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11130/1/BBSMSTR_000000010227/view.do


<46>唐 군부의 천재 사라지다

기사입력 2011.11.30 00:00 최종수정 2013.01.05 07:26


아버지 내몰고 황제 차지 당 태종 부전자전의 현실에 고통


당나라 의덕태자묘 벽화에 묘사된 당나라 시대 장수들 모습. 필자제공


후군집(侯君集)은 당제국 군부의 핵심 인사였다. 643년 2월 28일 당 태종의 명으로 장안 궁정 능연각에 초상화가 걸린 28명의 공신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한 그가 태자 이승건의 반란모의에 주모자였던 것이 드러났다.


당 태종은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후군집이 위험인물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군사적 천재성을 아끼던 태종의 마음이 그것을 덮게 했다.


태종과 그의 조카 강화왕 이도종 사이의 대화를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후군집은 방현령과 이정 아래에 있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가 이부상서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욕심을 채울 수 없습니다. 장차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후군집의 재주와 그릇으로 무엇을 못 하겠소! 짐이 어찌 그에게 중요한 자리를 아끼겠소. 미리 짐작으로 시기하는 두 마음을 생기게 하시오?”


후군집은 사치가 심하고 물욕도 많지만 당 태종의 등극을 가능케 한 626년의 현무문 쿠데타를 기획했고, 635년 토욕혼 정복과 640년 고창국 점령 작전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는 야전에서의 전투도 궁궐 내에서의 쿠데타도 성공적으로 기획하고 수행해 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태자의 쿠데타가 실행에 옮겨졌다면 시나리오를 그가 짰을 것이고, 승산도 높았다고 볼 수 있다.


643년 4월 어느 날, 그는 당 태종에게 심문을 받았다. 그것은 큰 배려였다. 하급관원인 형리(刑吏)에게 심문받는 모욕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한 형리가 법대로 그의 가족과 친지들을 모두 사형에 처할 것이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후군집은 처음에 반란 모의에 연루된 사실들을 태종이 보는 앞에서 극구 부인했다. 공모자였던 그의 사위 하란초석과 대질 심문이 벌어졌다. 그의 앞에서 모든 사건의 과정을 사위가 진술했다. 그래도 부정하자 후군집의 눈앞에 그가 태자궁을 왕래한 날짜와 시간이 적혀있는 수사 기록들이 펼쳐졌다. 후군집의 답변이 궁색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모든 것을 실토했다.


태종은 목숨을 살려주고 싶어서 신하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후군집은 공로를 세웠으니 그의 목숨을 내가 구걸한다면 가능하겠소?” 회의석상에 침묵이 흘렀다. 황제가 후군집 구명을 위한 기회를 주어도 말을 꺼내는 사람 하나 없었다. 결국 후군집을 죽인 것은 그 자신의 인격이었다. 너무나 유능하고, 영원히 채울 수 없는 욕심을 가진 그는 당 태종이란 거대한 그릇조차도 담아낼 수 없었다.


“공과 길게 결별하겠소.” 후군집은 태종의 마지막 인사를 받았고 저자거리에서 참수됐다. 그의 가족들이 유배지로 떠난 빈집을 수색했다. 특이한 물건들이 나왔다. 투명한 아이의 피부를 가진 두 명의 미인들이었다. 그들은 아이 때에 후군집의 집에 팔려 왔다. 그리고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아이들은 다 커서도 다른 것을 먹지 않고 젖이 풍부한 여러 유모의 젖을 마셨다. ‘자치통감’에는 “두 명의 미인을 잡았는데 어려서부터 사람의 젖을 먹어 다른 것을 먹지 않았다”고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섬세한 호색한이기도 있었다. 3년 전 이국적인 여자들로 넘치는 실크로드의 고창국 점령 때 여자문제만은 일으키지 않았던 것도 까다로운 그의 기호 때문인 듯하다.


