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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4> 진시황의 천하통일과 초원의 힘

변방의 `야만국` 진나라, 다문화 끌어안아 중원의 최강자로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0-05-10 19:45:03 |  본지 22면


- 기원전 7세기 진목공 재위 때 초원 다양한 문화 전파자 역할 한 서융족 복속 후 강국 기틀 다져

- 유목 수렵 교역, 각 민족 경제활동 장려와 통합 통해 경제적 기반 쌓고 통치 시스템 구축… 통일왕조 이룩


중국을 대표하는 인물인 진시황(기원전 259~210년). 오랜 세월, 그는 중국사에서 부정적인 폭군의 모습이었다. 분서갱유, 만리장성의 노역 등 역사는 그를 잔혹하게 백성을 괴롭히고 자신의 나라도 오래 못가 망하게 한 악한의 전형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중국은 문화혁명이 끝나고 1980년대가 되면서 진시황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바꾸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여 현재와 같은 거대한 중국의 기틀을 세운 영웅으로 추앙한다.


전통적으로 중국 역사가들이 진시황과 진 제국의 어두운 점을 강조한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펼친 강력한 전제정치 탓이었다. 진시황의 통일왕조는 각 제후국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도량형과 글자도 통일하여 '만인에 공평한' 법에 의한 통치를 내세웠다. 수 천년 역사에 걸쳐 자신들의 전통대로 나라를 다스려온 중국역사 속 여러 나라들이 이를 좋아할 리 없었다. 게다가 진나라는 서주(西周)시대 이래 오랑캐의 나라로 치부되며 중원의 여러 나라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오랑캐와 잡거하며 중원의 도덕을 이해하지 못하던 진나라, 어떻게 그들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을까.


■변방에 치우쳐 오랑캐와 잡거한 진나라


마가원 유적에서 출토된 마차.


진시황은 결코 갑자기 나온 영웅이 아니었다. 춘추시대 이래 중국 서북지역에서 초원지역과 접경하고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오던 진 제국이 그의 뒤에 있었으며, 진 제국의 성장에는 그들과 접경했던 초원의 민족들이 있었다.


춘추시대의 진나라가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9세기 진비자(秦非子)부터다. 그로부터 31대 손인 영정은 기원전 221년 진시황으로 등극했다. 처음 진나라가 역사에 등장한 이래 진시황의 진 제국 탄생까지 약 600년 동안 진나라 역사는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주나라를 도운 결과로 분봉받은 진나라는 지금의 산시(陝西)성에 도읍했지만, 그 서쪽에 살던 초원 유목민족인 서융(西戎)의 등쌀에 국력을 제대로 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가원의 서융 무덤에서 나온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청동그릇. 바닥에 변법을 통해 국력을 키운 재상 상앙을 뜻하는 '앙' 자가 새겨져 있다.


진나라는 기원전 7세기 대인 진목공(秦穆公·재위 기원전 659~621년) 때 서융의 세력을 제압하면서 비로소 나라로 기틀을 갖추었기 때문에, 진시황으로 대표되는 진나라의 발전은 진목공의 서융 정벌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문화는 고고학적 발굴로 속속 밝혀지고 있다. 중국 서쪽의 오랑캐들과 잡거했다는 역사기록을 뒷받침하듯이, 고고학적 발굴은 진나라의 문화가 중원지역과 달리 초원민족의 색채를 강하게 띠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그렇지만 진나라와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교류하며 초원의 기술과 문화를 전해준 서융의 실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진나라의 국력을 살찌운 새로운 기술과 무기를 전해준 초원의 문화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고고학이 밝힌 진나라 황금문화가 뜻하는 것


중국 간쑤성 장가천의 마가원 유적 발굴 장면. 이곳에서 춘추시대 진나라 문명에 대한 단서가 여럿 포착됐다.


2006년 7월 중국 간쑤(甘肅)성의 회족 자치주인 장가천(張家川)의 마가원에서는 3개의 대형 고분이 도굴되었다. 지난 몇 년간 중국은 빠르게 발전하는 경제와 맞물려 도굴범도 급증하고 있었기에, 이는 비일비재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도굴품을 확인한 고고학자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바로 초원지역의 색채가 강한 황금유물과 서아시아 계통의 유리제품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발굴대가 조직되어 2008년까지 도굴된 3기를 포함하여 모두 11개의 대형 무덤을 발굴했다. 그 결과는 2008년에 1차 발표된 바 있었다. 다시 최근인 2009년 10월에 나머지 발굴 결과도 공개되었다. 필자는 이 결과를 보는 순간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진나라와 초원 및 서방과의 관계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깊었기 때문이다. 마가원 무덤은 기원전 4~3세기대의 것으로 당시 서융은 이미 진나라에 복속된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 유물에는 초원지역 스키타이계 문화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 더욱이 고도의 세공기술로 만들어진 금제품과 유리제품은 이제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완전히 계통을 달리한 것이었다.


