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10209/1/BBSMSTR_000000010227/view.do


<5>당태종의 등장

기사입력 2011. 02. 09   00:00 최종수정 2013. 01. 05   06:30


고구려 침공 실패 수나라 `나락'에 빠지다


중국 시안 외곽 100㎞ 지점에 위치한 법문사(法門寺) 내부에 부처님의 엄지손가락 사리가 모셔져 있는 진신보탑이 우뚝 솟아 있다. 618년 설인고를 격파한 이세민이 장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법문사에 들렀다. 그는 법문사 동쪽 우궁현에서 태어났다. 어린 이세민이 아프면 아버지가 법문사에서 쾌유를 빌었다. 이세민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이어준 부처님께 재배하고 중원의 통일을 염원했으리라. 필자 제공


615년 가을 8월 15일 하늘이 높고 푸른 가을 날씨였다. 가을 햇살을 등지고 수만 명의 사람이 산서성 대현의 안문성으로 벌떼같이 내닫기 시작했다. 먼지가 거대하게 피어나는 무질서한 행렬에 수양제도 끼여 있었다. 돌궐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진원지는 실필칸에게 시집간 의성공주였다. 그녀는 칸이 대(代) 지역에 순행을 나온 수양제의 행렬을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친정을 위해 밀고했다.


하지만 밀고는 칸의 계책에 역이용당한 것이다. 수많은 백성들은 성안에 비축된 식량을 축낸다. 유목민들은 언제나 성에 사람들을 힘껏 밀어 넣었다. ‘자치통감’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성안에 있는 군사와 백성들이 15만 명인데 식량은 겨우 20일을 지탱할 수 있었다. 화살이 황제 앞에 이르니 그가 크게 두려워해 조왕 양고를 부여잡고 울어 눈이 퉁퉁 부었다.”


3차에 걸친 고구려 침공은 완전히 실패했다. 과도한 징발과 착취는 전국적인 반란을 불렀고, 이제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데다 돌궐의 칸이 수양제 자신의 일행을 포위했다. 고구려와 동돌궐이 손을 잡았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황제는 고구려 침공계획을 중지할 것을 약속하고 전국에 모병을 호소했다. 고구려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 각지에서 다투어 모병에 응했다. 군사들이 몰려오자 칸은 포위를 풀었다.


당시 18세였던 이세민(당태종)도 모병에 응한 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구려와의 전쟁이 수나라를 어떻게 망쳐 놓았고, 고구려가 돌궐을 충동해 어떻게 중국을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는지 생생히 목격했다. 어린 나무처럼 예민한 감수성과 함께 성장해 가는 시기에 새겨진 체험은 평생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이세민은 이때 새겨진 체험을 평생 생애의 과제로 짊어지고 갔다. 그도 30년 후 고구려와의 싸움에 패했고 병을 얻었으며, 병사할 때까지 고구려 정복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점 양제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당시 이세민의 아버지 이연은 태원의 유수를 맡고 있었다. 북쪽으로 돌궐과 인접하고 남쪽은 장안과 낙양에 연결되는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이연은 돌궐과 싸워 패배만 거듭했다. 책임을 물어 극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617년 차남 이세민의 강권을 받은 이연(당고조)은 수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세민의 눈부신 활약으로 그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고, 11월 장안에 입성했다.


장안은 북위 이래로 유목민 방어를 전담했던 무천진 군벌의 오랜 본거지였다. 수왕조에 불만을 품어온 그들은 무천진 군벌 가문 가운데 지체가 높은 가문의 수장인 이연이 들어오자 환영했다. 그리고 장안을 다시 천하의 중심으로 만들 희망을 이씨에게 걸었다. 이연은 국호를 당(唐)이라 했다. 이연(당고조)이 장안을 점령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 역시 수많은 군웅의 하나에 불과했다.


618년 수양제가 야한 목욕탕에서 우문화급에게 살해되자 수나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내란으로 해체되고 있었다. 군웅할거 상태였다. 장안의 서북방에는 이궤(李軌) , 설거(薛擧) , 양사도(梁師都)가 있었다. 산서의 유무주(劉武周)는 쉴 새 없이 태원을 위협했으며, 하북평야에는 두건덕(竇建德)이 하(夏)나라를 세우고 있었다. 강남에는 남조 양(梁)왕실 계열의 소선(蕭銑)과 북방에서 이동한 두복위(杜伏威)와 보공석(輔公 )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리고 동부 낙양에는 옛 수왕조의 관료인 왕세충(王世充)이 정(鄭)나라를 세워 견고한 도성을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새로 건국한 당에 최대의 위협은 감숙성 금성군에 본거지를 둔 설거였다. 본래 금성(金城)은 토번족의 침공에 대비한 방어기지였다. 그곳에 배치된 다수의 정예병은 설거의 부하가 됐다. 전력이 매우 강성했다. 한때 설거가 그의 아들 설인고를 보내 장안 가까이까지 가서 공격한 적이 있었다. 이때 이세민이 분전해 이를 크게 격파하고 패퇴시켰다.


