니 조용히 탄식하며 외쳤다. "이것은 금관이 나온 틸랴 테페 6호분이외다." 배석한 사람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보자 그는 금관 장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철사는 금관에서 떨어져나간 장식을 다시 잇기 위해서 내가 발굴 당시 직접 만들어서 붙인 것이오. 허허.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이로써 틸랴 테페 6호분의 유물은 세상 속으로 부활했고, 여러 경로를 거쳐서 2009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공개되었다.


■금관의 주인공들은 초원에서 왔다


금관을 쓴 고분의 그림. 초원에서 온 여성으로 추정하고 있다(왼쪽). 틸랴 테페 유적에서 나온 청동검. 칼자루 끝에 곰이 새겨져 있다.


틸랴 테페에 금관을 남긴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의 뒤에는 출퇴근길의 지하철처럼 복잡한 중앙아시아의 역사가 얽혀 있다. 틸랴 테페는 서기 1세기 때 만들어졌는데, 그 이전에는 박트리아(大夏)국이 있었고, 이후에는 한국과 중국에 간다라미술과 불교를 전파한 나라로 유명한 귀상(貴霜)이라고도 하는 쿠샨왕조가 있다. 틸랴 테페의 무덤이 만들어질 무렵 초원지대의 흉노에게 쫓겨 나라를 세운 대월지국이 있었다. 당시 초원지대는 흉노와 그 일파들로 소용돌이가 쳤고 많은 초원민족들이 남하했다. 그렇게 남하하는 와중에 곳곳에 초원계의 유물을 남겼다. 중국 윈난성과 쓰촨성에도 석채산문화라는 초원계문화가 남아 있고, 한국에도 당시 초원계 청동기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틸랴 테페 6개의 무덤에서 나온 황금은 모두 하나의 공방에서 만든 것이다. 또 그 안에 그리스-박트리아계의 유물도 많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초원지역에서 남하한 초원계의 부족 중 최고 지도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황금을 만드는 장인들은 초원의 취향과 박트리아계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예술품을 창조했던 것 같다. 아마도 황금 왕관은 시베리아 일대에서 널리 유행하던 장식용 금관의 전통인 듯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정작 금관을 쓴 사람은 가운데 무덤의 주인인 남자가 아니라 주변에서 발견된 여성들 무덤의 주인공, 즉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과연 이 여성은 왕비였을까 아니면 사제였을까. 아직 정답은 없다. 틸랴 테페에서는 아직 1개의 무덤은 미발굴인 채로 남아 있으니, 혹시 이 무덤이 실마리를 제공할지도 모르겠다.


■신라의 금관과 아프간 금관은 '친척'


틸랴 테페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한국 신라 금관의 조형으로 지목되었다. 한 눈에 봐도 그 형태는 신라금관과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나무처럼 뻗은 금관대, 영락을 단 모습 등 얼핏보면 신라금관의 하나라고 우겨도 믿을만하다. 하지만 시기와 세부적인 차이도 적지 않다. 틸랴 테페는 서기 1세기때 만들어졌고, 신라는 4세기때다. 과연 둘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당시 초원의 거대한 제국 흉노에서는 황금제 머리장식이 유행했고, 시베리아의 여러 민족들도 머리에 관을 쓰는 풍습이 있었다. 또 서기 3세기께 요녕성 일대에 살았던 모용선비에게서도 비슷한 황금 머리장식이 발견된다. 모용선비의 머리장식은 중국의 옛 기록에는 소요(逍遙)라고 한다. 머리에 화려한 금관장식을 쓰고 가볍게 걷는다고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서기 1세기께 흉노는 한나라의 추격을 뿌리치며 서쪽 중앙아시아로 널리 퍼져나갔다. 또 그 일파는 동쪽으로도 영향을 미쳐서 모용선비와 낙랑의 황금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아직은 중간 자료가 부족하지만, 신라와 아프가니스탄은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해도 바로 흉노에서 발원한 찬란한 초원의 황금문화의 동서 끝인 셈이다.


다시 아프가니스탄 파병 문제로 전국이 시끄러워지고 있다. 평화, 재건, 의료사업 등 아무리 많은 명분을 내세워도 우리의 젊은 생명을 전쟁의 현장으로 내보내는 것이니 유쾌할 수는 없다. 그래도 이번에는 문화사업 위주로 파병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양한 고대유적의 조사사업과 연계시키는 것은 어떨까. 지금도 제2, 제3의 틸랴 테페 유적은 전쟁과 파괴의 와중에 사라지고 있다. 한국의 고고학 및 문화재 보존 기술은 세계적으로도 우수하다고 정평이 나있다. 이왕 문화사업을 한다면 아프가니스탄의 문화재를 보존하는 노력도 같이 하면 얼마나 좋을까. 세계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물론이요, 신라와 가야의 수많은 북방계 황금유물의 실마리를 푸는 결정적인 근거를 찾을지도 모른다. 우리 손으로 또 다른 금관을 찾아 한국과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문화재에 기여하는 날을 기대해본다.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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