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100126.22022194902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9>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알타이에서 왔는가?

500여년·수천킬로미터 시공간을 뛰어넘은 쌍둥이 무덤

경주 적석목곽분 서기 4세기께 등장, 200여년 존속하다 홀연히 사라져

기원전 7~2세기 파지릭문화의 것과 유일하게 비슷해

북방기원설-자생설 학계내 이견 분분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0-01-25 19:54:27 |  본지 22면


파지릭문화의 쉬베고분. 적석목곽분이다.


 인간의 삶에서 무덤은 참 특별하다. 태어남이 소중한 사람을 맞이하는 것이라면 죽음은 소중한 사람을 다른 세계로 보내는 것인지라 유난히 금기(taboo)도 많고 관습도 까다롭다. 그래서 무덤은 고고학에서 고대 주민의 풍습과 이동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다.


신라를 대표하는 경주의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은 일제시대 발굴된 이래 거의 100여 년 가깝게 우리나라 고고학과 고대사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왜냐하면 적석목곽분은 서기 4세기께 갑자기 등장해서 200여 년간 존속하다 홀연히 사라져버렸으며, 한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고구려 백제 가야의 고분과는 달리, 적석목곽분은 경주 일대에서만 발견된다. 당시 신라의 영역은 현재의 경상북도 및 경남 일대였지만 이 무덤은 경주 사람들만 썼던 셈이다. 적석목곽분을 처음 발굴한 일본학자들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에서 돌무지를 따오고 평양의 낙랑 지역 중국계 무덤이 결합된 것이라고 보았다. 모든 우리나라 고대문화를 중국에서 영향받은 것이라고 해석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남부 시베리아 알타이 지역의 파지릭고분군이 조사되면서 신라고분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설이 등장했다. 알타이의 파지릭고분은 신라의 적석목곽분을 빼다 박은 듯 비슷하기 때문이다. 무덤 주변에 돌돌림(호석·護石)을 돌리고 무덤 위에 두텁게 돌을 쌓았으며, 그 안에는 나무로 만든 무덤방을 만든 파지릭고분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신라의 고분과 흡사하다. 물론 자세히 보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유라시아를 통틀어도 이렇게 비슷한 고분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두 지역 다 황금을 좋아했으며 신라인들도 초원계 유물을 아주 선호했다. 과연 서기 4세기 경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적석목곽분, 그리고 알타이


파지릭고분에서 출토된 양탄자에 그려진 그림.


신라의 무덤은 땅을 파고 지하에 나무로 무덤방을 만들어 그 안에 시신과 각종 부장품을 넣는다. 그 위에는 돌을 쌓고, 마지막으로 그 위에 흙으로 거대한 봉분을 만들었다. 알타이 파지릭문화에서는 땅을 파고 그 안에 무덤방을 만든다. 그 위에 돌을 쌓는 것도 같지만, 더 이상 흙을 덮지는 않는다. 그래서 한 눈에 보아도 두 지역의 무덤은 많이 유사하다.


그렇지만 알타이 파지릭문화는 기원전 7~2세기대까지이며,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서기 4세기이다. 적어도 500년의 공백, 그리고 수 천 킬로미터의 지리적 거리가 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두 지역의 유사성이 바로 논쟁의 중심이다.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신라의 적석목곽분이 북방에서 왔다는 주장과 자생적으로 기원했다는 설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북방기원설의 문제는 알타이지역과 신라 사이의 엄청난 시간적, 공간적인 공백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반면에 자생설도 갑자기 등장한 적석목곽분을 설명할 수 없다. 지금까지 수 천기의 무덤들이 경주와 주변지역에서 발굴되었지만, 적석목곽분의 자생적인 기원을 밝혀줄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더욱이 적석목곽분 안에는 수많은 초원과 중앙아시아 계통의 유물들이 있다는 점도 문제다.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신라 적석목곽분의 기원을 두 가지 요소를 모두 놓고 생각해보자. 먼저 초원지역을 보면, 유라시아 초원에는 기원전 3세기에서 서기 1세기때까지 세계사의 중심에 섰던 초원유목국가 흉노가 있다. 알타이의 적석목곽분을 만들었던 파지릭문화도 흉노에 의해서 망했다. 흉노라는 제국은 거대한 문화의 용광로로 유라시아 전 지역에 초원계 문화를 퍼뜨렸으며, 또 정착농경민의 문화요소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흉노의 지배계층은 현재 몽골공화국에서 파지릭문화와 중국 한나라의 무덤을 모방한 대형고분을 건설했다. 노인울라 유적이 그 좋은 예다.