마가원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 유물들에는 직경 0.4~0.5㎜ 정도의 자잘한 황금구슬을 붙이는 누금세공기법이 쓰였다. 이 누금세공기법은 그 시기 이전까지의 중국 중원에서는 볼 수 없던 기술로, 지중해 지역에서 처음 개발되어 기원전 7세기 이탈리아에서 번성한 옛 나라 에트루리아가 고도로 발전시킨 기술이다.


이 금속기술은 이후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거쳐 시베리아의 황금유물로 이어졌으며, 한참을 지나서 신라의 황금유물에서도 사용된 기술이다. 특히 서부 시베리아의 스키타이시대 고분인 필리포프카(Filipovka)와 표트르 대제가 모은 시베리아 황금유물 컬렉션에도 이런 금 가공 기술은 흔히 보인다.


■시베리아 거쳐 중국에 들어온 금세공기술


마가원 유적 발굴 때 나온 초원계통의 금장식품들.


마가원 유적의 황금은 바로 누금세공기술이 초원을 거쳐 동아시아로 유입된 길목을 보여주는 셈이다. 즉, 원래 중앙아시아 토착의 유목민족에서 기원한 서융족은 진나라에 복속되면서 동서양 문명의 중간기지 역할을 했고 진나라, 나아가 중원 여러 나라에 초원의 여러 문화를 전달하는 중개자의 역할을 했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로써 신라의 황금기술 전파루트에 또 하나의 가능성이 제시된 셈이다.


진나라가 중국 서북의 변방에서 강력한 나라로 커가는 데에는 초원민족 서융의 역할이 컸다. 진나라는 자신들 자체가 '순수한' 한족이 아니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초원 민족들을 포섭하는 데 이용했다. 1974년 거연(居延)에서 발견된 죽간에는 '진호(秦胡)'라는 구절이 있다. '진'은 중국인이요, '호'는 오랑캐인데 둘을 같이 쓴 이 낱말은 진나라에 포섭된 초원민족들을 의미한다. 진나라는 서북쪽 변방이라는 중원의 멸시를 문화교류의 거점으로 발달하면서 극복했다.


또한 진나라가 상대적으로 농업에 불리한 자연환경이라는 점을 유목·수렵·교역 등 각 민족의 다양한 경제활동을 장려하면서 이를 통합하여 더 큰 경제적인 기반을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중원이 진나라를 멸시하는 사이, '변방'의 반야만인 진나라는 다문화를 포용하는 능력으로 진시황의 위업을 일구어냈다.


중국의 여러 나라가 진나라를 욕한 것으로는 순장의 풍습도 있었다. 서융을 정벌한 진목공도 정작 본인이 죽었을 때에는 측근 신하 3명을 포함해서 177인을 순장했다고 하여 사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순장은 진나라의 풍습이었기 때문에 현군 진목공도 피해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왜 진나라는 순장을 고집했을까. 아마도 선대의 주요한 세력들을 같이 없앰으로써 뒤에 왕위를 잇는 왕이 큰 무리 없이 자신의 뜻을 펼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변방·혼합·교류에서 솟는 새 에너지


진나라가 팽창할 무렵, 중원은 합종과 연횡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들이 그토록 무시했던 진나라가 강성하여 자신들을 노리는 순간까지도 중원의 여러 나라들은 힘을 합칠 수 없었다. 좁은 중원 안에서 서로 다투며 수 백 년간 자신들끼리 반목과 원한이 너무나 깊었기 때문이다. 결국 중원은 다민족이 서로 섞여 있는 '야만족의 국가'라는 오명을 극복하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법을 적용하는 상앙의 변법으로 강력한 국가를 세운 진나라가 차지했다.


한나라 이전에 중원을 제패한 주나라와 진나라는 모두 실리를 추구하면서 초원의 여러 문화를 조화시킨 중국의 서북 지방 출신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찬란한' 중국의 역사에는 언제나 초원의 민족이 있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가 중원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나라는 오랑캐의 틈바구니에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그들을 통치하는 시스템을 개발해왔고, 이는 곧 중원을 통일하는 힘이 되었다.


지금은 덜하지만 한국도 지역감정이 무척 심했다. 땅 크기로만 본다면 지극히 작은 나라에서 그렇게 갈려 서로 반목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시야와 생각이 좁다는 것을 의미한다. 춘추전국시대 중원을 통일한 나라는 그들 안에서 서로의 명분과 정통성을 내세운 나라가 아니라, 시야를 넓히고 이질적인 문화를 받아들인 진나라였다는 점은 우리에게도 타산지석이 되지 않을까.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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