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heritage.tv/brd/board/229/L/menu/246?thisPage=1&brdType=R&bbIdx=11115 

        https://www.youtube.com/watch?v=JjV2LKH54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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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2부 북한산에는 궁이 있었다

2013년



서울 근교의 산 가운데 가장 높고 산세가 웅장하여 서울의 진산으로 불리우던 북한산.


그 깊은 숲속에 궁궐이 있었다. 3백여년 전 천혜의 요새! 북한산성에 둘러싸여 있던 궁궐은


조선의 국가수호 프로젝트였다.2014년 10월. 북한산성 행궁지 내전의 원형 모습이 최초로 발굴됐다. 


역대 발굴된 행궁지 중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상태. 300년 전 조선의 행궁은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발굴됐다.1915년 무렵 수해로 붕괴되기 전 행궁의 옛 모습이다.북한산성 내 남쪽에 자리했던 행궁은 경사지를 따라 지어져 울창한 숲에 둘러 쌓여있었다.조선은 왜 북한산 깊은 골짜기에별궁을 마련해놓은 것일까!


삼국시대부터 북한산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중심이 되는 길마다 성곽을 세웠고,지형을 활용해 쌓은 성벽은


적국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든든한 철벽이 되어주었다.


도성과 가까워 백성들이 피난하기가 수월하고 물이 충분하고 땔감도 넉넉하거니와돌도 풍성해서 성돌을 만들어 쌓기에 좋았다.북한행성은 남한산성처럼 왕궁을 떠나야 할 때왕이 몸을 의탁하기 위한 용도였다.


북한산성은 이렇게 한양이 위험에 처했을 때  왕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거처, 행궁을 지키기 위한 방어 전략적인 성채였다. 북한행궁은 북한산성 축성 다음 해1712년에 지어졌다.외세의 침입을 겪으면서 행궁의 필요성을 절감한 숙종이 강한 의지를 갖고 완성한 것이다. 


북한행궁은 120여 칸의 규모로도성의 궁 보다는 못했지만 산중궁궐로는 웅장한 모습을 갖췄었다.


경사가 완만한 계곡 일대를  크게 3단으로 조성하여 각 영역은 행각과 내곽담장으로 구분했고


전체영역은 외곽담장으로 둘러서 보호했다. 


왕이 거처하게 되는 사적 공간인 내전터는 총 28칸의 규모로 확인됐는데 마루와 온돌을 갖추고 있는 구조다.


행각과 내당은 9칸 크기인데 내당은 왕과 왕비의 침실로 쓰였다. 중심 건물로 들어가는 전면 중앙에는 


임금이 다니는 길인 어도와 대문이 있다. 안에는 좁은 뜰을 둔 정당을 배치했는데왕과 대신들이 정무를 보던 곳이다.


외곽에는 이중으로 담장을 쌓아 시설물을 보호하였는데 특히 중심영역을 둘러싸는 배수로 처리는


궁궐의 내전에 걸 맞는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행궁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군사시설을갖추었던 당시


북한산성 내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던 행궁을 보호하기 위한조선의 수비책은 철저했다.


당시 숙종은 360명의 승군을 북한산성 내의 사찰에 주둔시켰는데 이들을 총지휘하는 곳이 중흥사였다.


승군들은 불경을 공부하면서 낮에는 무술을 익히며 유사시에 산성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사찰들은 대부분 성문에 가까운 곳에 위치해 국가의 명령이 있을 때 쉽게 출동할 수 있게 했다.


행궁을 지키기 위한 또 다른 산성수비 보완대책은 별도로 중성을 축조한 것이다.


노적봉과 중봉 사이에 있는 협곡 사이, 그 중간에 쌓은 또 하나의 성곽!! 


지형이 평탄한 대서문이 적에게 뚫리더라도 병목과 같은 이 일대 계곡을차단하면 행궁을 비롯한 주요 시설물과 인명을 보호할 수 있도록 구축한 것이다. 암반의 전면은 사람이 기어오르지 못하도록거의 수직으로 다듬었으며, 그 옆 협곡에는 수문 하나를 더 세웠다.현재는 5미터 가량의 개울 위에 축조했던 흔적만 남아 있다.


그러나 좌우로 연결되었던 성벽은 지금도 뚜렷이 남아있어그 규모를 가늠케 하고 있다. 


자연의 지형을 지혜롭게 이용해 건설한 조선의 군사요새,북한산성 행궁은 조선의 철저한 방어체계위에


세워진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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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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