■고총고분의 시대


파지릭고분에서 나온 중국제 거울. 파지릭문화가 중국 등 동쪽 문명권과 교류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거대한 무덤을 만드는 흉노의 풍습은 주변지역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 예로 남부 시베리아 예니세이강 근처의 타쉬트익문화(기원전 1세기~서기 5세기)의 고분이 있다. 타쉬트익문화의 무덤은 무덤방을 나무로 만들고 거대한 봉분을 세운 것이다. 신라의 무덤은 지하로 땅을 파고 무덤을 만들었지만, 타쉬트익문화는 옆으로 무덤길을 낸 '횡혈식'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외에도 흉노의 영향을 받아 황금과 대형 고분을 만드는 풍습은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흉노가 서기 1세기말 중국에 의해 망하면서 그 일파들은 동으로 서로 흩어지면서 주변지역으로 확산됐다. 서기 4세기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야기한 훈족의 대이동이 그 좋은 예다. 전 유라시아적 관점에서 본다면 신라의 적석목곽분도 이러한 초원문화의 광범위한 파급과 맞물려 해석할 수 있다. 즉, 파지릭문화의 적석목곽분이 흉노에 유입되었고, 흉노에 의해 재창조된 거대한 고분을 만드는 풍습이 주변지역으로 확산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 흉노와 경주 고분 사이의 중국 북부가 미싱 링크(missing link·잃어버린 고리)로 남아 있다. 아직 3~4세기대 북부 중국 및 몽골지역에서는 거대한 고분이 발견된 바가 없다. 향후 자료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파지릭고분에서 나온 유물로 무덤을 복원한 모형.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신라인은 왜 초원의 풍습을 도입했을까. 신라와 달리 백제나 고구려에서는 초원계 유물이 거의 없다. 유독 신라인들이 초원계의 황금유물과 무덤을 좋아한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에는 북방에서 대량의 기마민족이 내려와 신라의 지배자를 교체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대량의 이주민이 내려온 증거는 전혀 없다. 현재로서는 대량의 주민 교체보다는 신라인의 자체적 역량에서 그 원인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서기 3세기부터 동아시아 각국은 고대국가를 형성하며 경쟁적으로 거대한 고분을 만들기 시작했다. 경주의 신라인들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거대한 고분은 일명 '고총고분(古塚古墳)'이라고도 한다. 지배계층은 거대한 고분 축성을 통해 지배력을 확고히 다지고 기층민들은 이런 국가사업에 동원됨으로써 강한 소속감을 가지게 된다. 고대 이집트가 피라미드를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주변의 고구려 백제 그리고 가야와는 달리 독자적인 고유의 고분을 만들고자 했던 신라인은 당시 강력한 유목국가의 무덤을 도입해 그들만의 고분문화를 재창조한 것은 아닐까. 서기 4~5세기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으로 간주했고, 실제로 고구려 군인이 신라를 도와주었다. 표면적으로는 속국이어도 신라는 자신들만의 고분문화를 강조하기 위해서 고구려가 아닌 초원지역의 고분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은 아닐까.


■지나친 기원 찾기는 이제 그만


지난 100여 년간 신라 고분의 기원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밝혀진 것은 거의 없다. 광활한 초원의 문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비슷한 유적이나 유물이 있으면 기원지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초원의 적석목곽분은 비단 알타이뿐 아니라 주변의 중국 신장성, 카자흐스탄 등에서도 발견되며 그 시기도 다양하다.


신라 적석목곽분의 형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당장은 돌아가는 듯 해도 차근차근히 광활한 초원지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선결되어야 한다. 좀 더 시야를 넓혀서 보자. 서기 3~5세기 유라시아 초원은 '대민족의 이동시대'였다. 유럽에서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있었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선비와 같은 흉노의 후예가 남쪽으로 내려와 국가를 이루던 시기였다. 신라 적석목곽분과 황금문화를 거대한 세계사적 흐름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또 초원계 유물이 나왔다고 해서 신라인의 자체적인 역량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무덤과 황금유물을 제외하면 나머지 유물은 신라인의 토착적인 문화가 유지되고 있으며, 대량의 주민들이 신라를 정복한 흔적도 전혀 없다. 즉, 신라인은 북방 초원계 문화를 주체적으로 적극 도입한 것이다. 신라가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주변의 다양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데에 있을 것이다.


최근 초원지역을 연구하는 러시아와 중국의 학자들이 신라의 고분에 주목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라 고분은 초원 문화가 퍼져나간 동쪽 종착지이기 때문이다. 신라와 초원지역의 관계를 푸는 것은 곧 세계사에서 고대 초원과 농경민족 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초원의 자료를 억지로 신라 고분에 끌어들이기보다는 신라의 고분을 넓은 유라시아적 관점에서 보려는 거시적 노력이 필요하다.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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