모반한 부하지만 그와 세상에서 이별해야 하는 안타까운 마음만이 태종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7년 전 아버지를 감금하고 형제들을 죽인 현무문의 변이 그대로 재현됐다. 그때 후군집은 자신의 편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아들 편에 서서 반기를 들었다. 이게 인과응보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태종은 이제야 아버지 고조 이연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태종에게 큰아들 태자 이승건의 처리문제는 사랑했던 부하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법대로 한다면 태자는 죽어야 한다. 하지만 태종 자신이 한 짓을 그대로 따라하려고 했던 아들을 죽인다는 것이 스스로 수긍이 되지 않았다. 물론 부정(父情)도 마음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이 아이가 죽는다면 쿠데타에 성공하지 못한 죄 때문이라는 것은 자신도 세상 사람들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살려 두자니 타당한 이유가 없었다.


태종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아래에 수많은 신하가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아무도 없는 정상에서 홀로 결정을 하는 것이 외로웠다. 고통스러운 감정이 묻어나는 말이 그의 입에서 억지로 기어 나왔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한참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 침묵을 깨고 말을 했다. 수나라 때 수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던 내호아의 아들, 내제(來濟)라는 하급 관리였다. ‘자치통감’은 그 대답을 이렇게 전한다. “폐하께서 자애로운 아버지가 되어 태자가 천년(千年)을 다할 수 있다면 훌륭합니다.” 태종이 너무나 듣고 싶은 대답이었다. 얼마나 고마웠을까. 내제는 얼마 후 높은 관직에 올랐다.


태종은 태자를 폐서인시키고 후군집과 두하, 자신의 동생 이원창을 모두 사형에 처했다. 이렇게 태자의 반란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하지만 다른 어려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누가 새로운 태자가 될 것인가?


형이 밀려나가자 머리 좋은 뚱보인 위왕 이태는 쾌재를 불렀다. 그는 매일 아버지 태종을 시봉(侍奉)했다. 태종도 이태를 생각에 두고 있었다. 황제 비서실 관리들도 모두 이태 편을 들었다. 정확히 말해 그 전에 황제가 보여준 행동들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그들이 선수를 쳤다.


하지만 정작 조정 내에 권력이 있었던 장손무기는 생각이 달랐다. 죽은 장손황후의 오라비인 그는 적자 이승건·이태·이치의 외삼촌이었다. 어느 날 장손무기와 저수량, 그리고 여러 신하들 앞에서 당 태종이 말했다.


“이태가 이렇게 말했네. 자신이 태자가 되어 황위를 잇게 된다면 하나뿐인 아들을 죽이고 아우인 이치에게 보위를 물려줄 것이라고.” 태종은 분명히 이태의 말에 감격하고 자랑을 한 것이었다. 당 태종도 자식 앞에서는 행복한 바보가 되는 한 인간이었다. 그러자 저수량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폐하께서 크게 실수하셨습니다. 폐하가 돌아가시고 위왕 이태가 즉위한 후 그의 아들을 죽이고 진왕 이치에게 황위를 전해주는 일이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승건을 태자로 삼으시고 이태를 총애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폐하께서 이태를 태자로 세우시면 먼저 이치를 죽여 후한을 없앨 수 있습니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대답을 하는 당 태종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수량은 태종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렸다. 태자의 반란은 모두 태종이 키운 일이었다. 이러한 대화를 전해들은 이태가 불안해졌다.


그는 동생 이치를 찾아가 말했다. “숙부 이원창은 큰형의 반란에 연루돼 독을 마시고 자진했지. 한데 너는 사이가 좋지 않았더냐?” 이치 역시 모반에 가담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치는 자신의 처소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 우울한 모습을 우연히 본 태종이 물었다. “왜 그리 근심에 차 있느냐?” 이치는 입을 열지 않았다. 태종이 계속 다그치자 그제야 이태와의 일을 이야기했다. 협박을 당한 이치가 끝까지 형 이태를 지켜주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고 볼 수 없다.


그는 무서웠다. 죽은 숙부 이원창과 자신이 친하게 지냈다는 사실이 이태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마저 아버지에게 숨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태종은 이치가 작은 형 이태를 지켜주려 한 것으로 느꼈다. 너무나 착한 아이였다. 태종의 마음에 심경의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전 태자 이승건이 폐서인이 되어 유배지로 떠나기 전 아버지에게 남긴 말 한마디가 태자를 꿈꾸던 이태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그것은 당나라 군부에 새로운 천재가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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