618년 장안 부근에서 이세민은 죽은 설거를 이은 아들 설인고의 군대와 격돌했다. 섬서성 장무현에 위치한 고척성에 군진을 둔 이세민은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군수품은 풍부했다. 장거리를 이동해 온 설인고의 군대는 그렇지 못했다. 설인고가 싸움을 걸어왔으나 굳게 성채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이 급한 부하들이 성문을 열고 나아가 싸우려고 했지만 이세민이 이를 막았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갔다. 드디어 적군의 양식이 떨어지고 장병들의 동요가 일어났다. 전쟁이 지연되면 지연될수록 불리해지는 설인고에게 유일하게 살길은 당군과 결전해 만에 하나 있을 승리를 기대하는 정도다. 설인고가 곤경에 처할수록 급해진다는 것을 이세민은 간파하고 있었다.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이세민은 부하 양실에게 명해 천수원 평야로 나아가 진을 치게 했다. 설인고의 부하 종나후가 크게 기뻐하며 공격해 왔다. 이세민은 방어만 해 적을 지치게 했다가, 전군에 명해 적을 포위했다. 그리고 그의 친위대와 함께 적진으로 돌격해 앞뒤에서 협격을 했다. 이 광경을 본 이세민의 군대는 함성을 울렸고 적군은 혼란에 빠졌다.


“파죽지세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세민은 패주하는 적군을 추격했다. 종나후의 병사들을 설인고가 진을 치고 있는 경주성(涇州城)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기 위해서였다. 병사들은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설인고는 포위당했고, 정병 1만과 함께 항복했다.


이세민은 피차 힘의 관계를 잘 생각하고 상대방의 약점이 드러나기 전까지 끈질기게 기다린다. 그리고 시기가 왔다고 판단됐을 때 즉시 행동을 일으켜 상대방의 약점을 찔러 그 힘을 무너뜨려서 섬멸전에 몰아넣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당은 섬서에서 감숙에 이르는 설거의 영토를 평정했다. 이로써 당은 서쪽에서 위협을 상당히 줄이고 동쪽 중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한편 동쪽에서 군웅 이밀이 낙양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낙양성에 수양제가 시해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낙양의 관료들이 양제의 손자 양동을 추대해 천자의 자리에 앉혀 놓은 상태였다.


양제에게 친위대 일부를 물려받은 왕세충이 응원군으로 낙양성에 입성했다. 수의 관료들은 기세를 만회했다. 직후 왕세충은 두건덕에게 격파된 우문화급의 패잔병이 도망해 온 것을 수용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얼마 후 왕세충은 이밀이 방심해진 틈을 노려 밤새 진군해 새벽 공격을 가했다. 수년간 쌓아올린 이밀의 세력은 단 한 번의 패배로 뿌리가 뽑혔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혼란의 시기였다. 과거 이밀은 이연이 그 휘하로 들어가고 싶다고 애원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하지만 이제 그가 서쪽 장안으로 가서 이연에게 더부살이하는 인생이 됐다.


흘러 들어온 이밀의 무리 가운데 위징(魏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선(唐詩選)’의 서두에 실린 위징의 술회를 들어보자. “중국 전토에 또 난세가 찾아와 군웅이 패권을 다툴 때 나도 붓을 내던져 전란 속에 뛰어 들었다. 그리고 변설의 힘으로 천하를 통일하려던 계획은 완성되지 못했으나 정열에 불타는 이상은 내 마음속에 아직 남아 있다.” 여기에는 위징의 좌절감, 앞으로 무슨 일인가를 하고자 하는 그의 뜻이 뒤얽힌 심정이 전해진다.


위징은 패배한 군웅 이밀의 부하였다가 고조의 장자 이건성(李建成)의 유력한 측근이 됐다. 황태자 이건성이 아우 이세민과의 경쟁에서 패했으나 위징의 인격에 끌린 이세민이 그를 부하로 삼았다. 그의 주군은 세 번 바뀌었고, 그때마다 패배한 주군은 죽음을 맞았다. 수말의 군웅할거시대를 살아간 어떤 젊은 초상은 이러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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